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들 플라워』 연재를 시작하며
커피 한잔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할 때, 제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무래도 롯의 아내입니다.
롯의 아내는 한심한 역할을 맡았죠. 전하는 대로라면 집에 두고 온 재산이 아까워 천사의 당부를 잊고 소돔 쪽을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으니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지자를 꼬이거나 타락시키는 역할은 대부분 여자의 몫으로 설정되지요. 아담을 꼬인 이브나 뒤돌아보지 말라는 당부를 어겨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아버지의 역사에서 여자들이 걸핏하면 이등존재가 되어온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권력은 그렇게 역사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어머니’의 시대가 온다 해도 우린 절대로 남자들을 이등존재로 만들지 말기로 해요. 우리 모두가 자유롭지 않다면 어느 한쪽도 자유로울 수 없는 거니까요. 어느 한쪽이 고통 받는 일이 있다면 그건 진정한 자유가 아닌 거지요.
녹차 한잔
제 생각엔 말이죠. 소돔을 벗어나며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게 된 것은 불타는 도시 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들과 소녀 소년들의 목소리를 들은 게 아닐까 싶어요. 나 살겠다고 도망치다가 아이들의 비명소리에 망연자실 그만 뒤돌아보며 울어버린 건 아닐까요. 살릴 수 없다면 함께 울어주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 문득 걸음을 멈추어 버린 여자. 울고, 울고, 울어서 눈물처럼 짠 소금기둥으로 변해버린 롯의 아내.
캐모마일 차 한잔
금지된 것을 금지하는 것. 돌아보지 말랬는데 돌아보는 것. 뒤돌아봄으로써 죽는 것. 죽음을 통해 증언이 되고 창조가 되는 것. 소금기둥이 된 그녀를 통해 저는 상상합니다. 이런 것이 또한 문학의 숙명 아닐까, 하고.
국화차 한잔
세상 도처에 소금기둥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아파서 나도 아플 수밖에 없는 유마의 마음 같은 것이 도처에 말간 눈물로 맺혀있습니다. 제 생각에 문학은 함께 아픈 병입니다. 함께 아파야 나을 수 있는 힘도 비축하지요. ‘함께 아픈’ 말간 눈물 속에서 깨끗한 웃음이 무럭무럭 자라난다고 저는 믿는 쪽입니다. 시스템의 타락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려는 개인의 힘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지요. 도시의 타락은 시스템에서 오는 경우가 많고, 힘없는 개인들은 시스템에 적응하면서 타락해가기 쉽지만, 스스로를 지키려는 개인의 힘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도 아주 특별한 존재들이니까요.
맥주 한잔 소주 한잔
이 소설의 주요 무대는 작년, 2008년 촛불의 밤들입니다.
같은 불이되, 소돔과 고모라에 쏟아진 화염비가 도시를 소탕한 폐허의 불이었다면, 잿더미 땅에 자그마한 불꽃을 피워 서로의 심장을 밝히고 먹을 것을 나누고 따뜻한 차 한잔의 온기를 유지하던 촛불은 생명의 감도를 아는 불꽃이었습니다. 수직의 불벼락이 아닌 수평의 번짐을 가진 불의 꽃. 한 촛불이 다른 촛불에게 가만히 기대어 자신의 몸의 온기를 나누어 주면서 번져간 불꽃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하나의 초에 만개의 불을 나눠 붙여도 최초의 촛불은 흐려지지 않는다,는 지혜로운 이들의말을 떠올리면서.
흐려지지 않는 최초의 촛불이 만개, 십만개, 백만개로 번져간 2008년의 여름.
제게 촛불은 깨어있는 몸의 경험, 놀라운 감각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생생한 미학성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시원한 물 한잔
2008년의 촛불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소설은 촛불만의 얘기는 아닙니다.
저는 이 소설이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 미래의 얘기이길 바랍니다.
이 땅에 놀러온 ‘자연의 아이’ 지오. 이 땅의 사랑스러운 젊은이들, 소녀들, 소년들, 희영, 연우, 수아, 지민, 태연, 민기, 술래…. 미래 세대 아이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할머니 숙자씨도 실은 미래의 소녀입니다. 숙자씨의 애인인 홍씨 할아버지도 미래의 소년입니다. 다른 땅에 살고 있는 마리, 하린은 우리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광장 까페에서
소설을 연재하는 동안, 이곳을 ‘광장 까페’라고 부를 생각입니다.
이곳을 찾는 여러분 모두가 까페의 주인입니다. 까페 입구에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고 손 글씨 써서 붙여놓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자리 어디든 편하게 앉으셔서 함께 하는 이 시간을 즐겨주시길.
커피, 녹차, 캐모마일차, 국화차, 맥주 한잔, 소주 한잔, 시원한 물. 작업을 하는 내내 하루 종일 제가 번갈아가며 마시는 것들입니다. 여러분과도 나누겠습니다. 가끔은 다른 메뉴를 추가해주셔도 좋습니다.
이 ‘광장 까페’에서 문학을 통해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일은 아마도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일일 겁니다.
서로에게 물으면서, 대화하면서, 낄낄거리면서, 때로 침묵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궁금합니다. 꿈이여 왕성해져라! 초인종이 울립니다.
어서 오세요. 고맙습니다.
김선우는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세 권의 시집을 냈고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칼럼집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어른을 위한 동화 『바리공주』 등이 있다.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 2007년 제9회 천상병시상을 수상했으며 ,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