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이름은 지구라는 여신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하지만, 사실 내 이름 지오가 그렇게 진지한 분위기에서 지어진 건 아니다.
내가 태어난 지 두 달이 지난 그해 여름, 할머니와 엄마는 내 이름을 짓기 위해 파티를 열었다. 이웃들도 왔다. 마을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내가 태어난 거니까 지금처럼 친한 이웃이 많지 않았다. 어쩌다 태어난 지 두 달이나 지나서야 이름을 갖게 되었냐고? 우리 집 여자들의 좀 특이한 취향 때문이다.
이 얘기부터 해두자. 국적에 대한 우리 가족의 아이덴티티는 무척 모호하다. 할머니와 엄마는 프랑스인이다. 할머니의 고향은 보르도, 엄마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조안 아줌마는 체로키 인디언의 혈통을 가진 캐나다인이다. 나도 캐나다인. 그렇지만 우린 국적 같은 거랑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
프랑스인이지만 할머니와 엄마는 모두 동양종교에 관심이 많은데,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전생설에 완전히 홀려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홀리는 걸 좋아한다. 뭔가에 홀리면 그것에 홀딱 빠진다. 우리 집 전통에 대해 누군가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거다. 전통 같은 게 있을 리가요! 뭐, 굳이 말하자면, 우린 삼 대에 걸쳐 전통적으로 홀리는 걸 즐겨요!). 그때 할머니는 갓난쟁이 아기가 “어!” 라든가, “으!” 라든가, 제 입으로 뭔가 지적인 의미에서의 의사표현을 하기 전까진 이름을 지어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엄마는 할머니의 주장에 냉큼 홀렸다.
할머니의 주장인즉슨, 새로운 세상에 이제 막 도착한 갓난아기들은 자기의 전생을 아주 많이 기억한다. 아기들이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지 않는 건 전생의 기억을 자기 나름대로 정리하는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그러니까, 갓 태어난 아기들은 사람의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쪽에 가깝다. 이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 사이에 의식적으로 갭을 두고 관찰하는 기간이랄까). 갓난아기들이 멀뚱히 누워 있다가 혼자 웃거나 찡그리거나 가끔 ‘썩소’를 보이며 어른 같은 표정을 짓기도 하는 건, 아직 기억하고 있는 전생 때문일 확률이 높다.
그렇게 곰곰 자신의 전생과 지금 세상에 대해 대차대조를 해보다가, 새로 태어난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봐야겠다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순간, 부모가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으!” “어!” “꺄!” 등의 소리를 지른다(이건 배가 고프다든가, 똥을 쌌다든가 할 때처럼 생리적인 욕구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의지를 가진 일성이다. 과거를 잊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 보겠노라는 의지를 담았다는 뜻이다. 그게 의지의 일성인지 똥 쌌다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할머니 왈, 아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가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 때라는 게 할머니의 지론이었다. 아기 스스로 이름을 갖고 싶어하는 그 때.
태어난 지 두 달이 지나 내가 기묘한 트림 소리를 섞어 일성을 내지르자 할머니, 엄마, 조안 아줌마가 서둘러 파티를 준비하고 동화적인 말 그림이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거실 식탁에서 알파벳 나무 블록 상자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그 상자는 내가 태어난 날부터 할머니의 조언 아래 엄마와 조안 아줌마가 잘 마른 히코리 나무 고목을 깎아 만들기 시작한 것인데, 나무토막 하나에 한 글자씩의 알파벳이 독특한 문양과 색깔로 디자인되어 있다. 밤낮없이 홀려서 작업한 끝에 일주일 만에 완성된 상자였다.
어른 자격으로(사실 우리 집엔 어른이란 게 따로 없지만) 할머니가 내 앞에 알파벳 나무 블록 상자를 신단처럼 내려놓았고 엄마가 나를 안아 일으켰다.
아직 목을 잘 가누지도 못하는 나는 알파벳 상자를 뚫어져라 노려보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꼭 쥔 하얀 주먹을 흔들며 H를 지나고 K를 지나고 M을 무너뜨리더니 G 앞에 주먹을 쿵 놓았다. G? 글로리아? 가브리엘라? 젬마? 그레이스? 그라시아? 거투르트? 조지나? 고샤? 그레미옹? 세 여자가 머리를 절레절레 끄덕끄덕 서로 아리송한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 나는 머뭇거림 없이 다시 주먹을 흔들며 O를 찍었다.
할머니가 집전관의 자격으로 G 옆에 나란히 O를 놓았다. G―O? 설마… GO? ‘고’라구? 아무래도 글로리아를 원한 건 아닐까. 고센? 고다르? 그녀들은 내가 작은 주먹을 휘둘러 다른 글자를 더 찍어주기를 기다렸지만, 더 이상의 선택엔 흥미가 없는 나는 한껏 입을 벌려 하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 주먹을 꼭 쥔 채 얼굴이 붉어지며 황금빛 똥을 무럭무럭 누었다고 한다(이 얘기를 할 때면 엄마와 할머니는 완전 신이 나 연극 대사를 읊듯이 줄줄 꿴다. 나는 그것이 사실의 전모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거짓말이라는 게 아니라, 일부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비상회의가 열렸고, ‘고’를 이름으로 가진 여자애의 운명을 여러모로 점치다, 세 여자는 새벽녘에 이르러 내 갸륵한 뜻을 이해했다. 그래, 우리 강아지가 원한 건, GEO인거야! 할머니가 외쳤다. 엄마의 눈이 반짝였다. (아무렴, GO보다 낫지!) 5월 1일에 태어난 아이야. 이 아이가 GEO를 원하는 건 순리에 맞아!(할머니가 덧붙인 이 이유는 할머니 식의 정치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엄마도 조안도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내 이름은 지오가 되었고, 전생의 탯줄에서 벗어났다.
나는 내 이름이 좋다. 지구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엄마여신이니까.
내 이름을 부르며 달이 둥실 떠오를 때 나는 볼을 붉히며 지구 어디선가 달을 보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