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1900~1951)의 단편소설 「김연실전」(1939)은 동인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여성 작가 김명순을 모델로 삼아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김명순(1896~1951)은 1920년대에 시와 소설을 아울러 썼던 ‘제1세대’ 여성 문인의 대표적 인물이다. 1919년 도쿄 유학 시절 『창조』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에는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하고 시집 『생명의 과실』을 출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이후 다시 도쿄로 건너가 생활고에 시달리는 한편 복잡한 연애 사건에 휘말리면서 정신병원에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전해진다.
“연실이의 고향은 평양이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김연실전」은 옛 감영의 이속(吏屬)과 퇴기 사이에서 태어난 연실이 신식 학교인 진명여학교를 거쳐 도쿄로 유학을 떠나서는 방종에 가까운 ‘자유 연애’를 실천하는 얼치기 문학 소녀로 변모하는 과정을 다룬다.
생모를 여의고 의붓어미 슬하에서 성장한 연실은 불우한 환경 탓에 한껏 삐뚤어진 인물로 그려진다. “어린 마음에도 온갖 사물에 대한 반항심만 성장”한 소녀 연실은 “학우들이 대개가 기생의 자식”인 진명여학교에 다닌 2년 동안 더더욱 반항적이며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나아간다. “규칙 없이 순서 없이 너무도 급급히 수입한 자유사상 아래서 교육받으며 진명학교 학우들 틈에서 자라는 이 년간에 연실이의 마음에 가장 커다랗게 돋아난 싹은 반항심이었다.”
반항적인데다 무지하고 무모하기까지 한 연실은 지옥 같은 집에서 벗어날 방도로서 일본 유학 결심을 굳히고 젊은 남자 선생한테서 일본어 개인 교습을 받는다. 과년한 처녀와 젊은 사내가 한 방에 마주 앉아 있자니 결국 사달이 나고 만다. 선생이 연실을 강제로 범한 것.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연실은 “그것은 연실이가 막연히 아는바 사내와 여인이 하는 노릇으로, 선생은 사내요 자기는 여인이니 당하게 되면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쯤으로 여겼다.” 스스로는 아무런 성적 쾌감도 느끼지 못하면서도 연실이 그 뒤 선생의 요구에 번번이 응한 것은 그의 왜곡된 성 관념과 도덕 의식의 부재를 말해 주는 셈이다. 비록 자신을 박대하였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의붓어미 소유인 거액을 훔쳐서 도쿄 유학길에 오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선각자외다. (…) 일천만 여자가 모두 잠자고 현재의 노예 생활에 만족해 있을 때에 (…) 포학한 남성의 손에서 일천만 여성을 구해낼 사람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도쿄의 학교에 입학한 연실이 ‘조선 여자유학생 친목회’에 처음 출석해 들은 회장의 연설이었다. 이 말을 들을 때의 연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여자가 어떻게 구속되고 어떤 압박을 받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전에 진명학교 창립 선생도 그런 말을 하였고 지금도 또 여기서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렇듯 스스로는 아무런 생각도 판단도 하지 못하면서 남들이 하는 말에 휘둘리고 조종당하는 연실의 모습은 가히 백지 내지는 백치라 할 법하다. 그런 그가 ‘선각자가 되리라. 우리 조선 여성을 노예의 처지에서 건지어 내리라’ 다짐하는 장면은 코믹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슬프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이런 연실이 문학에 입문한 것 역시 우연적이며 즉흥적이었다. 기숙사 방장인 상급생이 그의 부족한 일본어 실력 향상을 위해 권한 것이 소설 읽기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필두로 한 소설들은 그로 하여금 문학과 예술이라는 새로운 영토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소설을 소개했던 방장이 “긴상, 조선에 문학이 있어요?”라는 질문에 이어 “긴상, 조선의 장래 여류 문학가가 되세요”라 권한 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조선 여성을 노예 상태에서 구원할 선각자요 조선의 신문학을 주도할 여류 문학가라는 두 가지 목표가 생겼다.
주로 “연애를 재미나고 자릿자릿하게 적은” 소설을 읽은 탓에 연실에게는 문학이 사실상 연애와 동의어로 다가온다.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간의 예술은 연애니라.’ 스스로 만들어 낸 이런 금언(金言)을 실행에 옮기느라 그는 적극적으로 연애에 나선다. 그는 제멋대로 연애 상대로 찍은 남학생을 무턱대고 찾아가 산보를 하다가는 막차를 놓쳤다는 핑계로 그의 하숙방에서 하루를 묵으며 결국 동침을 하기에 이른다(그 결과 남자에게 치마를 덮어씌웠다는 뜻으로 ‘감투장사’라는 별명이 따라붙는다). 사실인즉 책에서 본 연애를 현실에서 흉내낸 것에 지나지 않는데다 여전히 성적 쾌감을 느끼지 못할뿐더러 사랑의 감정적 차원에 대해서도 낯설기만 한 연실로서는 그런 연애란 말하자면 껍데기뿐인 연애에 지나지 않았다.
일단 자유 연애의 길에 나선 연실은 남녀공학인 탓에 연애의 여건이 한층 좋은 음악학교로 옮겨서는 “여러 남학생들과 단 하룻밤씩의 연애를” 즐긴다. 이른바 원나잇스탠드다. 급기야 유학생 기관지에 ‘여자 유학생에게 경고하노라’는 제목으로 연실의 문란한 행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글이 실리기에 이르는데, 이에 대한 연실의 대처가 또한 문제적이다. 동무요 선배인 최명애의 충고를 좇은 그의 해결책인즉, 자신을 고발하는 글을 쓴 당사자인 맹호덕을 찾아가 유혹해 아예 애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쯤 되면 명색이 학생이다뿐이지 기생 뺨치는 면모라 해야 하리라.
김동인의 소설은 이쯤에서 돌연 마무리되는데, 마지막으로 연실이 진명학교 시절 동무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갈 길을 몰라서 헤매는 일천만의 조선 여성에게 광명을 보여주기로 단단히 결심하였습니다.” 글쎄, 소설 속에 그려진 대로라면 연실이 동포 여성들에게 열어 보여줄 광명이 도대체 어떤 성질의 것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이현(1972~)의 단편 「이십세기 모단걸―신 김연실전」(2002)은 제목에서 보듯 동인의 「김연실전」을 ‘다시 쓴’ 작품이다. 이 경우에 ‘다시 쓰기’란 원작의 틀을 그대로 가져오되 관점과 주제에서는 정반대되는 방향을 택함으로써 원작을 비꼬고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게 된다. 그러니까 선행 작품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은 오마주와는 상반되는 성격의 패러디가 「이십세기 모단걸―신 김연실전」이다.
“그녀에 관한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표방한 이 소설 역시 “연실의 고향은 평양이었다”는 문장으로 문을 연다. 기생 출신 어미에게서 난 서자라는 사실 또한 동인의 소설 속 정황과 다르지 않다(기생조합 출신이었던 생모는 정실 자리를 약속한 연실 아비한테 속아서 첩실이 되었고, 결국 연실 나이 여섯 살 무렵에 편지 한 장을 남기고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어릴적부터 “유난히 총기 있고 말도 빠른” 아이였으며 그 영특함을 높이 산 아비의 배려로 신식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는 데에서부터 두 ‘연실’의 행로는 크게 갈린다. 의붓어미는 그 학교가 기생학교라는 항간의 소문을 전하지만, “황실 엄비(嚴妃)의 하명을 받아 애국 청년 지사가 설립했던 여학교가 기생 양성소일 까닭은 없”다는 게 연실의 판단이다.
생모를 닮아 유난히 명민했던 연실은 2년 뒤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받고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한다. “여러분, 우리는 혜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조선 천지에 무지몽매한 우리 동포들을 (…) 우리가 한마음으로 노력하여 그들을 계몽하여야 합니다.” 선각자요 다수 민중한테 빚을 진 선택받은 엘리트라는 자각이 순전히 연실 자신한테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연실이 일본으로 유학 가게 된 것 역시, 동인의 소설에서와 달리, 부모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정이현의 소설에서도 도쿄에서 학교에 입학한 연실은 일본어 실력 향상을 위해 기숙사 동료한테서 책을 권해 받는데,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 그것이었다. 동인의 소설에서 낭만적 사랑의 메신저와도 같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권해 받았던 연실이 여기서는 여성 해방 지침서라 할 『인형의 집』을 접하게 된다는 설정은 시사적이다. 이 책을 필두로 도서관에 꽂힌 세계 명작들을 섭렵하는 동안 연실이 ‘문학가, 조선 최초의 여성 문학가가 되리라, 붓으로써 조선에 광명을 주리라!’ 다짐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동인의 소설에서와 같은 얼치기 문학 소녀의 감상과는 전혀 질이 다른 것이었다.
동인의 소설에서 연실의 인격적 파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 정도로 묘사된 맹호덕과의 관계 역시 여기서는 전혀 달리 그려진다. 연실과 맹호덕이 처음 만나기는 유학생 문학청년 모임에서였다. 연실의 습작 소설이 유학생 잡지에 실린 것을 계기로 모임에서 연실을 초청해 왔던 것. “한길을 가는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는 순수한 희망에 부풀어” 모임에 참석한 연실은 우선 모임 구성원들이 하나같이 남학생이라는 사실에 당황한다. 더 당혹스러웠던 것은 회합이 끝난 뒤 반 강제로 끌려 간 술집에서였다. 모임에서는 우국지사연하며 큰소리 치던 맹호덕이 ‘여염집 규수가 사내들 술시중 든다’며 핀잔을 놓다가는 ‘앙탈하지 말고 잔이나 채우라’는 식으로 좌충우돌하며 연실을 한껏 희롱하다가는 분개한 연실의 꾸중을 듣고는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
이보다 더욱 어이없고 괘씸한 일이 연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불쾌한 상태에서 헤어졌던 맹호덕이 며칠 뒤 꽃을 들고 기숙사로 찾아오더니 연실의 거부 의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명적 사랑’ 운운하며 매일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결국 기숙사 사감의 경고를 들은 연실이 맹호덕을 설득할 생각으로 산보에 나서는데, 호젓한 강둑에 이르자 야수처럼 덤벼드는 호덕… 힘에 부친 연실은 급기야 그의 사타구니를 걷어차고서야 위기에서 벗어난다.
동인의 소설에서 등장했던 여자 유학생에 대한 경고문이 여기서도 등장한다. ‘조선 여 유학생에게 고하노라―어느 방탕한 여학생에게 보내는 경고의 서’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이 글은 그러나 맹호덕과 연실의 이야기를 완전히 거꾸로 서술한 다음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음탕한 피라는 것이 과연 따로 있다는 유전과학적 의문을 품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며 애꿎은 어미까지 걸고 넘어지지 않겠는가. ‘장난 삼아 동무한테 한 말이 와전되었다’는 비겁한 변명을 하는 호덕의 얼굴에 침을 뱉어 준 뒤, 연실은 그때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해 오던 삼단 같은 머리채를 제 손으로 잘라낸다(모종의 독한 결심을 했다는 뜻이겠다). 정이현의 소설 역시 이 대목에서 문득 마무리되거니와, 여기서는 김연실이 아닌 실존 인물 김명순의 소설 「칠면조」(1921)의 한 대목이 인용된다.
“내 자신아, 얼마나 울었느냐. 얼마나 앓았느냐. 또 얼마나 힘써 싸웠느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느냐. 네 몸이 훌훌 다 벗고 나서는 날, 누가 너에게 더럽다는 말을 하랴.”
김동인과 정이현의 두 ‘김연실전’은 동일한 인물의 행적을 상반된 관점에서 서술한다. 동인의 소설 말미에는 “이 갸륵한 선구녀가 장차 어떤 인생 행로를 밟을지 후일담이 무론 있을 것”이라는 구절도 나오거니와, 두 소설은 모두 김연실의 길지 않은 생애의 전반기만을 다루고 있을 뿐 그 뒤의 이야기는 짐작에 맡기고 있다. 모델이 된 김명순에 관한 전기적 사실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만큼, 그런 상황으로 나아가기까지 김연실[김명순]의 전사(前史)를 캐보자는 것이 두 소설 모두의 의도라 하겠다. 동인은 연실이 처음부터 방종하고 문란한 소질을 지녔음을 역설하고, 정이현은 그가 남성들의 폭력과 왜곡에 대한 반발과 투쟁으로서 자신을 내어던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두 소설의 발표 시기가 60년 이상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동일한 사안일지라도 남성과 여성이 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두 소설로 하여금 이처럼 선명한 대립각을 세우게 만들었을 터이다. 세대 및 성별 차이가 초래한 다툼의 중재자로서 김병익의 흥미로운 책 『한국문단사: 1908-1970』 중 김명순을 비롯한 1세대 여성 문인들에 관한 서술을 들어 보자. “그들이 불행해야 했던 것은, 당시의 풍속과 사고가 그녀들의 이상에 미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악용한 데서 온 것이며, 이 이상과 현실 간의 거리에서 방황한 그녀들은 결국 그 시대의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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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이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등이 있다. 지금은 시와 소설 속 사랑의 명장면들을 찾아가는 '사랑의 풍경'을 신문에 연재하고 있으며, 한국문학 작품의 제목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정리해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