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 애의 페니스
비행기가 아시아에 접어들었다. 비행지점을 보여주는 기내 모니터에 한국과 일본이 함께 보였다. 빨갛게 표시된 비행기의 앞머리가 한국을 향해 정확히 기수를 튼 것 같았다.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가는 모양이다. 발밑은 구름바다, 그 밑은 다시 까마득한 바다… 한국에 도착하기 전 그 애에 대한 내 마음을 정리해 둬야겠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우리 집 여신들이 목욕하고 향유를 뿌리고 좋은 음악을 듣고 시를 읊듯이 말이다.
작년 말 그 꿈을 꾸기 전, 그리고 그 사진을 보기 전까지, 사실 나는 단독 여행의 첫 번째 나라로 일본을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와 할머니도 그렇게 짐작했다. 무엇보다 일본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가 있으니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자막 없이 보고 싶어 배우기 시작한 내 일본어는 완벽한 수준인 데다, 일본인 웹 친구들도 많았다. 그들 중엔 자기 집 카우치를 제공하겠다는 이들도 꽤 있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예매권도 알아봤고 근처의 숙박시설도 알아놓았다. 신주쿠와 교토에 대한 공부도 끝낸 상태였고 엄마가 관심 있어 하는 야마기시즘의 연찬회를 보러 도쿄에 들를 계획도 잡아놓았다. 그리고 나는 샤미센이나 고토 연주를 꼭 배워보고 싶었다.
그렇게 일본행의 모든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 애가 갑자기 내 꿈에 나타난 거다. 쌍둥이 하프물범이 고개를 살짝 맞댄 흑백 사진을 내 침대 머리맡에 붙여놓은 그날 밤, 그 애가 나타나 내 꿈속을 마구 돌아다녔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작년 12월 21일.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도서관에서 마노 아저씨를 만나고 돌아온 날이었으니까. 일 년에 한 번 우리 마을에 오는 스페인 사진작가 마노 아저씨는 레인보우 산의 겨울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일 년에 반은 여행을 다닌다는 마노 아저씨는 12월 21일쯤 어김없이 우리 마을에 나타나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레인보우의 새해 사진을 찍어갔다. 그해 마노 아저씨는 알래스카에 다녀왔는데, 기후 온난화로 알래스카 식생 교란이 심각하다고 걱정을 했다. 특히나 하프물범들이 큰일이라며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다.
"이번에 운 좋게 만난 놈들인데 정말 예뻐!"
아저씨가 컴퓨터 화면에 사진을 띄웠다. 아! 나는 숨이 막힐 뻔했다. 새하얀 털을 가진 두 마리의 아기 하프물범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서로에게 머리를 맞댄 채 눈물에 젖은 것 같은 새까만 눈동자를 빛내면서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두 마리가 꼭 붙어서 말이다.
마노 아저씨는 이 녀석들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고, 하프물범은 보통 새끼를 한 마리만 낳는데 아주 간혹 쌍둥이를 낳는다고 했다. 아… 쌍둥이!
“그럼 얘들이 쌍둥이인 거예요?”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연속 촬영된 몇 컷을 더 보여주었다. 한 애가 하품을 하듯이 입을 벌리고 한 애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보고 까맣게 젖은 코끝을 서로 맞대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 사진 속에선 새하얀 쌍둥이 하프물범 두 마리가 유빙 위에서 서로의 털을 핥아주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날 뻔했다. 슬프고 행복했다.
“정말 예쁘지?”
마노 아저씨가 뿌듯해하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나는 아저씨가 찍은 알함브라 궁전의 새벽 사진을 보러 간 거였는데, 하프물범 사진에 홀딱 빠져서 그중 한 장을 당장 갖고 싶다고 떼를 썼다. 아저씨는 안 된다고 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수준의 프린트를 할 수 없으면 사진을 유출하지 않는 게 아저씨의 원칙이었다. 도서관의 문서용 프린터로는 사진을 인화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아저씨를 조르고 졸라 아주 작은 사이즈의 흑백으로 하프물범 사진을 한 장 프린트했다.
침대 머리맡에 쌍둥이 하프물범이 서로 고개를 살짝 맞댄 흑백 사진을 붙여놓은 바로 그날 밤. 꿈에 그 애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출현이었지만 그 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꿈속을 마음껏 돌아다녔다. 그것도 홀딱 벗은 채로 말이다!
처음엔 아주 조그만 점으로부터 시작했다. 흑백 영상이었는데, 뭔가 흐물흐물한 점액질이 내 몸에서 분리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껍질이 분리되듯 끈적끈적한 점액질이 아메바처럼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갈 때 나는 몹시 안타까워서 발버둥 쳤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꿈을 꿀 때처럼 발끝에 힘을 잔뜩 모으고 발가락을 오므렸던 같다. 그리곤 어딘가로 한없이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다 보니 속도가 조금 느려졌고 공기의 어떤 층이 내 몸을 받아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발가락을 꼭 오그린 채로 한동안 그렇게 공중을 둥둥 떠다녔는데, 눈앞에서 뭔가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조그만 살색 벌레 모양이었다. 그 살색 벌레가 나타난 순간부터 부드러운 공기장이 나를 감싸고 때로는 안아 올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꼼지락거리던 살색 벌레가 눈앞에서 점점 커졌다. 어라? 저것은…! 그것은 남자아이의 페니스였다. 누가 오나 안 오나 살피며 도서관의 인체생물학, 해부학 책 따위를 뒤져 눈에 익힌 그 페니스 말이다. 얼굴은 안 보이고 보드랍고 귀여운 페니스만 보였다. 물보석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