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 이름은 지오
내 이름은 지오. 열다섯 살이다.
열다섯 살이 되면! 성년이 되는 선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을 허락할게. 열두 살 때부터 혼자 하는 여행을 꿈꿔온 내게 엄마와 할머니가 해온 말이다. 치, 난 이미 다 컸는데 성년은 또 뭐람! 그때마다 티티를 향해 쫑알거리는 것으로 세속의 기준에 대한 불만을 표하곤 했다.
아무튼 나는 열다섯 생일날 한국행을 선언했다.
하지만 한국이란 그전까진 가볍고 부드러운 구름이 지나며 가르쳐준 많은 이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에 대해 얼마간 공부한 것과 한국인 친구 희영에게서 들은 바를 종합해볼 때, 한국의 일반적인 기준에서 우리 집은 좀 튄다.
우리 식구는 네 명이다. 할머니, 엄마, 엄마의 애인인 조안 아줌마, 그리고 나.
네 명이 사는 집이지만 우리 집은 거의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우리는 캐나다 밴쿠버 섬의 서해안 오지 마을에 산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뱀필드인데 대도시 밴쿠버에서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다. 뱀필드에서도 다시 한 시간 반이 걸리는 우리 마을은 엄청 오지인 셈이다. 하지만 마을엔 항상 새로운 여행자들이 드나든다. 전 세계에서 온 좀 특이한 여행자들이다(주의해 주길.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자들이다). 우리 집은 말하자면 갖가지 사연을 가진 여행자들이 들러서 수다 떨기에 알맞은 카페 같은 곳이다. 할머니가 워낙 사람들을 좋아하는데다, 마을 전체를 예술품으로 생각하는 엄마와 조안 아줌마의 ‘평생 예술 프로젝트’를 보건대 사람들이 꼬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우리 집의 흥성거리는 활기가 좋다. 새로운 여행자들이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물고 철새처럼 우리 집을 들락거린다.
나는 우리 집의 세 여신과 우리 마을 사람들을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세상엔 그들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란 철새 가족들이 물어다주는 맛있는 이야기들을 냠냠 받아먹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때가 오는 거여서 여행자가 되는 법이다. 겨드랑이 밑이 간질거리는 아침이 많아졌다는 게 그 증거다(이게 관념적인 표현이 아님을 알아주길 바란다. 잠에서 깨어 제일 먼저 겨드랑이를 만져보면 보드랍고 뾰족한 아주 작은 날개가 만져지는 날도 있다. 비록 해가 뜨고 나면 사라져버리지만).
첫 여행. 그렇다. 그것은 단독 비행! 내가 사랑했던 헤세(그를 사랑한 건 열두 살 때다. 헤세의 전작을 모두 읽어버린 열세 살이 되자 '사랑한다'에서 '사랑했다'로 옮겨왔지만, 헤세는 정말 멋진 작가다. '사랑한다'가 계속 '사랑한다'로 남는 경우가 있고, '사랑한다'가 '사랑했다'로 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내 지적 성장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아무튼)가 말하듯 아프락사스의 시절이 온 거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헤, 멋지다!
드디어 약속한 5월 1일이 되었다.
이른 아침, 나는 창을 활짝 열고 레인보우 마운틴을 향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지나온 어떤 날도 이 날과 같을 수 없는,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레인보우를 향해 속삭였다. 바람이 불었다. “어디에 있니?” 바람을 가슴 깊숙이 들이마시며 말했다. 이삼 분 동안에 벌써 아침 이슬 묻은 신선한 바람이 나를 섬 밖으로 실어가는 것 같다. 굴뚝새 티티가 왔다. 하늘색 부리를 가진 그 애는 늘 내 왼쪽 어깨에 앉아 귓불을 부드럽게 쪼며 아침인사를 한다. 그 애가 아침 기상을 언제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식구 중 가장 부지런하고, 우리 식구에 대해 아는 것도 많다. 응응, 오늘 있을 내 생일파티를 미리 축하하는 거야? 나는 방문 옆쪽의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새봄을 맞은 내 짝꿍.
“한국?”
첫 여행지에 대해 내가 "한국!" 이라고 대답하자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사우스 코리아?”
곧이어 할머니가 다시 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엄마처럼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뜨악한 반응― 할머니와 엄마가 마주보며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다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거의 동시에, 좀 과장되다 싶게 내 이름을 불렀다.
“지오!!”
“응?”
이런 얼떨떨한 반응이 뜻밖이어서 오히려 내가 어색했다. 할머니와 엄마가 똑같이 무언가 잘못 씹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나는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의 등을 손가락 끝으로 긁으며 잠시 생각에 몰두했다. 다행히 조안 아줌마가 엄마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갑자기 넘어졌다 일어난 사람 꼴로 서 있는 나를 향해 윙크해 주었다.
나는 재빨리 테이블 위로 상체를 꺾어 할머니와 엄마에게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우리 집 여신들, 내 이름을 부르느라 동그랗게 된 두 여자의 입술에서 쪽, 쪽, 티티가 기분 좋을 때 부리 안쪽에서 내는 소리가 났다. 내 입술에 두 여자의 달콤한 냄새가 묻어왔다. 붉은 장미와 로즈힙 오일, 꿀로 만든 ‘마리’표 연지는 겨울을 지나 숙성하면서 향기가 한층 달콤해졌다. 할머니의 눈매가 금방 반달이 되었다 (나는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고, 엄마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보통은 모두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마리는 할머니 이름, 하린은 엄마 이름이다. 할머니의 이름엔 복잡한 성이 붙어있지만 성을 부를 일은 거의 없다). 조안 아줌마가 엄마와 할머니에게 캐모마일 차를 좀 더 따라주었다. 나는 금세 서운했던 기분이 느긋해지는 걸 느꼈다. 이 여신들이 누군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여자들 아닌가. 할머니의 반달눈이 아래로 조금 더 귀엽게 휘었다. 조금 있으면 유쾌한 ‘마리’표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어른들이 이제 겨우 성년이 된 아이 앞에서 그렇게 묘한 입술 모양을 만들면 말이야. 여기, 내 마음이 아주 놀란 다람쥐가 되는 걸 알아야 해. 조안 아줌마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여전히 새침한 얼굴로 가볍게 한숨을 쉬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창문 밖 자작나무 가지가 재채기를 하는 것처럼 흔들렸다. 의자 등받이를 젖히며 할머니가 드디어 후훗,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한국이라니! 집안 내력이야. 스토리를 만드는 덴 한가락들 한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