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희영, 공항에 가다
인천공항청사에 들어오며 희영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영종대교를 건너며 여러 방향에서 날아오는 갈매기들을 보았다. 무의도, 영종도, 용유도. 들어본 적 있는 근처 섬들 이름이 떠올랐다. 갈매기들에게 섬들은 공항이나 마찬가지겠지. 비행기를 타고 새처럼 떠나는 사람과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 세상은 크고 작은 공항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우울할 때 희영은 공항을 생각했다.
1년에 적어도 평균 네 번. 참을 수 없이 우울해지는 날들이 닥쳐온다. 그런 일주일을 보내고 나면 일요일 아침 일찍, 홀린 듯 공항으로 출발하곤 했다. 평소엔 입지 않는 아주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병아리처럼 가벼운 텅 빈 개나리꽃 색 트렁크를 끌고 말이다.
곧 출국하려는 사람처럼 티켓라인에 줄 서 있다가 뭔가 깜빡 잊었다는 듯 과장된 제스처를 지어 보이며(그래봤자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 없건만) 급히 돌아선다. 선글라스를 낀 채 스타벅스에 앉아 론리플래닛 아프리카 편을 뒤적인다. 그런 자신을 윈도우로 곁눈질하며 ‘스타일이 좋아지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속삭인다.
“응, 이제 곧 출국해. 염려 마 엄마. 아이 참, 그것도 있었지?”
휴대폰 통화를 하며 출국장 A카운터부터 K카운터까지 트렁크를 끌고 또각또각 걷는다. 커플, 가족,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과 배웅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헤치며, 실은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꺼진 휴대폰을 들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그러다 다리가 아파지면 희영은 창 옆 라운지에서 비행기들을 스케치한다. 아시아나, 대한항공, 일본항공, 캐세이퍼시픽, 콘티넨탈항공, 델타항공, 노스웨스트, 아랍에미리트항공, 에어프랑스, 타이항공, 남아공항공, 싱가포르항공, 루프트한자, 중국국제항공, 핀에어, 심지어 터키항공까지, 희영은 이제 각국 비행기 외장의 심벌 디자인을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었다.
떠남에 대한 꿈들이 공기처럼 가득 차 있는 곳에서 하루 종일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을 바라보고, 아무런 하는 일 없이 공항을 어슬렁거리다 집으로 돌아가면 이상하게 회사생활이 다시 견딜 만해졌다.
“공항이요!”
지난달엔 밤 12시, 빌어먹을 회식이 3차로 이어지는 중간에 충동적으로 택시를 잡아탔다가 양화대교를 막 건넌 후 이내 유턴했다. 인천공항까지 택시비가 얼만데! 게다가 지금 공항에서 뭘 하고 논단 말인가.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아줌마 기사가 선선히 유턴 지점을 찾는 사이, 희영은 생각했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이들의 비애, 떠날 수 없다는 것이 모종의 안정감을 주기도 하는 가볍고 모순적인 도시인의 비애에 대해… 훗, 웃으며 희영이 고개를 차창으로 돌렸다. 캄캄한 차창에 아는 사람의 얼굴이 얼비쳤다. 캄캄한 유리에 떠 있는 희영의 얼굴이 희영을 향해 묻는 것 같았다. 넌 누구니? 어디로 가는 거야?
택시가 길모퉁이를 돌아 길 위를 직선으로 굴러 희영의 집으로 향할 때 희영은 오늘 출제한 문제지의 문항 같은 인생을 떠올렸다.
다음 중 뜻이 다른 하나는? ① 필부필부 ② 갑남을녀 ③ 장삼이사 ④ 백가쟁명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말 중에 희영이 특히 ‘장삼이사’를 좋아하는 건 희영의 아버지가 이 씨, 엄마가 장 씨라는 그렇고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필부필부, 갑남을녀, 이런 말에 비하면 장삼이사, 라는 발음은 얼마나 고혹적인가. 아닌가?
한숨을 폭 내쉬는 희영의 시선에 택시 기사 운전석 옆으로 하트 모양의 희망저금통이 들어왔다. 그 옆의 껌통에서 희영이 껌을 하나 집어 씹기 시작했다. 택시기사가 미러를 통해 흘긋 희영을 보았다. 희영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찡그려졌다. 스피아민트, 오오 롯데 껌! 껌을 씹을 수 있게 된 일고여덟 살 무렵부터 20년간 한결같이 껌은 ‘스피아민트 오 롯데 껌’이었다. 뭐 이것도 아주 나쁘진 않다. 젠장, 세계는 이토록 습관적이고 안정적이지 않은가.
희영이 동전지갑을 뒤집어 털자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와 백 원짜리 동전 두 개가 손바닥에 떨어졌다.
오백 원짜리와 백 원짜리를 번갈아 노려보다 오백 원짜리를 집어 저금통에 넣었다.
투명한 하트, 속으로 오백 원이 철렁 떨어졌다. 심장병 아이들을 돕는다고 하트, 에 쓰여 있지 않은가.
백 원짜리 동전 두 개도 연달아 집어넣었다. 오백 원짜리 하나를 마저 집어넣고 장지갑을 열어 천 원짜리를 꺼내 팔 등분으로 꼭꼭 눌러 접은 후 우격다짐 하듯 하트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희영은 훌쩍이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 곧잘 우는 희영이지만, 그날은 그다지 취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괜히 눈물이 나왔다. 훌쩍거리다 보니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훈장 없이 늙고 마른 지휘관 같은 남자가 차창으로 지나가고, 야전병원에서 황급히 뛰어나온 피 묻은 중년의 간호사 같은 여자가 그 뒤로 얼비치고, 그 남녀의 딸인 듯한 희영이 어디론가 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희영의 훌쩍이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 도시에선 가끔씩 눈물을 비워줘야 한다(적당한 계기를 만나기만 한다면 말이지). 아줌마 택시 기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봐요, 아가씨.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훌쩍이는 희영의 불그스레한 얼굴은 금세 눈물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택시 기사가 운전석에 붙어 있는 크리넥스 통에서 톡, 티슈를 뽑아 어깨 뒤로 건넸다.
"괜찮아요, 제가요, 기쁠 희자에 꽃부리 영자거든요, 그러니깐 괜찮아요, 이 아가씬 괜찮아요."
희영이 팽, 소리 나게 코를 풀었다.
"2010년엔 월드컵이 있을 텐데요 뭘, 엄마도 괜찮을 거예요."
"…"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월드컵이 열리니까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그죠?"
뜬금없는 소리다. 희영 스스로 생각해도 머쓱한 말이었지만 뜻밖에 기사의 음성은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그래요, 다 괜찮을 거예요."
파마머리에 흰 머리칼이 드문드문 섞인 택시기사가 대답했다.
희영이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기사의 등을 바라보았다.
날렵하게 다림질 된 기사 유니폼 견장에 흰 새가 붙어 있었다.
오래 입어 까슬하게 닳은 견장의 실밥이 부스스하게 일어난 깃털 같았다.
“꿈꾸는 자신을 믿어요. 그게 시작이에요.”
흰 새가 조용히 복화술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