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희영, 공항에서 추억하다
일찍 서둔 터라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그 애, 지오의 도착 예정 시각은 세 시.
스타벅스에 앉아 희영이 세계지도를 펼쳤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나.”
작년 6월 공항에서 엄마와 나눈 마지막 인사였다. 눈물범벅이 되어 한동안 끌어안고 있던 출국장 앞에서 고작 떠오른 말이 그거였다. 파라과이로 일하러 가는 엄마에게 말이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크게.
“파라과이랑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그래도 가까워. 한국은 파라과이랑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랑도 이렇게 먼데.”
공항에서 엄마와 마지막 비빔밥을 먹으며 펼쳐본 세계지도에서 한국은 파라과이와 정말 멀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도 까마득히 멀었다. 그러니까 내가 제일 외로울 거야. 엄마는 아빠랑 함께잖아. 그러니까 잘 지내야 해. 이런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희영의 말은 목울대 밖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한 2년 동안만 열심히 일하면 안정될 거야. 니 아빠가 그랬어.”
“그래. 그럴 거야.”
“2년 후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축구를 보자.”
“빨강 티 입고?”
“응.”
희영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1997년, 아이엠에프 직격탄을 맞은 희영이네 가계는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어 밥숟가락을 손에 든 채 집 밖으로 뛰쳐나온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작은 부품 회사는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외동딸 희영이 좋아하던 『내셔널지오그래픽』을 초등학교 때부터 정기구독 시켜줄 수 있었던 부모님의 호시절은 거기서 끝났다.
아주 어려서부터 살던 잠실의 24평 아파트는 희영의 성장과 함께 가격이 착실히 뛰었지만 직원들의 밀린 임금과 연차에 합당한 퇴직금을 정산해 주기 위해 제일 먼저 처분되었다. 집을 팔아야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엄마가 “그렇게 하세요”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뒤끝 없는 심플한 어조였다. 이제 막 피고 있는 어린 딸 앞이니까 졸지에 닥쳐온 난국에 더욱 의연하고 대범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엄마는 애써 생각하고 있었던 것같다.
강남은 이상한 세계였다. 강남으로 통칭되는 지역의 구석구석에 형편없는 월세방들이 수두룩하다는 건 경험해 본 사람만 안다. 어느 쪽엔 명품만 걸치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숨겨둔 지하도시라도 있는 것인지 어느 쪽엔 학교 급식마저 먹을 형편이 못되는 어둠의 아이들이 살았다. 아파트 평수에 따라 동아리가 나뉘었고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대우가 달라졌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일찍 로커의 꿈을 가지거나 과격한 일탈을 자연스러운 성장통으로 생각하며 주유소를 전전했고, 있는 집 아이들은 밤새 계속되는 고액 과외 선생들과 크고 작은 썸씽을 만들며 하늘, 하늘, SKY를 향해 전진했다.
잘 사는 것도 못 사는 것도 아닌 딱 중간치 평균이던 희영이네가 아파트 제국에서 퇴출되어 신사동, 양재동, 개포동의 월세 방을 전전하기 시작하자 제일 먼저 달라진 게 선생님들의 태도였다. 모르는 강북 사람이 보면 어, 강남 사시네? 할 주소들인 그 강남에서 희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섯 번이나 집을 옮겨 다녔다.
‘달방 있음’을 찾아 떠돌기 시작한 가장의 비애를 나름 위로한답시고 “달방이 뭐야? 달이 사는 방이야?” 하며 희영이 쫑알쫑알 거려 아빠를 슬프게 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아빠, 엄마, 할머니, 희영의 단칸방살이는 생각보다 고되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눅눅하게 젖은 웃음이 살짝 살짝 빛났으니 말이다.
펼쳐놓은 세계지도의 왼쪽 귀퉁이가 둥근 탁자 아래로 처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요하네스버그가 탁자 밑으로 휘청, 휘어졌다.
“갈 수 있을까, 정말?”
희영이 지도를 받쳐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 2002년 한일월드컵은 지상천국 같았지. 그때 희영은 대학 3학년이었다. 인생이 꿀꿀한 청춘들은 물론 희영의 부모처럼 막다른 길에 내몰려 있던 어른들도 마음껏 소리 지르고 팔짝팔짝 뛰었다. 희영은 엄마가 축구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2002년에 처음 알았다. 엄마는 오프사이드니 프리킥이니 하는 규칙들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뭐 어떠랴. 아무튼 공이 들어가면 득점인 거니까. 2002년 월드컵은 축구를 몰라도 축구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해방구였다. “대애~한민국!” 목청껏 외치긴 했지만, 실은 누가 이기건 상관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게임이 계속되기만 한다면. 이렇게 신나는 축제가 계속되기만 한다면!
생각해보면 그해 대한민국은 ‘꿈은 이루어진다’는 슬로건의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마법에 걸린 게 즐거워서 모두들 함성을 질러댔는지도 모른다. 현실이 너무 구질구질하니까 그 붉은 축제 속에 다 잊고 싶었는지도. 그때 희영은 아빠나 엄마가 적어도 자살 같은 건 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겨서 든든했다. 눈뜨고 일어나면 사방에 가정경제를 비관해 자살한 사람들의 흉흉한 소식이 난무했지만, 다행히 희영의 아빠는 'Be the Reds!'가 적힌 오천 원짜리 빨강 티를 세 장에 만 원 주고 샀다고 기뻐하며 식구들과 함께 목이 터져라 ‘대애~한민국’을 외치는 사람이었다. (하느님, 감사해라!)
해방구 2002년부터 다시 5년이 희영의 눈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빗속 갓길에 급정거하고 비상등을 켠 채 깜빡이는 차처럼 위태한 시간들이었다. 어디론가 신호를 보내며 악착같이 견뎌보았지만 끝내 움직일 수 없는 고장 차 같았다.
결국, 희영의 부모님은 그토록 목청껏 외치던 ‘대애~한민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물려받은 것 없는 빈털터리로선 한국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제 집 갖고 번듯하게 사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일찍 내린 사람들이 발 빠르게 개척한 농업이민, 노동이민의 길에 뒤늦게 합류한 것이다. 그곳에선 열심히만 일하면 먹고살기가 한국보다 수월하다고 했다.
파라과이. 발음도 잘 안 되는 그곳의 물가가 얼마나 싼지를 열나게 얘기하던 희영 엄마의 마지막 말은, 지금 다니는 교회가 파라과이 현지의 한인교회와도 연결되어 있어 든든한 백이 되어줄 거라는 거였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가르쳐준 것도 꿈이며, 다른 곳에서 이루어 보라고 가르쳐 준 것도 꿈이었을까.
아빠가 먼저 출국했다. 한 달 후 희영의 엄마가 파라과이로 떠나던 날은 우중충하게 비가 내렸다. 희영은 출국장의 불투명 유리벽 틈새에 이마를 대고 엄마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다. 타국으로 떠나는, 흰머리가 드문드문 섞인 중년여자의 부스스한 파마머리가 본 적 없는 사탕수수밭 고랑처럼 광활하고 메말라 보였다.
공항이라면 손바닥처럼 훤하게 알고 있는 희영이 그날은 공항청사 안에서 길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