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코코돌코나기펭
“코 코 돌 코 나 기 펭."
희영이 중얼거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매년 새해 첫날, 희영이 다이어리 맨 앞장에 알록달록하게 써놓는 주문이 ‘코코돌코나기펭’이다. 중얼거리면 기분이 좋아졌다.
달방으로 이사를 하면서 많은 짐을 처분했다. 희영은 오랫동안 정기 구독한 9년 치의 『내셔널지오픽』 잡지에서 ‘코끼리, 코알라, 돌고래, 코뿔소, 나무늘보, 기린, 펭귄’에 관한 기사만 모두 오려냈다. 그것만으로도 두껍고 무거운 스크랩북 한 권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희영이 무턱대고 좋아한, 하나씩 이름을 부르며 함께 이야기를 만들던 희영의 일곱 친구들이 다 거기 들어 있었다.
‘Boys, be ambitious!’라는 말을 초등학교 고급 영어에서 처음 배웠을 때, '앰비셔스'라는 샤방한 발음 속에서 코코돌코나기펭,이라는 주문이 빰 빠라밤, 마징가 빔처럼 흘러나왔다. Boys, be 코코돌코나기펭! 나는 그들의 공주님 Girl이 되겠다! 코코돌코나기펭의 문장을 가진 일곱 기사는 오버 더 레인보우의 세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드림족 원탁의 기사들이었다. 사람에게 꿈과 위로를 주는 것이 종교의 주문이라면 희영에게 코코돌코나기펭은 ‘아멘’이나 ‘나무관세음보살’인 셈이었다.
코 코 돌 코 나 기 펭.
주문을 외며 희영이 커피 잔을 들었다. 마지막 한 모금. 씁쓰름한 검은 맛.
내후년엔 정말로 엄마 아빠와 함께 월드컵을 볼 수 있을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빨강 티를 입고서?! 오늘은 사우스아프리카 항공이 보이지 않는다.
코 코 돌 코 나 기 펭.
희영이 휴대폰 액정에 얼굴을 비춰보며 입술 모양을 또박또박 만들었다. 하트 모양으로 납작하게 코팅된 오래된 휴대폰 고리가 달랑거렸다. 힘내라, 희영아. 꿈은… 꿈은 이루어진다……. 답을 하듯 뱃속이 꼬르륵 거렸다. 28 사이즈 크롭트 팬츠 허리가 약간 헐거워진 것 같았다.
일찍 나온 탓에 배가 고팠다. 두 시 삼십 분. 비행기 도착 예정 시간 삼십 분 전이다. 뭘 먹기엔 좀 애매한 시간. 지금쯤 지오가 탄 비행기는 대한민국 영해에 들어왔을 것이다. 지오. 그 애는 한국여행이 처음이라 했다. 혼자서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라 했다. ‘Love, Geo’라는 메일의 서명을 볼 때마다 왠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어서 쿡쿡 웃음이 나곤 했지만 오늘, 비현실적이던 그 애가 현실로 온다. 엄마 아빠와 함께 목 터지게 외치던 ‘대애~한민국’에. 희영이 단 한 번도 떠나보지 못한 대한민국에.
대 한 민 국.
옆자리 나무 의자에 놓인 가방을 열어 희영이 여권을 꺼냈다. 만들어 놓은 지 4년째지만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대한민국 여권은 플라스틱 겉장이 빳빳했다. 희영이 여권 사진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때만 해도 피부가 뽀얗고 시선엔 아직 그늘이 적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을 줄기차게 입사원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며 백여 군데 회사에 원서를 넣고 역시 줄기차게 낙방하면서 자신의 존재가치에 심각한 불신을 가지던 막판에 붙은 직장. 불쑥 날아온 합격 통지는 홍해가 갈라진 기적 같았다. 해외유학파도 아니고 스카이 출신도 아니고 토익 점수 최상급도 못되는 고만고만한 젊은이가 백 번 원서를 넣고 백 번 떨어지는 거야 낡은 유행처럼 자극이 없어져버린 시대이긴 하지만, 정말로 백 번을 떨어지고 나니 ‘잉여인간’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끊임없이 원서를 넣고 낙방하는 사이에도 줄기차게 시급 2,800원 아르바이트로 학원비를 만들어 취직에 도움이 될 만한 온갖 자격증 학원들을 전전하던 희영을 구사일생으로 인정해준 회사. 고마웠다. 회사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묻지 말고 당신이 회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물어라. 예썰! 희영은 진심으로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입사한 지 일 년 만에 희영은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자신을 구해준 회사에서 도무지 무슨 꿈을 꿀 수 있는지, 꿈으로 가는 아무런 방향타가 보이지 않았다. 환란에 가까운 실업대란의 시대에 간신히 취직을 하는 것으로 꿈을 이룬 것이라면, 꿈이라는 말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입사 일 년 만에 희영은 권태로운 그늘로 덩어리진 자신의 미래가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희영은 책 만드는 일을 좋아했지만 학습지 만드는 걸 좋아한 건 아니었다.
희영의 회사는 특목고를 준비하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습지 시장을 선점한 회사였다. 초등학생용 특목고 문제집이라니! 잘될까 생각하기 쉽지만, 초등학생용 특목고 문제집으로 돈벌이가 가능한 게 대한민국이다. ‘내 아이만은 최고로 키우겠다’는 불타는 경쟁의지를 가진 부모들이 득시글거리는 나라니까. 약육강식의 먹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적어도 상위 몇 퍼센트에 자기 새끼를 등극시키고 말리라는 의지 충천한 부모들이 희영이네 회사의 주 고객층이었다. 미세한 변동이 있긴 하지만 고객층 자체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월간 문제집과 단행본 문제집을 동시에 내면서 희영의 회사는 빠듯한 일정을 바쁘게 소화하며 돌아갔다.
시중의 학습지들을 모으고 문제유형을 정리해 도표화하고 윗선에 올려 보내면 되는 허드렛일을 하던 희영은 차츰 그런 문제들을 오려붙이고 뒤섞고 짜깁기해 문제를 출제하는 일을 하다가 (낡은 문제일수록 새로워보여야 하므로, 이 일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했다), 최종 문제집의 인쇄 상태를 검토하고 수정하는 일까지 두루 해내야하는 4년차가 되었다. 요란한 머리 장식을 한 살찐 개를 팔에 안은 채 시도 때도 없이 편집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사장의 두툼한 눈밑 지방살을 보는 일도 이제 면역이 되었다.
하루 평균 여덟 시간 이상 회사 일을 하지만 월급은 임시직 수당인 일급으로 계산해 받는 구조였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입사할 때부터 암묵적인 합의 하에 이루어진 계약이었으므로 4대 보험에 가입된 직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월급 계산의 비루한 현실에 부딪히면 처음엔 몸서리친다. 하지만 쥐꼬리만 해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기만 한다면, 한 눈 딱 감고 적응하며 살아지는 게 이 도시의 생존윤리다.
꿈은 어디 있냐고? 글쎄. 월급 나오는 직장에 붙기만 한다면! 마음 졸이며 ‘후루룩’ 삼키던 라면 국물에 말아 먹은 딱딱한 찬밥 덩이가 혹시? 그건 이미 소화되어 피둥피둥한 살과 누리끼리한 피부로 형질 변화했지. 그렇게 4년이 훌쩍 지난 것이다.
**성취감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열심히 습관적으로 한다(행복한가 어떤가 따위는 묻지 말 것). 월급의 일부를 꼬박꼬박 저축하며 결혼자금을 만든다. 결혼한다. 아이를 낳는다. 내 집 마련의 꿈을 향해 장기 도전. 내 집 마련. 아이들은 크고. 다 큰 아이들을 결혼시키고. 나는 '노약자'가 되어. 죽는다.**
호오, 이런 명쾌한 덧뺄셈이라니. 물론 그 사이에 복병 같은 괄호들이 때때로 놓이겠지만, 이 명백한 산술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생들이여. 벗어날 의지조차 없는 생들이여. 희영은 덜컥 겁이 났다. 덜컥 여권 사진을 찍고 여권을 만들었다. 그러나 여권을 사용해볼 시간도 돈도 없었다. 그리고 공항을 그리워하는 병이 시작되었다.
매일 코코돌코나기펭! 주문을 외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