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람 농장의 아이
공항 입국장으로 나오는 소녀가 이어폰을 빼 크로스백 앞지퍼에 넣고는 하얀색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랑해, 하린.” 소녀가 명랑하게 불어로 말했다.
“이 날이 오길 기다렸어. 그래, 한국이야. 아무 데도 이상 없어. 몸이 살짝 뜨는 것 같은 기분이야. 지금 전광판 시계 밑으로 가야 돼. 응. 100퍼센트… 그럼, 사랑하구 말구. 정말 사랑한다고 조안과 마리에게도 전해 줘.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내가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아? 나는 자유! 바람 농장의 아이라는 거야… 알고 있어. 이곳에 있다면 그 애도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일 거야. 힘들 땐 레인보우 마운틴을 생각할게. 응…”
소녀는 커다랗고 길쭉한 아마빛 배낭을 등에 메고 있었다. 배낭이라기보다는 삼베자루에 가까워 보이는 그것은 맨 꼭대기, 그러니까 물건을 집어넣고 꺼내는 입구가 분홍빛 큰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소녀의 뒷모습을 흘긋거리는 사람들 몇이 눈을 치뜨며 웃었다. 나는 선물이에요, 랄랄라, 소녀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걸었다.
165센티미터 정도의 가느다란 몸체에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소녀는 걸음걸이가 특이했다. 춤을 추는 것 같은 걸음으로 소녀의 얇실한 종아리가 도솔미솔, 바닥에 살짝 떠있는 건반을 밟듯 지나갔다. 발걸음을 껑충 뛸 땐 나무줄기를 잡고 가볍게 몸을 날리는 듯했다. 커다란 하트 모양의 갈색 렌즈 두 개를 가느다란 은빛 코걸이에 이어 붙인 오버 사이즈 선글라스를 썼다. 얼굴의 절반이 두 개의 커다란 갈색 하트에 가려진 소녀는 세상을 하트를 통해 바라보는 임무를 띤 요정이라는 듯 자신감이 넘쳤다.
올리브 그린색의 헐렁한 면 원피스. 맨발에 신은 초록색 모카신. 목에는 조그만 청보라빛 돌멩이와 손가락 길이만한 상앗빛 막대기가 달린 두 겹의 가죽 목걸이. 그리고 오른쪽 손목의 가죽 팔찌와 왼쪽 발목에 감긴 비슷한 질감의 가죽에는 인디언 장식품으로 보이는 뼈 조각 구슬이 몇 개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슬들이 소녀의 발목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발목을 중심으로 도는 뼈 조각 별들 같았다.
옷차림만큼 눈에 띄는 건 뭐라 표현하기 힘든, 붉은 빛이 도는 검은 색의 짧은 커트머리였다. 목덜미를 가리지 않는 바람머리가 사방으로 뻗쳐 원피스를 입지 않았다면 사내아이라 착각할만한 헤어스타일이었다. 각도에 따라 빨강, 다홍, 주홍, 주황, 붉은 황금빛 등으로 보이는 다양한 붉은 색이 검은색과 믹스된 머리칼. 그것은 최소한 네 가지 이상의 색을 마구 뒤섞어야 나올 법한 머리색이었다.
출입구에서 따뜻한 바람이 뭉클 밀려들었다.
입국장을 걸어 나온 소녀가 살그머니 입을 벌렸다. 입을 벌린 채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지구의 공기를 처음으로 접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천천히. 소녀의 출현에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일렁였다. 딱히 소녀의 차림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튄다, 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엔 튀면서도 오랜 동안 몸에 밴 숨결처럼 자연스러운 게 있었다. 훅! 은빛 솜털날개를 단 꽃씨가 드넓은 수평 속에 스미듯이, 목적을 미리 정하지 않은, 속도감을 버린 꽃씨의 유영처럼.
3시 33분.
공항 홀 전자시계의 초록색 발광다이오드가 허파꽈리처럼 총총히 깜빡거렸다. 발칙한 것들을 보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라고 말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