15. 만남
“불이 난 남대문, 아름다웠어요? 국보 1호라면서요?”
지오를 만나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고 공항리무진을 타고 나오는 길이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서해의 풍경을 바라보던 지오가 입을 열었다.
‘아름다웠어요?’ 라고? 뭐야 이거, 완벽한 과거시제잖아. ‘국보’라는 단어, ‘라면서요?’의 어미 처리도 완벽하다. 만나서 포옹하고 리무진을 타기까지 희영은 그동안 준비한 영어로 살가운 인사를 했다. 지오 또한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다. 그런데 이 한국어는 뭔가.
희영이 넋 나간 사람처럼 지오를 바라보았다.
지오는 피부 빛깔만으로는 외국인이라는 티가 별로 나지 않았다. 좀 흰 편이긴 하지만 한국인 중에도 흰 피부를 가진 애들은 많으니까. 머리색깔이 몹시 튀었지만 홍대 앞엔 그보다 더 튀게 염색을 하고 다니는 애들도 많다. 그런데 그 이상한 하트 모양 선글라스를 벗자 외국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눈동자 색이 나타났다. 처음엔 검은 눈동자라고 생각했지만 검다, 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빛깔이 눈동자에 고여 있었다. 검은 녹색 눈동자. 속 쌍꺼풀이 진 아몬드 모양의 검은 녹색 눈동자가 희영을 향해 따뜻하게 웃었다.
눈웃음을 짓는다거나 한 것도 아닌데 천성적으로 웃고 있는 것 같은, 구름이 지나가는 듯 한 시원한 눈빛이었다. (순간적으로 희영은 묘한 질투가 일어나는 걸 느꼈다. 선한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난 운명에 대한 질투인지, 악다구니 쓸 일 따윈 한 번도 없이 자랐을 것 같은 티 없는 외모에 대한 질투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아무튼) 선글라스로 가려졌던 눈이 나타나자 지오는 비로소 외국인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외국인 소녀가 완벽한 발음으로 올해 초 불타버린 대한민국 국보1호 남대문에 대해 묻고 있는 거였다.
예의상 연습한 한국어겠지.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이 의례적으로 연습해오는 몇 문장들 말이다. 매번 메일을 쓸 때마다 영어사전을 뒤적여가며 밤을 꼴딱 새우곤 하던 희영이었다. 지오는 메일에서 한국어를 아주 조금 할 줄 안다고 했다. 희영은 말 그대로 '아주 조금' 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머리를 쥐어박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희영의 복잡한 표정에 아랑곳없이, 지오가 엠피쓰리 전원을 켰다. 하늘색 이어폰을 Y자로 펼치더니 지오가 이어폰 한쪽을 들고 희영 쪽으로 팔을 뻗었다. 가느다란 지오의 팔이 희영의 어깨 근처를 지나고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희영의 귓불을 스쳤다. 귀밑머리가 따뜻한 밀물에 쓸리는 듯한 부드러운 감촉이 지나갔다. 이렇게 스스럼없는 스킨십이라니! 지오의 스킨십에 희영이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지오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희영의 둥그스름한 귀에 자신의 이어폰을 끼워놓았다. 그 모든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 희영의 멈칫거림이 괜히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귓속에서 뭐라 빠른 영어로 중얼거리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희영이 갸우뚱하고 있는데 이어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아리랑이잖아?
“이 노래, 알아요? 아-리-랑.”
아리랑을 발음할 땐 살짝 외국인 티가 났다.
“아리랑 좋아해요?”
지오가 다시 물었다.
아리랑을 좋아하냐고? 너무 익숙한 노래라 좋아하는지 아닌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노래였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노래야. 민요.”
“민-요.”
민요를 발음하는 지오의 입술이 귀여웠다. 아카시아 잎을 오물거리는 사랑스러운 기린 같다. 다가왔던 지오의 손길과 귀여운 발음 때문인지, 조금 전 질투 비슷한 느낌은 온데 간데 없고, 희영은 속으로 소리쳤다. 상쾌해. 이 아인,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네.
“누가 부르는 거야?”
“피트 시거. 우리 할머니가 좋아하는 할아버지 뮤지션.”
말해놓고 지오가 함빡 웃었다.
이제 막 패기 시작한 쇄골 중간에서 보랏빛과 푸른빛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돌멩이가 가죽 목걸이에 매달려 흔들거렸다. 희영의 시선이 돌멩이에 머물렀다.
“그거, 예쁘다.”
“응, 이건 운석!”
“운석?”
“외계에서 온 거예요.”
외계라니. 외계라는 말을 너무나 천연스럽게 하는 아이를 희영이 빤히 바라보았다. 지오가 또 방긋 웃었다.
“이 돌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지구인이라는 느낌이 강해져요. 나는 내가 지구인인 게 좋아요.”
뜨아. 지구인인 게 좋다는 생각, 희영은 한 번도 안 해봤다. 대한민국 사람인 게 좋다 나쁘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처럼. 희영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지오가 신기한 걸 발견한 듯 희영의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희영이 휴대폰 줄에 매달아놓은 하트 모양의 펜던트엔 아주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지오가 바싹 얼굴을 붙이더니 큰 소리로 읽었다.
“코-코-돌-코-나-기-펭!”
그러곤 희영의 얼굴을 코앞에서 바라보았다.
“잘, 읽었어요?”
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이에요?”
“뭐냐… 음… 아멘 같은 거야.”
“…Amen?”
뭐라 설명하기 어려워진 희영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지오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며 코코돌코나기펭… 한 번 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한글, 읽을 줄도 아네?”
“아주 조금. 나 글자 디자인 관심 많아서 글자들 수집하거든요. 한글은 특별히 예뻐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희영이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외국인 친구가 생기면 써먹으려고 영어 회화 공부를 최근에 꽤 했었다. 그런데 도대체 써먹을 일이 없겠군. 희영이 혼자서 픽 웃었다.
지오에게서 캐나다 오지의 맑은 하늘.
연우에게서 촛불집회의 프리 허그.
수아에게서 진짜 싸가지 있는 축하메시지.
아, 모두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