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타임캡슐 단편>으로 소개합니다. 카버의 글쓰기 스타일은 종종 어니스트 헤밍웨이, 안톤 체호프, 프란츠 카프카의 그것과 비견됩니다. 1980년대 단편소설의 부흥을 이끌기도 했던 카버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 이 두 단편이 살아남는다면 정말 행복할 겁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대성당」 다음으로 실릴 카버의 단편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입니다. - 편집자
그 맹인, 아내의 오랜 친구인 그가 하룻밤 묵기 위해 찾아오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죽었다. 때문에 그는 코네티컷에 사는, 죽은 아내의 친척을 방문했다. 그 친척집에서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속이 잡혔다. 그가 다섯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오면, 아내는 역에서 그를 만날 예정이었다. 십 년 전 여름, 시애틀에서 그를 위해 일한 뒤로 그녀는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와 맹인은 계속 연락하고 있었다. 그들은 녹음한 테이프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의 방문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맹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순전히 영화에서 온 것이다. 영화에서 보면 맹인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절대로 웃지 않았다. 때로 그들은 맹인 안내견을 따라가기도 했다. 내 집 안에 맹인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시애틀에서 보낸 그 여름에 그녀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녀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 여름이 끝나기 전에 그녀와 결혼하기로 돼 있던 남자는 사관양성학교에 있었다. 그 역시 한 푼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그도 그녀를 사랑했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녀는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걸 읽게 됐다. ‘도움 구함―맹인에게 책 읽어주는 일’과 전화번호. 그녀는 전화한 뒤에 찾아갔고, 그 자리에서 일을 구했다. 그녀는 여름 내내 이 맹인을 위해 일했다. 그녀는 사례연구, 보고서 같은 것들을 그에게 읽어줬다. 그녀는 카운티의 복지 부서에 있던 그의 작은 사무실의 운용을 도왔다. 그들은 좋은 친구가 됐다. 그러니까 아내와 그 맹인은. 나는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가? 그녀가 내게 말해줬다. 또다른 이야기도 들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던 마지막 날, 그 맹인은 그녀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승낙했다. 그녀는 내게 그가 손가락으로 얼굴의 모든 부분을, 코를 만졌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목까지도! 그녀는 그 일을 절대 잊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 일에 관한 시까지 쓰려고 했다. 그녀는 항상 시를 쓰려고 한다. 그녀는 일 년에 한두 편의 시를 쓰는데, 대개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 일어난 뒤에 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서로 사귀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내게 그 시를 보여줬다. 그녀는 시에 그의 손가락에 대해, 자신의 얼굴 위로 그 손가락이 어떻게 움직였는지에 대해 회상해놓았다. 시에는 그 맹인이 그녀의 입과 입술을 만졌을 때, 자신의 느낌이 어떠했으며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들이 흘러갔는지 써놓았다. 내가 변변찮은 시라고 생각했다는 것만은 기억난다. 물론 그걸 말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가 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뭘 읽으려고 할 때 내가 시집을 펼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만은 인정한다.
어쨌든 남자로서 처음으로 그녀를 사랑한 그 남자, 그러니까 사관후보생은 어린 시절부터 연인이었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내 말은 그 맹인이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던 그해 여름이 끝난 뒤, 그녀는 맹인과 헤어져 어린 시절의 연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 또 그 사람이 소위로 임관하면서 시애틀을 떠나게 됐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연락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그녀와 맹인 말이다. 한 일 년쯤 지났을 때 그녀가 처음으로 연락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앨라배마에 있던 공군기지에서 그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통화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통화했다. 그는 그녀에게 어떻게 살아가는지 테이프에 녹음해 보내달라고 했다.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녀는 테이프를 보냈다. 테이프에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와 남편과 함께 군에서 살아가는 일에 대해 말했다. 그녀는 맹인에게 남편을 사랑하긴 하지만 자신들이 살아가는 곳도 마음에 들지 않고 남편이 군사산업의 일원이라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맹인에게 그의 얘기가 담긴 시를 한 편 썼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에게 공군 장교의 아내로 살아가는 일에 관한 시를 한 편 쓰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다 쓰지 못한 시였다. 계속 쓰고 있는 중이었다. 맹인도 테이프에 녹음했다. 그는 테이프를 보내왔다. 그녀도 테이프에 녹음했다. 여러 해 이런 일이 계속됐다. 내 아내의 전남편인 장교는 여러 기지로 전근했다. 그녀는 무디 공군기지, 맥과이어, 맥코넬 등지에서 테이프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테이프를 보낸 곳은 새크라멘토 근처의 트래비스였다. 거기서 그녀는 어느 밤 그렇게 옮겨다니는 생활로 인해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 곁에서 이제 완전히 떨어졌다는 생각에 외로움을 느끼게 됐다. 이제는 단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약품 선반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모든 알약과 캡슐을 삼킨 뒤, 진 한 병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뜨거운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들어가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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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레이먼드 카버 (Raymond Carver, 1938~88)
1938년 5월 25일 오리건 주 클래츠케이니에서 태어난 레이먼드 카버는 20세기 후반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1980년대에 미국 단편소설 르네상스를 주도한 인물로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의 대가', '체호프 정신을 계승한 작가'로 불린다. 1979년에 구겐하임 기금의 수혜자로 선정되었으며, 1983년 밀드레드 앤 해럴드 스트로스 리빙 어워드를 수상하였다. 1988년에는 전미 예술 문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하트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8월 2일 워싱턴 주 포트 앤젤레스에서 폐암으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작품들은 세계 20여 개국에 번역/출판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대성당』,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에세이·단편·시를 모은 작품집 『불』, 시집 『물이 다른 물과 합쳐지는 곳』, 『밤에 연어가 움직인다』, 『울트라마린』, 『폭포로 가는 새 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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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연수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섰다.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등이 있다. 2001년 『꾿빠이, 이상』으로 제14회 동서문학상을, 2003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제34회 동인문학상을, 2005년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제13회 대산문학상을, 그리고 2007년에 단편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제7회 황순원문학상을, 2009년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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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죽는 대신 그녀는 심하게 아팠다. 그녀는 모두 게워냈다. 장교는―이름 따위야 알 게 뭐겠는가? 어린 시절부터 연인이었는데 이제 뭘 더 바라겠는가?―집으로 돌아왔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렀다.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그 일을 테이프에 녹음해서 그 맹인에게 보냈다. 몇 년에 걸쳐서 그녀는 온갖 종류의 일들을 테이프에 담아 보내는 일에 열중했다. 매년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을 제외하면, 그 일이 그녀의 가장 중요한 여가선용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중 한 테이프에다 그녀는 잠시 장교와 별거하기로 결정했다고 맹인에게 말했다. 다른 테이프에서는 이혼에 관해 말했다. 그녀와 나는 만나기 시작했고, 당연히 그녀는 그 일을 맹인에게 말했다. 그녀는 모든 일을 그에게 말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한번은 맹인이 막 보내온 테이프를 한번 들어보겠느냐고 내게 물은 적도 있었다. 일 년 전쯤의 일이었다. 내 얘기도 나온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좋다고, 들어보겠다고 했다. 우리는 술잔을 들고 거실에 앉았다. 우리는 들을 준비를 갖췄다. 먼저 그녀가 카세트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고 두 개의 다이얼을 조정했다. 그다음에 버튼을 눌렀다. 끽끽거리며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리를 줄였다. 몇 분간 악의 없는 잡담이 이어지다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맹인, 그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이런 말이 들렸다. “그 사람에 관해 자네가 말한 바를 들어보니 이런 생각이 드네.” 하지만 그 순간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테이프를 꺼야 했고, 그다음에 다시 듣지도 않았다. 아마 안 듣는 게 좋았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 맹인이 우리 집에 잠을 자러 온다는 것이었다.
“같이 볼링이나 치러 가면 되겠네.”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싱크대 앞에 서서 스캘럽 포테이토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날 사랑한다면,” 그녀가 말했다. “내 생각을 해서 좀 참아줘. 사랑하지 않는다면, 좋아. 하지만 당신한테도 친구가 있을 거 아니야. 한 명이라도. 그 친구가 찾아온다면 내가 잘 대접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녀는 그릇 닦는 수건에 두 손을 닦았다.
“맹인 친구는 없어.” 나는 말했다.
“다른 친구도 없잖아.”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말해야지. 게다가”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은 이제 막 상처했다구! 무슨 소린지 알겠어? 그 사람 아내가 죽었다구!”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맹인의 아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은 뷰라였다. 뷰라! 유색인종의 이름이다.
“아내가 니그로 아니야?” 내가 물었다.
“미쳤어?” 아내가 말했다. “지금 돌아버린 거야, 뭐야?” 그녀는 감자 하나를 집었다. 나는 그 감자가 바닥에 떨어져 레인지 아래로 굴러가는 것을 봤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술 마셨어?”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나는 말했다.
아내는 곧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한 일들까지 내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술 한 잔을 가져와 식탁에 앉아서 듣기 시작했다. 몇몇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뷰라는 아내가 일을 그만둔 그해 여름부터 그 맹인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뷰라와 그 맹인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조촐한 결혼식으로―무엇보다 그런 결혼식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그 두 사람과 목사와 목사의 아내가 참석했다. 하지만 교회 결혼식은 교회 결혼식이었다. 뷰라가 원한 것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뷰라의 임파선에는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다. 팔 년 동안 찰떡같이 붙어 다닌 뒤―찰떡같이란 아내의 표현이다―뷰라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 맹인이 병상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는 동안, 시애틀의 한 병원에서 그녀는 숨졌다. 그들은 결혼했고, 함께 일하며 살아갔고, 함께 잠잤는데―물론 섹스도 했는데―이제 그 맹인이 그녀를 묻어야만 했다. 그 불쌍한 여자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나로서는 이해가 불가했다. 여기까지 듣게 되자, 그 맹인에 대해서 미안한 생각이 조금 들긴 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살아온 삶의 행로가 얼마나 가엾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번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여인을 상상해보라. 살아가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소한 칭찬도 들어보지 못한 여자. 그게 참담한 표정인지 혹은 더 나은 표정인지, 아내의 안색을 전혀 읽을 수 없는 남편을 둔 여자. 화장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게 그 사람에게 중요할 리가 없다. 원한다면 한쪽 눈 주위에 초록색 아이섀도를 하고 콧구멍에는 핀을 꽂은 채 노란색 슬랙스에 자줏빛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겠으나 그래봐야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다가 죽음 속으로 빠져들던 그 순간, 맹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 눈먼 눈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테니―지금 상상해보면 그렇다―그녀의 마지막 생각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데 자신은 무덤으로 직행하고 있다고. 로버트에게 남은 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의 보험증서와 이십 페소짜리 멕시코 동전 반쪽이었다. 나머지 반쪽은 그녀의 관 속으로 들어갔다. 애처롭도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아내는 약속 장소에 마중 나갔다. 기다리는 것 외에 별 도리가 없었으므로―당연히 그 사람이 원망스러웠다―나는 술 한 잔을 들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그때 자동차가 진입로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술잔을 들고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
주차하면서 웃음을 터뜨리는 아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내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이미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맹인을 위해 반대쪽으로 갔다. 그 맹인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턱수염이 덥수룩했다. 턱수염을 기른 맹인이라니! 말하자면, 좀 심했다. 맹인은 뒷자리로 손을 뻗더니 여행가방을 끌어냈다. 아내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차문을 닫았다. 진입로를 지나 앞 포치로 올라가는 계단참까지 아내는 줄곧 그에게 붙어서 움직였다. 나는 텔레비전을 껐다. 나는 남은 술을 다 마시고 잔을 헹군 뒤, 손을 닦았다. 그리고 문으로 갔다.
“로버트를 소개해줄게. 로버트, 이쪽은 남편이에요. 전에 다 말했죠.” 아내가 말했다. 그녀는 상기돼 있었다. 그녀는 맹인의 외투 소매를 잡고 있었다.
맹인은 여행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는 내 손을 잡고 꽉 쥐더니 손을 풀었다.
“예전부터 알던 사람 같구먼.” 그가 쩌렁쩌렁하게 말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말했다. 다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어서 오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내가 그의 팔을 잡고 이끄는 가운데,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포치에서 거실로 들어갔다. 맹인은 다른 손으로 여행가방을 들고 갔다. 아내는 이런 얘기들을 했다. “자, 왼쪽으로, 로버트. 맞아요. 이제 보시면 의자가 있어요. 예, 그거예요. 거기 앉으세요. 이건 소파예요. 두 주 전에 산 새 소파랍니다.”
나는 옛날 소파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나는 그 옛날 소파를 좋아했다. 하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뭔가 다른 이야기, 허드슨 강의 풍광을 바라보며 기차를 타는 일 따위의 화젯거리를 꺼내려고 했다. 뉴욕으로 갈 때는 기차 오른쪽에 앉아야 하고, 뉴욕에서 돌아올 때는 기차 왼쪽에 앉아야만 한다는 그런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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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여행은 어떻게, 좋았습니까?” 내가 말했다. “그런데 어느 쪽에 앉으셨나요?”
“뭐가 궁금한 거야, 어느 쪽이라니!” 아내가 말했다. “어느 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녀가 말했다.
“그냥 물어본 거야.” 내가 말했다.
“오른쪽이었소.” 맹인이 말했다. “실로 사십 년 만에 처음으로 타본 기차였지. 어렸을 때 타본 게 다야. 가족들이랑. 참 오래전의 일이라오. 그 놀라움을 잊고 산 지 꽤 오래됐어. 이제 내 수염에도 겨울이 찾아왔지.” 그가 말했다. “하여튼 그렇게들 말하더군. 보기 좋은 모양이야. 어때?” 맹인이 아내에게 말했다.
“보기 좋아요, 로버트.” 그녀가 말했다. “로버트,” 그녀가 말했다. “로버트,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마침내 아내는 맹인에게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 걸 바라보는 눈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맹인이라고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도 없고,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었다. 그 맹인은 건장한 체격에 머리는 벗어지고 등에 짐이라도 짊어진 것처럼 어깨가 구부정했다. 그는 갈색 슬랙스에 갈색 신발, 밝은 갈색 셔츠, 넥타이, 스포츠 재킷을 입고 있었다. 말쑥했다. 또한 예의 그 턱수염이 덥수룩했다. 하지만 그는 지팡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검은 안경을 쓰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맹인들에게는 검은 안경이 필수품이라고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사람도 그런 안경을 쓰기를 바랐다. 처음 봤을 때, 그의 눈동자는 다른 사람들의 눈동자와 비슷했다. 하지만 가까이 살피면 뭔가 다른 게 보였다. 일테면 홍채에 하얀 부분이 너무 많았고, 눈 속의 눈동자가 목적도 없이 또한 멈출 능력이 없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느릿느릿. 그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니 왼쪽 눈동자는 코 쪽으로 움직이는데 다른 쪽 눈동자는 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돌아다녔다.
“술이라도 한잔 드셔야죠. 좋아하는 게 뭔가요? 양은 많지 않아도 온갖 종류가 다 있어요. 우리 취미생활이라서요.” 내가 말했다.
“젊은 양반, 나는 스카치파라네.” 그가 그 큰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젊은 양반이라고! “그렇군요.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구요.”
그는 소파 옆에 있는 여행가방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건 그럴 법도 했다.
“제가 방에다 갖다놓을게요.” 아내가 말했다.
“아니, 괜찮아.” 맹인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올라갈 때 가져갈 거야.”
“스카치에는 물을 좀 넣어야지요?” 내가 말했다.
“아주 조금만.” 그가 말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내가 말했다.
“그저 시늉만. 배리 피츠체럴드라는 아일랜드 배우 아나? 그 사람하고 내가 비슷하지.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 물을 마실 때 나는 물을 마신다. 위스키를 마실 때 나는 위스키를 마신다.” 그는 말했다. 아내는 웃음을 터뜨렸다. 맹인은 턱수염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는 천천히 턱수염을 들어올렸다가 내렸다.
나는 술을, 물을 조금 탄 석 잔의 스카치위스키를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로버트의 여행에 대해 얘기했다. 먼저 서해안에서 코네티컷까지 기나긴 비행기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다음에는 코네티컷에서 여기까지 오는 기차 여행. 우리는 한 잔씩 술을 더 마시며 그 여정에 대해 들었다.
언젠가 나는 맹인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의 결론에 따르면 내뿜는 연기를 볼 수 없기 때문이란다. 겨우 그 정도, 맹인에 대해서는 겨우 그 정도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맹인은 꽁초가 될 때까지 담배를 피우고는 남은 불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맹인이 재떨이를 다 채우자, 아내가 그걸 비웠다.
저녁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을 때, 우리는 술을 한 잔씩 더 마셨다. 아내는 로버트의 접시에 큐브 스테이크, 스캘럽 포테이토, 초록콩을 쌓아놓았다. 나는 그를 위해 빵 두 조각에 버터를 발랐다. “여기 버터 바른 빵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는 술을 조금 들이켰다. “이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내가 말했고 맹인은 고개를 숙였다. 아내는 입을 쩍 벌리고 나를 바라봤다. “식사하는 동안 전화벨이 울리지 않게 하옵시고 음식이 식지 않게 하옵소서.” 나는 말했다.
우리는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식탁 위에 있는 걸 다 먹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먹어치웠다.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먹었다. 우리는 게걸스럽게 해치웠다. 우리는 그 식탁을 하염없이 뜯어먹었다. 우리는 심각하게 먹었다. 맹인은 자기 음식으로 곧장 손을 뻗었다. 그는 자기 접시 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나이프와 포크로 고기를 다루는 걸 경애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그는 고기를 두 조각으로 잘라 포크로 찍어 입에 가져간 뒤, 순서대로 스캘럽 포테이토와 콩으로 옮겼고 그다음에는 버터 바른 빵을 한 조각 뜯어내 그걸 먹었다. 그러고는 우유 큰 컵을 마셨다. 한 번쯤 손가락을 사용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딸기 파이 반을 포함해서 모든 걸 다 먹어치웠다. 잠시 우리는 넋이 빠진 것처럼 앉아 있었다. 얼굴에 땀이 맺혔다. 이윽고 우리는 지저분해진 접시를 놔둔 채 식탁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는 거실로 걸어가 아까 그 자리에 몸을 파묻었다. 로버트와 아내는 소파에 앉았다. 나는 큰 의자를 차지했다. 우리가 두세 잔의 술을 더 마시는 동안 두 사람은 지난 십 년 동안 자신들에게 일어난 큰 일들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대개 가만히 듣기만 했다. 가끔씩 나도 끼어들었다. 내가 방을 떠났으리라고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게 싫었고, 아내가 내가 소외됐다고 느끼는 것도 싫었다. 그들은 지난 십 년간 그들에게―그들에게!―일어난 일들을 얘기했다. 나는 아내의 달콤한 입술에서 내 이름이 나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우리 남편이 등장한 거죠”, 뭐 그런 얘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 로버트에 대한 얘기가 더 많았다. 로버트는 손재주 많은 맹인처럼 거의 모든 일을 조금씩 해본 것 같았다. 하지만 제일 최근에 그와 그의 아내가 한 일은 암웨이 판매대행업으로,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 일로 많은 돈을 번 것은 아니었지만 생계는 이어갈 수 있었다. 또한 맹인은 아마추어 무선기사이기도 했다. 그는 예의 그 큰 목소리로 괌, 필리핀, 알래스카, 심지어 타히티에 있는 다른 아마추어 무선기사들과 교신한 내용에 대해 말했다. 그에게는 친구가 많았기 때문에 가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곳들을 찾아갈 수 있었다. 이따금 그는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고 손으로 턱수염을 매만지며 내게 뭔가 묻곤 했다. 지금의 직장에 다닌 지는 얼마나? (삼 년.) 하는 일은 마음에 드는가? (아니오.) 계속 다닐 생각인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게 있나?) 마침내 그의 기력이 다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텔레비전을 켰다.
아내가 짜증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맹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로버트, 집에 텔레비전이 있나요?”
“그럼, 두 대나 있는걸. 컬러텔레비전하고 고물딱지 같은 흑백텔레비전. 웃긴 일이지만, 텔레비전을 켤 때는 항상 켜는 게 말이지, 컬러텔레비전이야.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 맹인이 말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할 말이 없었다. 견해 없음. 그래서 나는 뉴스를 바라보며 앵커가 말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건 컬러텔레비전이야.” 맹인이 말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는 마. 그냥 아는 거야.”
“얼마 전에 좀 좋은 걸로 바꿨어요.” 내가 말했다.
맹인은 술을 한 모금 맛봤다. 그는 손으로 턱수염을 잡아당겨서 냄새를 맡아본 뒤, 다시 내렸다. 그는 소파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다탁 위에 있는 재떨이의 위치를 알아낸 뒤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아내는 입을 가리더니 하품을 했다. 그녀는 기지개를 폈다. “위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어요. 로버트, 편하게 계세요.” 그녀가 말했다.
“지금도 편안해.” 맹인이 말했다.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편안해.” 맹인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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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사라진 뒤, 그와 나는 일기예보에 이어 스포츠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쯤엔 그녀가 올라간 지도 꽤 됐기 때문에 그녀가 다시 올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아마 잠들어버린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다시 내려오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 혼자서 맹인과 함께 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술을 한 잔 더 하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물론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그에게 같이 약을 피워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막 대마를 하나 말았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으나 내킨다면 금방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나도 한번 피워보겠네.” 그가 말했다.
“좋아요.” 내가 말했다. “안 하면 손해죠.”
나는 술을 가져온 뒤, 그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마리화나를 굵게 두 개 말았다. 나는 하나에 불을 붙인 뒤 건넸다. 그리고 마리화나를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줬다. 그는 그걸 잡고 한 모금 들이마셨다.
“가능한 한 오래 머금고 계세요.” 내가 말했다. 그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게 분명했다.
아내가 분홍색 실내복과 분홍색 슬리퍼를 신고 아래로 내려왔다.
“이게 무슨 냄새야?” 그녀가 말했다.
“대마를 좀 피운 거지.” 내가 말했다.
아내는 나를 향해 성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맹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로버트, 마리화나를 피우는 줄은 몰랐어요.”
“이제부터 피우는 거지. 모든 일에는 처음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별 느낌이 없네.” 그가 말했다.
“이건 부드러운 거죠.” 내가 말했다. “약한 거예요. 이 정도 약은 괜찮을 테니까.” 내가 말했다. “이상하게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구먼, 젊은 양반.” 그는 이렇게 말하곤 웃음을 터뜨렸다.
아내는 맹인과 나 사이에 앉았다. 나는 그녀에게 마리화나를 건넸다. 그녀는 손에 들고 한 모금 빤 뒤 내게 돌려줬다. “이거 어느 쪽으로 돌리는 중이야?” 그녀가 말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이거 피우면 안 되는데. 눈꺼풀이 무거워서 참을 수가 없어.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나봐. 그렇게 많이 먹는 게 아니었는데”라고 말했다.
“딸기 파이 때문이지.” 맹인이 말했다. “그 때문이야”라고 말하더니, 그는 소리 높여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딸기 파이 더 남았어.” 내가 말했다.
“더 드실래요, 로버트?” 아내가 말했다.
“조금 있다가.” 그가 말했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지켜봤다. 아내는 다시 하품을 했다. “침대를 정리해놓았으니까 내키실 때 주무시면 돼요, 로버트. 오늘 정말 긴 하루였을 거예요. 주무시고 싶을 때 얘기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그의 팔을 당겼다. “로버트?”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어. 이게 테이프보다 낫구먼. 그렇지 않아?” 그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나는 “차례가 돌아왔어요”라고 말하고 그의 손가락에 마리화나를 끼웠다. 그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 내뿜었다. 아홉 살 시절부터 하던 일인 양 능숙했다.
“고맙네, 젊은 양반.” 그가 말했다. “그런데 이거 나한테는 정말 좋구먼. 느낌이 오는 것 같아.” 그가 말했다. 그는 불붙은 마리화나를 아내에게 내밀었다.
“마찬가지예요.” 그녀가 말했다. “이하동문. 나도 그래요.” 그녀는 꽁초를 빨아들인 뒤, 내게 건넸다. “여기 두 사람 사이에 눈 감고 잠깐만 앉아 있을게요. 그래도 괜찮겠죠? 두 분 다 말이에요. 혹시 불편하다면 말하세요. 그렇지 않다면 두 분께서 잠자러 갈 때까지만 여기서 잠깐 눈만 감고 있을게요.” 그녀는 말했다. “침대는 정리해놓았어요, 로버트.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계단 맨 위에, 우리 방 바로 옆방이에요. 주무실 때가 되면 보여드릴게요. 혹시 제가 잠들면 깨워주세요.”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눈을 감고 잠들었다.
뉴스가 끝났다. 나는 일어나 채널을 돌리고 왔다.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내가 잠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소파에 머리를 대고 잠들었다. 그녀가 몸을 뒤척이자 실내복이 다리에서 미끄러져 탐스러운 허벅지가 드러났다. 나는 실내복으로 그녀의 다리를 가리려다가 그만 그 맹인을 보게 됐다. 알 게 뭐람! 나는 실내복 자락을 뿌리쳤다.
“딸기 파이를 더 드시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내가 말했다.
“그러겠네.” 그가 말했다.
“힘드신가요? 침실까지 모시고 갈까요? 주무실 준비가 됐나요?” 내가 말했다.
“아직 괜찮네.” 그가 말했다. “아직, 자네와 좀더 함께 있고 싶어, 젊은 양반. 괜찮다면 말이야. 자네가 잘 때까지 나도 안 잘 거라네. 우리는 서로 얘기할 기회가 없었어. 무슨 소린지 알겠나? 이 사람과 내가 오늘 저녁을 세낸 것 같단 말일세.” 그는 턱수염을 한 번 위로 쓰다듬었다가 놓았다.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같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매일 밤 나는 마약을 피운 뒤 가능한 한 늦게까지 깨어 있다가 잠들곤 했다. 아내와 내가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든 적은 거의 없었다.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여러 꿈들을 꾼다. 때로 그런 꿈을 꾸다가 깨어날 때면 마음이 미칠 것만 같았다.
텔레비전에서는 교회와 중세에 관한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나는 다른 게 보고 싶었다. 나는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다른 채널에도 별다른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원래 채널로 돌린 뒤 사과했다.
“젊은 양반, 다 괜찮네.” 그 맹인이 말했다. “난 아주 좋아. 자네가 뭘 보든지 상관없어. 나는 항상 뭔가를 배우니까. 배우는 일은 끝이 없어. 오늘밤에도 내가 뭘 좀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내겐 귀가 있으니까.”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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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대고 머리를 내 쪽으로 둔 채 텔레비전을 향해 오른쪽 귀를 내밀었다. 매우 당황스러웠다. 이따금 그의 눈꺼풀은 아래로 처졌다가 다시 번쩍 뜨이곤 했다. 이따금 그는 지금 텔레비전에서 듣는 것에 대해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들어 턱수염을 잡아당겼다.
화면에서는 수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해골 복장을 한 사람들과 악마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에게 공격받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악마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은 악마 가면, 뿔, 긴 꼬리 등을 부착하고 있었다. 이 야외극은 행렬의식의 일부였다. 그 광경을 설명하는 영국인 내레이터에 따르면 스페인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벌어지는 종교행사라고 한다. 나는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맹인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해골이라.” 그가 말했다. “해골이라면 나도 아네.” 그가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텔레비전에서 대성당 하나가 나왔다. 그러더니 오랫동안 천천히 또다른 성당을 비추었다. 마침내 화면은 벽날개와 구름에 닿을 듯 치솟은 첨탑이 있는, 파리의 그 유명한 대성당으로 바뀌었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대성당의 전체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영국인 내레이터가 말을 멈추고, 그저 카메라가 대성당 주위를 보여주는 부분이 있었다. 카메라는 황소들이 서 있는 들판 뒤쪽으로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전원 풍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다 뭔가 말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대성당 외부를 보여주고 있어요. 이무기 돌. 괴물처럼 만들어서 깎아놓은 조각상들 말이죠. 아마 지금은 이탈리아에 있는 모양이네요. 이탈리아, 맞네요. 이 교회의 벽에는 그림이 있어요.”
“프레스코화 말이군, 그렇지?” 그렇게 묻고는 그는 술을 조금 들이켰다.
나는 내 잔을 집었다. 하지만 잔은 비어 있었다. 나는 하던 얘기가 뭔지 생각했다. “프레스코화가 있느냐고 물었습니까?” 내가 말했다. “좋은 질문이군요.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카메라는 리스본 근교에 있는 대성당으로 옮겨갔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대성당과 비교하자면 포르투갈의 대성당은 차이가 있었는데, 그건 규모가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대성당은 있었다. 대개 내부 모습을 보여줬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대성당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생긴 건지 아시느냐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누가 대성당에 대해서 말하면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느냐는 거죠. 말하자면 침례교회 건물과 대성당이 어떻게 다른지 아시느냐는 거죠.”
그는 입 밖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 년이나 백 년 동안 일해야 대성당 하나를 짓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그가 말했다. “물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거야. 한 집안이 대대로 대성당을 짓는 일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 텔레비전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평생 대성당을 짓고도 결국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죽는다더군. 이보게, 그런 식이라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니겠는가?”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눈꺼풀이 다시 처졌다.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 같았다. 포르투갈에 간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텔레비전에서는 다른 대성당이 나오고 있었다. 독일에 있는 것이었다. 영국인 내레이터가 웅얼거렸다. “대성당이라.” 맹인이 말했다. 그는 허리를 펴고 앉아 머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젊은 양반,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밖에 나는 몰라. 방금 말한 것들. 저 사람이 말하는 것. 하지만 자네가 설명해줄 수는 있겠지. 그렇게 해주면 좋겠는데. 아는 게 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딱히 아는 것도 없거든.”
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성당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바로 그 일에 내 목숨이 걸려 있었다면 어떨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말하는 미친 사람에게 내 목숨이 달렸다면.
나는 화면이 전원 풍경으로 바뀔 때까지 대성당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맹인 쪽을 향해서 말했다. “먼저 대성당들은 아주 높습니다.” 나는 도움이라도 얻을까 해서 방 안을 둘러봤다. “위로 치솟았어요. 높이, 아주 높이. 하늘을 향해서. 꽤 커서 지지물을 만들어놓은 대성당도 있어요. 말하자면 안 넘어지도록 받치는 거죠. 그걸 벽날개라고 해요. 여러모로 구름다리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구름다리도 모르시겠죠? 대성당 중에는 건물 전면에 악마 같은 것을 조각해놓은 것들도 있어요. 가끔은 왕과 왕비도 있구요. 왜 그러느냐고는 묻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의 상반신 전체가 앞뒤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는 끄덕이다 말고 소파의 한쪽 끝에 몸을 기댔다. 내 말을 들으며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한다는 게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내가 말을 하기만을 기다렸다. 나를 격려하려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또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대성당들은 정말 큽니다.” 내가 말했다. “어마어마해요. 돌로 만들었죠. 아마 대리석도 사용했을 거구요. 그 옛날에 대성당들을 지을 때,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거죠. 그 옛날에는 모두의 삶에 있어서 하느님이 아주 중요했던 거죠. 대성당을 지어놓은 걸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말했다. “이 이상 더 설명해드릴 게 없군요. 이런 일은 잘 못하겠습니다.”
“괜찮네, 젊은 양반.” 맹인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런 질문을 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뭘 좀 물어봐도 되겠지? 예, 아니오라고만 말하면 되는 간단한 질문이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지, 따지는 건 아니야. 난 초대받은 사람이니까. 나는 그저 자네에게 종교 같은 게 있느냐고 묻고 싶은 거야. 이런 걸 물어봐도 괜찮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고갯짓을 볼 수는 없었다. 맹인에게는 윙크나 고갯짓이나 마찬가지이다. “뭘 믿는 건 없다고 봐야겠죠. 아무것도 안 믿어요. 때로 그건 힘든 일이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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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네.” 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내가 말했다.
영국인은 계속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잠자던 아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그녀는 계속 잠을 잤다.
“양해해주셔야만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대성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하기가 어렵군요. 나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닌 모양입니다. 제가 설명할 수 있는 건 이제까지 말한 게 전부예요.”
맹인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머리를 수그리고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대성당이라고 해서 나한테는 뭐 특별한 게 아니거든요. 아무 의미도 없어요. 대성당들. 이렇게 늦은 밤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일 뿐이죠. 그저 그런 것일 뿐이에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맹인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뭔가를 꺼냈다. 그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말했다. “이해된다네, 이 사람아. 괜찮아. 재미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게.” “이보게, 들어봐. 날 좀 도와주겠나? 좋은 생각이 났어. 좀 두꺼운 종이를 가져오겠나? 펜이랑. 그걸로 할 수 있다네. 대성당을 함께 그리는 거야. 펜하고 좀 두꺼운 종이만 있으면 된다네. 어서 가져오게나.” 그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기운이 다 빠진 것처럼 다리에 힘이 없었다. 나는 아내의 방을 둘러봤다. 아내 책상 위 연필꽂이에 볼펜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말하는 종류의 종이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래층 부엌에서 양파 껍질이 조금 든 쇼핑백을 찾아냈다. 나는 내용물을 비우고 쇼핑백을 흔들었다. 그걸 들고 거실로 가서 그의 다리 근처에 앉았다. 나는 물건들을 치우고 쇼핑백의 주름을 편 뒤, 다탁 위에 그 종이를 펼쳤다.
맹인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카펫 위 바로 내 옆에 앉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한 번 훑었다. 그는 쇼핑백의 양쪽 면도 위아래로 만져봤다. 심지어 모서리까지. 그는 구석구석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좋아.” 그가 말했다. “좋아, 같이 해보자구.”
그는 내 손, 펜을 쥔 손을 찾았다. 그는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해보게나, 그려봐.” 그가 말했다. “그려봐. 무슨 소린지 알겠지. 내가 자네 손을 따라 움직일 거야. 괜찮아. 내가 말한 대로 시작해보게나. 알겠지. 그려봐.” 맹인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리기 시작했다. 먼저 집처럼 생긴 네모를 하나 그렸다. 그건 내가 사는 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다음에 나는 그 위에 지붕을 얹었다. 지붕의 양쪽 끝에다가 나는 첨탑을 그렸다. 미친 짓이었다.
“멋지군.” 그가 말했다. “끝내줘. 정말 잘하고 있어.” 그가 말했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아, 젊은 양반? 그러기에 삶이란 신비롭다니까, 잘 알겠지만. 계속해. 계속 그려봐.”
나는 아치 모양으로 창문들을 그렸다. 나는 벽날개를 그렸다. 나는 엄청난 문들도 만들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 방송국은 송출을 멈췄다. 나는 볼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쥐었다가 폈다. 맹인은 종위 위를 더듬었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종이 위, 내가 그려놓은 것을 죄다 만져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는군.” 맹인이 말했다.
나는 다시 볼펜을 잡고, 그는 내 손을 찾았다. 나는 열심히 그렸다. 나는 화가가 아니다. 하지만 끈덕지게 계속 그렸다.
아내가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실내복이 젖혀진 채로 몸을 일으키고 소파에 바로 앉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가르쳐줘요, 나도 알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맹인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대성당을 그리고 있어. 나하고 이 사람이 함께. 더 세게 누르게나.” 그가 내게 말했다. “그렇지, 그렇게 해야지.” 그는 말했다. “좋아. 바로 그거야, 젊은 양반. 아무렴. 이런 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할 수 있잖아. 그렇지? 식은 죽 먹기지.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제대로 다 그릴 수 있을 거야. 팔은 아프지 않은가?” 그가 말했다. “이제 거기에 사람들을 그려보게나. 사람들이 없는 대성당이라는 게 말이 되겠어?”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로버트?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무슨 일이에요?” 아내가 말했다.
“괜찮아.”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눈을 감아보게나.” 맹인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눈을 감았다.
“감았나?” 그가 말했다. “속여선 안 돼.”
“감았습니다.” 내가 말했다.
“계속하게나.” 그가 말했다. “멈추지 마. 그려.” 말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딱 붙어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다 그린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계속 그렇게 있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말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
『대성당』에서 전재 (레이먼드 카버, 김연수 옮김, 문학동네,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