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희영, 지오를 알아보다
G선상의 아리아가 울렸다.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연우였다.
“공항이야.”
“와우― 몇 시 도착이야 언니?”
연우는 오늘 촛불문화제에 나갔다가 밤늦게 희영의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수아와 함께.
“파리, 파리!”
장난스러운 연우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희영이 쿡, 웃었다.
연우는 모든 모임을 ‘파티!’라고 외치는 아이였다.
가만 있자… 오늘 촛불 집회에 윤도현, 김장훈, 이승환이 나온다고 했나. 희영은 김장훈을 좋아했다. 김장훈은 늘 장난스러워 보이는데, 좋은 일을 많이 한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행복해 보여야 하지만 그는 어딘지 약간 슬퍼 보인다. 이상한 언밸런스. 관심과 연민이 혼동되는 종류다. 그 점에서 헤어진 동수와 어딘지 비슷하다. 동수를 사랑한다고 믿어서 사귀게 되었지만, 사랑과 연민을 혼동한 거라는 걸 알게 되는 데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 보니 동수와 헤어진 지도 거의 1년이 되어간다.
<김장훈 만나면 너 좋아하는 프리 허그 하자고 해. 인증샷 필수!>
연우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희영이 킥, 웃었다.
<오케- 허그 허그!>
연우의 답신이 포로롱 날아들었다.
글자들이 이렇게 빨리 날아다는 건 정말 신기해. 언젠가 연우가 휴대폰 메시지를 열어보며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희영은 그 뒤로 연우가 세 배는 더 좋아졌다.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받는 것을 글자들이 날아다닌다고 말하기. 글자가 날아다닌다고 마구 신기해하기. 이런 것들은 묘하게 희영의 꿈을 흔든다. 코코돌코나기펭,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지오. 이제 곧 만나게 될 아이도 희영의 꿈을 흔든다.
희영이 휴대폰 다이어리를 열어 달력을 보았다. 맨 처음 지오가 오겠다고 한 날은 5월5일이었다. 그다음은 5월 12일. 결국 5월 17일인 오늘, 도착이다. 5월 달력은 지오로 넘친다. ‘지오 도착 예정’ ‘지오 딜레이’ ‘지오 도착 예정’ ‘지오 메일 보내 확인’ ‘지오 딜레이’.
그 5월 5일 과 5월 17일 사이에 지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 아무래도 부모님의 걱정이 크셨나 보다. 희영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오늘은 이 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놀토. 지오는 혼자서 시내로 나올 수 있다고 했지만 희영은 공항으로 마중 나오겠다고 우겼다. 워낙 공항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열다섯 살 소녀인데 잘 챙겨 줘야지 싶은 마음이 컸다. 희영이 시간을 체크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 둘이 앉았다 일어난 옆 테이블을 흰 행주로 닦고 있는 남자 종업원이 희영의 뒤꼭지에 대고 “또 오십시오!”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공항까지 마중 나오는 카우치 서퍼는 내가 처음일 거야. 이희영 최고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스타가 된 기분으로 희영이 천천히 입국장으로 내려갔다. 도착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한 남자가 손을 내밀어 다른 남자의 담뱃갑을 받아 입국장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전광판 시계 근처에 지오가 있었다.
지오가 메일에서 설명해준 검붉은 머리색의 소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올리브 그린 색의 원피스를 입고 약간 휘청거리는 듯한 자세로 목을 길게 빼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까닥거리는 그 아이는 기린 같았다. 키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닌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 맘에 드는 기린이야.”
중얼거리는 희영의 입 꼬리가 상큼하게 올라갔다. 응? 이게 뭔 말이람? 오늘은 애드리브가 좋다…, 고 생각하며 희영이 심호흡했다. 코…코…돌…코…나………
주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오가 희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기 속에서 희영의 냄새를 맡은 기린처럼. 갸우뚱 고개를 돌리는 연둣빛 반달처럼. 반가운 친구에게 우듬지 잎사귀를 흔들어 인사하는 초록빛 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