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단편 「자비의 천사」를 <타임캡슐 단편>으로 소개합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1963년 첫 소설을 발표한 이래 그 이름이 다작(多作)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될 정도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해온 미국 작가입니다. 오츠는 본격 소설뿐 아니라 논픽션에서 호러, 미스터리, 로맨스까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재다능한 작가로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 「자비의 천사」가 수록된 소설집 『여자라는 종족』은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이야기”라는 부제에 걸맞게 여성 특유의 강박, 폭력성, 억압과 같은 주제들을 장르의 묘미를 살려 탁월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편집자
뇌졸중 & 종양의 왕국에서는
유머 감각이라는 약을 처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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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천사 그녀는 1974년 4월에 죽었고, 잠든 듯 편하게 구부린 시체 옆에서 발견된 주사기에는 강력한 근육 이완제인 숙시닐콜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자비의 천사 그녀는 이른 아침, 주로 새벽 4시부터 6시 사이에 형광등이 켜진 11층 복도 끝에서, 벽이 그림자에 어릿어릿 녹아들다가 병원 밖의 뿌연 도시가 눈에 들어오는 그곳에서 가끔씩 목격됐다.
자비의 천사 그녀는 곧추선 수증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숨 같은 수증기 무리에 불과할 때도 있고, 또 가끔은 1950년대 간호사 복장인 빳빳한 흰색 나일론 유니폼을 입고 모호한 침묵 속에 미끄러지듯, 그러나 결연하게 걷는 모습이기도 했는데, 그녀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신경외과 병동 신참에게도 얼핏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나이와 직급에 상관없이 대체로 바지와 윗도리를 입지만, 그때는 원피스에 벨트를 매고 치마는 허벅지 중간까지 얌전하게 내려왔다. 거기에 풀 먹인 흰색 간호사 캡을 맵시 있게 얹고 머리핀으로 고정했다. 그리고 바닥이 고무로 되어 있어 마운트 세인트 조지프 간호학교 1951년도 졸업생답게 의욕 넘치는 웃는 얼굴로 병실에 미끄러지듯 조용히 들어가기에 그만인 티 없이 하얗고 교정용처럼 보이는 끈 묶는 신발. 살찐 허벅지끼리 자꾸 스치며 마찰을 일으켜 숨쉬기가 곤란해지는 투명한 흰색 스타킹…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화학물질로 심하게 오염된 나머지 기름에 불이 붙어 화염이 9미터까지 치솟았던 중서부의 악명 높은 강을 굽어보는, 오래된 시립 병원 신경외과 병동의 자비의 천사.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한결 나아졌다. 거의 오십 년이 흘렀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비웃으며 불경기가 마치 주민들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곳을 녹슨 벨트라고 부른다. 그건 기상 변화나 전쟁, 혹은 암의 피해자에게 그들이 처한 재앙의 탓을 돌리는 것만큼 잔인한 처사다. 하지만 강의 화재는 과거사다. 그리고 병원의 환경도 많이 개선됐다. 노동조합이 생긴 덕분에 직원들의 사기도 향상됐다. 물론 우리야 언제나 박봉, 혹자의 말을 빌리면 착취에 시달리겠지만, 아무튼 전반적으로 상황이 나아진 것만은 틀림없다. 나 개인적으로는 아그네스라는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짓을 한 간호사, 혹은 그 어떤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자비의 천사를 본 적 있냐고? 아니, 없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 거의 앉아보지도 못한 채 야간 근무를 하고 나면 엘리베이터 옆이나 그녀가 죽었다는 자재실 옆에서 뭔가를 봤다고 상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그저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허하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우리 층은 회복률이 제로이고 젊은 환자들도 워낙 많이 죽기 때문에 우울해지거나 으스스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1950년대에 비해서는 확실히 나아졌다. 강의 오염은 여전할지 모르지만 포름알데히드처럼 악취가 나지도 않고 불이 붙지도 않는다. 담배꽁초를 던지더라도 눈앞에서 펑 하고 터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듣자니 물고기들이 돌아온다고 한다. 연체동물인지, 어떤 무모한 해양 생물인지 아무튼 확실히 돌아온다고 한다. 어디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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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막상 닥치니(나중에 그녀는 고야가 그린 겁에 질린 까만 잡종 개처럼 세상을 훔쳐보는 사람의 소스라치는 심정으로 깨닫게 되는데) 모기를 찰싹 때려잡는 것과 같았다…
반사작용처럼. 연민, 인류의 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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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R―, 1999년 4월. 마운트 세인트 조지프 간호학교의 수석 졸업생. 팔꿈치와 허벅지에서 정전기가 일어나는 흰색 나일론 바지와 셔츠를 입은 멋있는 금발 아가씨. 빳빳한 흰색 캡 아래로 물결치는 그녀의 머리. R―이 오늘 아침에 해야 할 일은 흐물흐물한 살에서 진물이 흐르는 욕창을 과산화수소수(윽, 그 냄새)로 살살 목욕시키고 뻣뻣한 깃털 같은 머리카락이나 비듬이 떨어지는 두피, 혹은 뇌 수술을 받고 몇 주에 걸쳐 방사선 치료를 받았을 경우 둥지에서 떨어진 아기 새처럼 솜털만 보풀거리는 그 안쓰러운 머리를 부드럽게 감겨주는 것이다. 환자가 끙끙거리며 몸서리를 친다. R―은 조용히 묻는다. 너무 뜨거워요? 너무 차가워요? 제가 너무 세게 감기나요? 아프세요? 자, 이렇게 하면 한결 나을 거예요. 환자는 중년의 매력적인 백인 여자다. 전에는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얼이 빠져 눈만 끔뻑이며 말도 떠올리지 못한다. R―은 생각한다. 말이라, 그걸 어떻게 설명하겠어?
불가능하다. 못 한다.
저주받은 도시(병원 사람들은 11층을 그렇게 부른다)의 나이 많은 간호사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R―을 지켜본다. 일 잘하고, 말 잘 듣고, 절대로 말대꾸하지 말 것. 윗사람에게 말대꾸하는 건 병동에서 제일 어린 간호사가 할 처신이 못 된다.
저주받은 도시를 다스리는 신은 뇌졸중과 종양이다. 타락해 버린 자애로운 신들.
환자들 중에는 실금(失禁)하는 사람이 많다. (R―은 문득 궁금하다. 놓쳐서 실금이면 반대말은 움켜쥐는 획금인가. 대체 무슨 뜻이람.) 의사인 C―는 R―에게 언어장애 다음 차례는 신체 기능이라고 말한다. 뇌세포의 퇴화. 예를 들어 알츠하이머 같은 퇴행성 질환에는 회복이라는 게 없다. 뇌에 노인반(老人斑)이라는 단백질 침전물, 신경섬유성 농축체가 쌓인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줄기세포 연구도 이런 환자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뇌세포는 재생되지 않는다 ─ 곤죽이 될 뿐이다. 시간을 뒤로 돌릴 수는 없다. 용변 가리는 법을 익히던 시절에 배운 것들을 잊어버린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망각이다. 기억이 차라리 기적이다. 심지어 먹는 법도 잊어버릴 수 있다.
R―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다소곳하게 귀를 기울인다. C―는 2년차 레지던트이고 R―보다 고작 서너 살 위다. 상체를 숙이고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먹는 능력을 상실한다고 이야기하는 C―. 음식을 입 안에 넣으면 혀 위에 고스란히 얹어놓는다고 말한다. 그 음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이다.
물론 R―도 이런 것들을 알고 있다. 그녀는 간호사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공략하기 쉽게, 유혹하기 쉽게 만들려는 의도로 주절주절 늘어놓는 C―의 이야기들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러면서도 소심하게 웃고 있다. 병원의 서늘한 냉기 속에서도 두 뺨이 달아오른다. 그녀는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C―에게 자신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직하게, 어떻게 먹는 법을 잊어버릴 수 있죠? 그건 기억이 필요하지 않은, 아기의 본능 같은 것 아닌가요? C―는 고무줄 같은 숨을 그녀의 얼굴에 뿜으며 말한다. 저주받은 도시에 오래 있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거예요.
R―은 그럴 리 없을 거라고 다짐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냉정하고 냉소적이고 울적해지지 않을 것이다.
4
자비의 천사로 불리는 아그네스 오드와이어. 그녀가 죽은 후에 발견된 간호 일지의 암호를 형사들은 끝끝내 명쾌하게 풀어내지 못했다.
1959년 3월
이 일에 종사한 지 팔 년째
마침내 내 길, 내게 주어진 운명을 깨달았다.
가 그 표시다.
이 간호 일지에
쐐기 모양 암호로 표시한 자비의 행위.
아니 이 행동들이 발각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법정이 나를 “심판”할 거라는 두려움도 없다.
나는 죄가 없다.
이건 다른 악에 희생된 무고한 자들을 위한 자비다.
(그 끔찍한 이름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G―D)
A.
5
의사 C―는 농담을 한다. 눈먼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녹슨 강 옆 뇌졸중과 종양의 왕국에서 비 내리는 2001년 봄에 너는 몸져누운 자들의 침상 사이로 곧추선 불꽃처럼 움직인다. 건강하고 당차고, 나일론 때문에 야릇한 색정적인 전기를 일으키면서. C―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감탄의 눈으로. 질투의 눈으로.
참 젊다.
하지만 영원히 젊을 수야 없겠지.
너도 자비의 천사에 대해 떠도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어처구니없는 미신이라고 코웃음을 친다. 너는 막연하게나마 자선을 베푸는 크리스천이며, 미신의 신봉자나 광신도가 아니다. 너는 R―, 이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뇌가 손상된 저주받은 도시의 환자들이, 눈이 멀쩡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홍조 띤 그 상큼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너는 R―.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저주받은 도시에는 산타클로스처럼 하얀 머리와 수염을 가진 노인네가 적어도 한 명은 꼭 있는데, 그 노인네가 아흔세 살에 간신히 숨만 쉬는 뇌졸중 미라 신세여서 욕창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주겠다는 (부질없는) 희망으로 지린내 나는 침상에서 이쪽저쪽으로 돌아 눕히고 옮겨야 하는 사람이라도 왠지 마음이 쓰인다. 저주받은 도시에는 그리운 할머니를 연상시키는 노인네도 반드시 한 명은 있는데, 이번에는 멍한 시선으로 너를 좇으며 이렇게 졸라대는 뇌종양 환자다. 넌 누구야, 내 딸이니, 날 좀 집에 데려다줄래? 뇌졸중 & 종양 & 노인반이 이 왕국의 신이다.
중증 환자들이 풍기는 물러 터진 바나나/망울진 우유 냄새를 들이마시는 건 끔찍하다. 그 냄새가 네 피부에, 두피와 머리카락에 밸까 봐 두렵다.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들의 입 안에서 얼씨구나 번식하는 박테리아의 그 의심할 나위 없는 냄새.
네 따뜻한 살에 닿는 소스라치게 차가운 손가락. B―다. 심한 무도병으로 시력을 거의 상실한 열여섯 살짜리가 휠체어에 앉아 몸을 씰룩거리고 뻗대며 진저리 친다. 도와줘, 빌어먹을 거기, 좀 도와줘. B―는 애원하지만 그의 입은 침이나 흘릴 뿐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너는 한없이 유감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그 차가운 손가락을 손목에서 떼어낸다.
나중에야 남모르게 그 간절한 손가락이 남긴 자국을 살펴본다. 피가 쏠렸던 자리에 남은, 희미하니 붉은 자국은 사랑의 흔적 같다.
뇌졸중은 번개처럼 빠르고 느닷없다. 뇌졸중은 뇌에 내려치는 번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지. 다만 죽음이 아니라 실어증과 치매, 마비가 뒤따르기도 한다. 마침내 뇌의 기능이 소멸할 때까지, “환자”가 떠날 때까지. 몸은 남을지도 모르지만 “환자”는 떠난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 온몸을 휘감는 공포. 신경 쓰지 마. 그런 생각일랑 어린 강아지가 몸에서 물방울을 털어내듯 털어내버려.
종양도 있다. 종양은 강가의 이 낡은 병원에 득실거리는 바퀴벌레처럼 교활하게 번식한다. 도려내도 바퀴벌레처럼 툭하면 다시 돌아오고 아무 데나 제멋대로 전이한다. 이를테면 대장에서 대뇌로. 전립선에서 간으로. 유방에서 폐로. 식도암, 소뇌암. 이 이른 시간에 너는 11층 병동을 돌아다닌다. 동요한 눈동자의 종양 덩어리 경련성 마비 환자, 창백한 땀을 흘리는 긴장성 정신분열증 환자, 몸이 마비된 파킨슨병 환자, 벌집 같은 뇌가 반으로 말끔하게 쪼개져서, 의욕적이고 환한 얼굴의 젊은 R―이 침상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면 그녀를 허공으로 증발시켜 버리는 환자.
간호사? 간호사, 어디 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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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천사 우리의 빨간 머리 아그네스 오드와이어는 그런 허공을 들고난다. 자비의 천사 그녀는 누가 부른다고 나타나는 게 아니라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아그네스가 보이더라도 순식간에 다시 보이지 않는다. 아그네스는 보이지 않다가도 순식간에 보일 수도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뿐일까? 존재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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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충돌 사고였다. 오락용 비극의 정수였다. 오락용 비극에 목말라 하던 중서부 전역의 신문 1면과 TV 뉴스를 섬뜩하게 채색한. 7만 5000달러짜리 포르셰 스포츠카를 몰던 스물아홉 살의 남자는 한밤중에 고속도로에서 닷지 다코타 픽업과 추월 경쟁을 벌이다가 통제력을 상실했고, 자동차는 미끄러져 콘크리트 방벽을 들이받았다. 구조된 남자의 부서진 몸과 조각난 두개골과 손상된 뇌는 구급차에 실려 강가의 이 병원으로 왔다. 여러 시간에 걸친 뇌 수술, 중환자실에서 보낸 여러 날을 거쳐 이제 1104호실에 누워 있다. R―은 미동 없는 형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담당 환자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게다가 이런 환자라니. 간호사는 감정을 배제해야 해. 개인적인 애착 같은 것. 난 “타고난 간호사”라고 칭송받는 사람이야.
그리고 R―은 이 남자가 못마땅했다. 그의 라이프스타일이. 거기에는 계급적 요소가 있었다. 그녀는 이런 사람들에게 분개한다. R―의 아버지는 사십 년 동안 설비 회사 노동자로 일했다. 임금, 노조 회비. 은퇴하기 오 년 전에 동결된 연금. R―이 사랑하는 아버지는 어느새 칠십 대 중반이고 폐기종과 파킨슨병에 시달린다.
어림없다. R―은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문에서, 그리고 TV에서 본 남자의 사진. 거듭거듭 들려오는 그의 이름. 충돌 사고가 났을 때 그의 포르셰는 시속 144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었다. 그는 닷지 픽업을 추월해서 따돌렸다. R―은 이런 사실들과 마커스 로퍼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들을, 로퍼를 담당하기 전에 들었다. 로퍼를 담당하게 될 줄 몰랐을 때.
“마커스 로퍼.”
하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마커스 로퍼가 아니었다. 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거즈와 붕대로 둘둘 감아 빨래 더미처럼 미동도 없는 그 형체에는 성별이 없고 인종과 나이도 불분명했다. 부러져 쓸모없어진 다리는 오그라들고 뒤틀릴 처지였다. 조만간 의식을 되찾지 못한다면. 그런데 그 의식은 어디로 간 걸까? 붕대 밑으로 까무잡잡한 얼굴의 3분의 1이 사라졌다는 말도 있었다. 왼쪽 귀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뭉뚝한 살덩이만 남았다. 신경 수술 이후 73시간 동안 붕대로 칭칭 감은 머리 양쪽에는 0.5리터 크기의 플라스틱 양동이 두 개가 만화 속 무슨 곤충의 안테나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썰고 자르고 수없이 꿰맨 머리에서 떨어지는 피를 받았고, 그 찝찝한 피를 R―이 치워야 했다. 외상에도 불구하고 주요 장기들은 꿋꿋하게 버텼다. 장하게도 파르르 떠는 눈꺼풀과 절단되고도 씰룩이는 입술은 주변에서 들리는 말,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때로는.
며칠이 흘렀다. R―이 병실로 들어가니 침상이 비어 있었다. 환자는 원내감염으로 다시 중환자실에 수용됐다. 열이 39.4도까지 올라서 주요 장기들의 기능이 정지될 뻔했다. 그러나 심장은 강했고 박동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R―은 1104호로 돌아갔다. 마커스 로퍼가 돌아왔다.
내 그림자가 드리우면 마치 그 순간 내가 그를 알듯 그 역시 나를 아는 것처럼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감은 눈을 내 얼굴로 향하며 몸에 전율이 인다.
8
1964년 8월
이 일지 속 자비의 행위들
여섯 번 중에 하나도 발각되지 않았다.
간호사 아그네스는 신중하고 &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니까.
망자를 위한 미사. 나는 무릎을 꿇고 & 성모께 기도한다.
나처럼 아픈 자들을 돌보시는 성모 마리아.
마리아여 제 영혼을 위해 기도하소서.
G―D가 귀 기울이지 않는 기도를.
A.
1967년 11월
(방사선실에서는 방사선이 누출된다.
나를 들여보냈던 건 그 때문이다. 나는
속옷을 두 겹으로 입고 스타킹을 신어서
내 몸을 보호한다. 간호사 캡 밑에 털모자도 썼다.
몇몇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는다.)
추수감사절, 이 외로운 시기를 맞아
A.
1969년 6월
연민은 인류의 천형이다.
연민은 곪은 종기 속의 박테리아처럼 번식한다.
간호사 아그네스는 너희 심장을 더 강하게 만든다!
G―D는 연민을 모른다.
A.
9
아그네스 오드와이어. 파리하고 수수하며 주근깨 가득한 성자 같은 얼굴이야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성별을 막론하고 흔했지만 대개는 여자였다. 그리고 능숙한 손과 튼튼한 등. 뒷다리로 서 있는 암소처럼 서투른 인상의 아그네스가 얼마나 일을 잘하고, 게다가 얼마나 우아한지 알면 놀라웠다. 그렇게 서툴러 보여도 어떤 여자 직원들은 나름대로 우아하다.
사람들은 아그네스 오드와이어가 키스 한 번 못해봤다고 했다.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아그네스 오드와이어가 마흔아홉 살에 처녀로 죽었다고 했다. 사실이다.
마흔 줄에 접어들어서도 평범하고 둔감한 걸스카우트 같은 여자. 불평하는 일도 없고, 늘 묵묵하며, 간호사 업무 중에 제일 고약한 일(과산화수소수 스펀지 목욕, 냄새나는 욕창, 갑작스러운 뇌출혈, 구토를 동반한 경련, 성인용 기저귀 등등)을 맡아도 전혀 툴툴거리지 않는. 결혼은 하지 못할 팔자. 성인이 된 후로 줄곧 늙고 병들어 자신에게 의존하는 부모님을 돌보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는. 주변에서 결혼한 언니들이 집안일을 좀 도와줄 수 없냐고, 회계사 오빠는 어떻게 됐냐고, 오빠는 왜 샌디에이고로 이사를 갔냐고, 그게 공평한 처사냐고 물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그냥 웃고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가슴속의 일들 중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표현할 어휘를 찾을 수 없어서 말로 할 수가 없다.
행동으로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말로는 못한다.
나이 많은 상근 의사들은, 성은 모르고 아그네스라는 이름만 알았어도 아그네스 오드와이어를 좋아했다. 젊은 의사들은 몇 년 지나면 그녀의 이름을 잊기 일쑤였다. 병원의 남자 직원들은 그녀의 빨간 머리와 불그스름한 피부를 눈여겨봤지만, 서른두셋을 넘기자 아그네스는 성적인 대상으로 여겨지기 힘들었다. 어떤 남자가 그 어정쩡한 몸과 팔꿈치, 커다란 가슴과 뼈가 불거진 턱에 다가가겠는가. 수줍은 듯 축축하게 벌린 입술에 어떻게 키스를 하겠는가.
1971년 2월
오, 마리아여, 저는 좋은 일을 하고 싶은 겁니다.
이건 그렇게 단순한 거예요.
는 평안함을 주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죠.
그들의 눈을 보면
어떻게 도울지 알 수 있어요.
A.
10
“로퍼 씨? 마커스.”
시간이 지나면서 로퍼 씨는 돌 같은 회색에 핏발이 선 왼쪽 눈을 떴다. 초점이 없고 종잡을 수 없는 생각처럼 왼쪽 눈동자가 정신없이 오락가락했어도 더 시간이 지나자 로퍼 씨는 두 눈을 모두 떴다. R―은 망가진 그 얼굴을 만지고 싶었다. R―은 섬뜩한 헤드라인 옆에 실렸던 잘생긴 얼굴을 기억했고, 되는대로 아무 피부나 가져다가 조각조각 기워놓은 것 같은 지금의 얼굴에서 그 얼굴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코가 반쯤 주저앉았어도 콧구멍은 남아서 호흡기를 꽂을 수 있었다. 지금은 힘겨우나마 보조 장치 없이 숨을 쉬었다. 환자는 튜브를 통해 유동식을 공급받았다. 그리고 늘어진 페니스에 찔러 넣은 도뇨관으로 노폐물을 배출했다. R―은 로퍼 씨 좌뇌 두정엽의 상당 부분이 없어졌다는 걸 의사 C―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자동차 사고로 잃었거나 수술로 제거됐거나. (의사 C―는 그 수술을 참관했는데 여섯 시간하고도 사십 분이 걸렸다.) 환자의 입가에는 종종 원시언어의 잔존물 같은 붉은 거품이 일었다.
“마커스.”
남자가 가만히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신전처럼 높직한 침상으로 다가가던 R―은, 잠 속으로 들어온 자신을 남자가 반갑게 맞아줄 거라고 믿었다.
환자는 죽지 않았다. 물론 분명한 의식 같은 걸 되찾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환자의 주요 장기는 튼튼했다. 그의 심장은 튼튼했다. 손상된 뇌도 견뎌냈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좋은 아침이에요!”
R―은 그의 왼쪽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고 상상했다. 그렇게 많은 은근한 날들을 보냈으니 이제 로퍼 씨도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희한하게도 R―은 마커스 로퍼, 7만 5000달러짜리 스포츠카 주인에게 느꼈던 적대감을 너무나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고속도로에서 위험천만한 추월 경쟁을 벌인 부잣집의 응석받이 도련님. 그러다가 결국 제 목숨을 위험에 빠뜨린 남자. 그런 사고라면 죽었어야 마땅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죽었을 텐데도 마커스 로퍼는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했다. 저주받은 도시의 넋 나간 분열증과 혼수상태의 환자들 틈에서 마커스 로퍼는 가장 매혹적이었다. 그는 저주받지 않았으니까. 그는 젊어. 살아낼 거야. 처음에는 로퍼가 진정한 의미의 회복을 결코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R―도 지금은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복할 것이다. 이 환자의 뇌 손상은 퇴행성 질병의 결과가 아니었다. 다시 말을 배우고 운동 능력을 되찾는 일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R―은 신문을 오려서 보관해 두었다. 손상되기 전의 그 얼굴은 언제까지라도 마커스 로퍼 내면의 얼굴이 될 것이고, 그걸로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난 알아요. 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마커스. R―은 이 이름을 부드럽게 소리 내어 속삭인다. 자고 있는 환자 옆에 선 간호사라면 누구라도 그렇듯이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마커스. 로퍼.” 그녀는 음절마다 똑같이 강세를 줘서 부르는 이 이름에 마음이 끌렸다. “마커스. 로퍼.” 특별하고도 개인적인 의미가 담긴 시(詩)이기라도 한 것처럼. “마-커스.” 이국적으로 들리는 흔치 않은 이름. “마커스 로퍼. 마커스―.” 나직하게 떨리는 R―의 목소리, 1104호에서 환자와 단둘이 있을 때만(그리고 아무도, 복도에서도 엿듣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때만) 나오는 목소리 때문에 그 이름은 마치 주문 같았다.
하지만 로퍼 씨는 R―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아직까지는). 그러나 어쩌면 그가 반응을 보이는데 R―이 충분히 눈여겨보지 않는 건 아닐까? 그의 눈꺼풀을?
가족들로서는 길고 지치는 병구완이었다. 저주받은 도시에는 그런 병구완이 드물지 않았다. 그런 병구완은 종종 살아 있는 시체들, 곧 죽을 자들을 위해 밤을 새우는 철야가 됐다. 마커스 로퍼의 가족들도 그런 부류였다. 경악과 번민과 두려움 속에서 낙담하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의식 없는 남자를 바라보는. 그런 순간에도 병실에 들어가야 할 때가 있는 R―은 마치 문상객 같은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로퍼 씨가 자기 내면으로 더 깊이 가라앉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돌아가면 얼마나 안도하던지. R―이 옆에 있으면, 그렇게 단둘만 남으면.
11
마음이 더 강해지도록 기도한다고? 어떻게?
자비의 천사 그녀는 처음이 제일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파리를 쫓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아. 아그네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모기.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는 입가를 훔치면서. 그녀의 눈. 어느 순간에 그걸, 모기를 죽였다는 걸 알게 되지. 살갗에 대고 찰싹.
누가 자비의 천사인 그녀의 최초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그건 오로지 아그네스밖에 몰랐다. 그러니 두 번째, 세 번째도. 모두 열여덟 번이었나? 아니면 일부 형사들의 주장처럼 무려 스물세 번? 심지어 그 이상? 자비의 천사 그녀는 죽은 후에 그렇게 불렸지만, 생전에는 (당연히) 천사로 통하지 않았고 그저 아그네스 오드와이어, 엄청나게 훌륭한 간호사였다.
살아생전에는 그렇지 않았고. 죽어서 나중에 그렇게 됐는데, 이제 그것도 거의 삼십 년이 되어갔다. 자비의 천사, 당신이 그런 걸 믿는다면. 수증기 같은 영혼. 병원 바이러스 같은. 유령이 아니라.
나이 든 간호사들은 아그네스를 기억한다. 아그네스 오드와이어였을 리가 없어. 우리 중 누구도 그럴 리가 없어. 주사기를 든 그녀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든 간에. 아그네스는 아니야! 우리가 그녀를 아는데, 우리는 그런 혐의를 절대 믿지 않았어.
병원 바이러스, 감염.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그걸 들이마시면 병에 걸린다.
신경외과 중환자실. 동트기 전의 평화로운 시간. 늙은 뇌졸중 환자의 목구멍 속으로 뱀처럼 구불구불 기어 들어간 플라스틱 호흡관에서 후두를 막는 점액질 분비물을 빨아낼 때 그 썩은 부패의 냄새는 어찌나 심하던지 그냥 그 호흡기로 질식시켜도 되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그 자비의 행위를 G―D는 하지 않았다. 미리 계획하지도 않고 특별한 명칭도 없는.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첫 은밀한 죽음을 간호 일지에 로 꼼꼼히 기록하던 넋 빠진 젊은 간호사에게 그건 은총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이 아니었다.
자비의 천사가 십오 년 동안 발각되지 않은 건 의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빈사 상태이거나 그와 거의 비슷했다. 하룻밤 사이에, 혹은 몇 시간 만에 환자들의 상태가 악화되는 건 일상이었다. 강가의 병원에서 이십삼 년간 간호사로 근무했던 아그네스는 매년 를 기록했고 어떤 해에는 두 배로 늘렸는데, 그건 물론 팔 년차인 1959년에야 뒤늦게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냥 별일 아니야. 악을 물리치는 선이야.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거야. 나는 자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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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날이에요, 로퍼 씨. 당신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곧 그렇게 되겠죠. 하늘이 맑아요. 솜털 같은 흰 구름이 높이 떠 있는 것 말고는. 저런 걸 새털구름이라고 하나요?” 뿌연 창문으로 R―의 눈에 들어오는 건 더러운 붕대 색깔의 하늘이었지만, 마커스 로퍼는 그걸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남동쪽, 테네시에서 바람이 불어와요. 산 쪽에서 불어오니까 오염되지 않은 바람이죠.” R―은 간호사로서 해야 할 일과를 활기차게 별 느낌 없이 처리했다. 환자의 왼쪽 손목을 잡고 검지로 짚어 맥박 수를 셌는데, 불규칙하기는 해도 맥이 강했다. 맥박 수는 1104호와 간호사실의 모니터에 모두 기록됐지만, 그건 둘만의 신호, 남다른 친근함의 징표였다. R―은 가슴을 찌르는 듯한 행복을 느꼈다. 남자의 심장을 손에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마커스 로퍼와 R―밖에.
로퍼 씨의 멍든 팔에 꽂은 튜브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정맥주사액을 교체해야 했다. 로퍼 씨의 멍든 사타구니에서 침대 아래 플라스틱 양동이로 똑똑 떨어지는 독한 냄새의 소변을 변기로 가져가 비워야 했다. 간호사가 해야 하는 이런 일과를 R―은 열의와 열정을 갖고 처리했다. 기적은 일어날 수 있어. 심지어 저주받은 도시에서도.
그녀는 나직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가봐야 해요. 하지만 여기 이 병동에 있을 거고, 나중에 또 와볼 거예요. 그리고 물론 내일 아침에도요. 제가 늘 확인한다는 걸 잊지 마세요. 로퍼 씨!”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왼쪽 눈꺼풀에 경련이 일면서 살짝 벌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멍든 로퍼 씨의 눈두덩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초승달 같은 흰자위뿐이었다.
고무 밑창 신발로 미끄러지듯 1104호실을 나온다.
1104호실을 나올 때 그녀의 젊은 심장은 강하게 뛴다. 차분하게.
당연히 아니지. 난 사랑에 빠지지 않아. 환자와는 아니야. 게다가 그런 환자하고는.
동트지 않은 이른 새벽, R―은 엘리베이터 옆에서 공기의 파동을 본다. 어쩌면 리졸 냄새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번식하는 죽음이라는 박테리아. 심장이 멈칫하지만, 심장은 뛰어야 한다. 쿵, 쿵. R―은 젊다. 이제 스물여섯 살이다. R―은 견뎌내야 한다. R―은 엄청나게 훌륭한 간호사가 될 작정이다. 하지만 복도 끝에서 투명하게 가물거리는 그림자를 보지 않으려고 피로에 지친 눈을 질끈 감는다.
그리고 이십팔 년 오 개월 십육 일 전에 자기유도 심폐정지라는 사인으로 죽은 간호사 아그네스 오드와이어의 시체가 발견된 자재실 문을 연다.
13
1969년 12월. 언제나처럼 살냄새가 진동하는 침침한 방으로 그녀는 침착하게 숨을 쉬며 소리 없이 들어선다. 주사기는 준비됐다. 아넥타인이라는 새 근육 이완제. 혈중에서 빠르게 사라져 일상적인 피검사로는 검출되지 않는다는데, 호흡 정지라면 이런 환자들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사인이니 누가 의심하겠는가? 병실에는 환자 세 명이 있다. 둘은 뇌졸중이고 한 사람은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 둘은 노인이고 세 번째는 중년이다. 이 상태에서 여자냐 남자냐는 중요하지 않다. 자비의 천사는 차별을 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때 고통받는 자들 중에 가장 자격이 있는 사람을 골라 선물을 주고 싶지만, 발각의 두려움 때문에 는 하나밖에 무릅쓸 수 없다. 앞으로도 저주받은 도시에서 야음을 틈타 은밀하게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자비의 천사는 가장 안쪽 침상의 환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래, 저 사람이야. 간호사 아그네스의 능숙한 손이 멍든 팔뚝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정맥주사액에 아넥타인을 주입한다.
자, G―D가 잊어버린 자비를 받아요. 모든 게 G―D의 창조물이건만, G―D에게는 이 지구에 넘쳐나는 사람들을 일일이 챙길 시간이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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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이 저주받은 도시의 환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된다. R―에게는 D―라는 애인이 있다. R―은 D―의 초연함, 그의 자의식을 높이 평가한다. R―은 D―가 의료계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죽음 자체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자기 죽음에 대해서는 그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D―는 녹슨 강가에 있는 오래된 병원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으며, 자신이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고 병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심지어 감기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걸 툭하면 자랑한다. R―은 D―의 허풍에 미소를 짓는다. R―은 남자라는 족속들에게는 그런 허풍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 R―은 그저 D―가 자신을 사랑해 주길, 그래서 D―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경우 R―이 처하게 될 운명에서 구원해 주길 말없이 기원한다.
R―이 저주받은 도시의 환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건 어처구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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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멀미.
그건 느닷없이 시작된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왜 그러는 거지?
흐물흐물한 살을 목욕시키고, 호흡기 분비물을 빨아내고, 더껑이 낀 입속의 붉은 살덩이를 씻어내다가. 빵 같은 질감으로 오그라든 채 고동치는 고깃덩어리. R―은 갑자기 멀미가 나면서 자기 내면의 뭔가가, 생체적이고 동물적인 자아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고기.” 그 축축하고 추한 말을 입 모양으로 그려본다. 고기, 질긴 섬유질. 몸뚱이를 이루는 살코기. 핏물이 배어 나오는 두툼한 살덩이. (날)고기 특유의 그 젖은 냄새. 입 안의 고기. 잇새에 끼는 고기 조각. 제 접시 위에 놓인 고기를 바라보던, 질퍽하게 씹어대는 D―의 입을 바라보던 R―은 멀미가 나면서 힘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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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1104호실 환자, 그 불쌍한 남자가 깨어나는 데만도 기적이 필요할 거라고 말한다. 하물며 그 이상의 것이야…
R―도 그런 이야기들을 듣지만 제 처지를 안다. R―은 선배들의 말에 토를 다는 되바라진 젊은 간호사가 아니며, 의사들의 소견에 의문을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이 든 간호사가 놀라서 바라보는 이런 말을, 그것도 타박하듯이 하지 않을 수 없다. “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날 수 있어요. 믿음이 있다면요. 로퍼 씨는 젊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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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은 젊다. 1976년생이니 이제 겨우 스물여섯 살이다.
저주받은 도시의 자재실 바닥에 타월과 침대보를 깔고 잠든 것처럼 평화롭게 몸을 구부린 아그네스 오드와이어의 차가운 시체가 발견되고 이 년 후에 태어난.
R―은 아그네스 오드와이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
R―은 아그네스 오드와이어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본 적이 없다.
R―은 소문이나 풍문 같은 걸 못 견뎌 한다. 미신도. 사람들이 자비의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곤혹스럽고 불편해서 옆으로 비켜난다. (눈을 반짝이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레게 머리를 한 자메이카 간호 보조사들만이 아니고 몇몇 나이 든 간호사들도 마찬가지다. R―은 화가 난다. 정식 자격증이 있는 간호사들이 고작 한다는 소리가!)
R―은 이 주(州)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마운트 세인트 조지프 간호학교의 1999년 졸업생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아그네스 오드와이어도 그 학교의 1949년 졸업생이었다. 세인트 조지프에서 아그네스 오드와이어라는 으스스한 이름은 절대, 농담으로라도 결코 거론되는 일이 없다.) R―은 여자 81명, 남자 8명 가운데 6등을 해서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아그네스 오드와이어는 전부 여학생인 66명 가운데 4등을 차지한 우등생이었다.) R―은 로마 가톨릭 신자가 아니고(아그네스 오드와이어는 그랬다고 한다) 스스로를 크리스천으로 여긴다. 그녀는 죄를 대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는다. 가족적인 삶, 미국이라는 나라, 간호사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등을 중시한다. 선의의 바보들이 왜 의대에 가지 않고 간호학교에 갔느냐고 물으면 R―은 속으로 부글부글 끓는다. 간호사의 삶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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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이 사랑하는 아버지. 인간으로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R―의 아버지. 저주받은 도시에서 익숙한 그 냄새를 아버지에게서 맡았을 때의 충격. 난 아버지를 더 사랑해야 해. 아버지를 구원하려면 그를 사랑해야 해.
마비된 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이 막히는 기침 발작이 그를 노엽게 한다. 그래도 먹을거리 앞에서는 누그러진다. R―의 아버지는 노년에 아이의 식성으로 돌아갔다. 단것, 아이스크림과 도넛과 잼을 바른 빵. 그리고 고기. 그를 사랑하는 딸 R―이 한입 크기로 잘라주는 고기.
“네 접시에 있는 그걸 먹어라.” 아버지는 느닷없이 말한다. “그 망할 고기를 먹어. 무슨 새로운 놀이라도 시작한 거냐? 채식 어쩌고 하는 그거? 똥 같은 소리.”
R―은 아버지의 달라진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거칠고 잔인한 농담. 평생 과묵한 남자로 어딘가 상처 입은 권위의 분위기를 풍겼던 아버지. 큼직하고 투박한 손을 가진 노동자. 그런데 이제 와서 이래라저래라 시시콜콜 간섭하며 사람을 기겁하게 만든다. 그는 R―이 어른이라는 걸, 업무 수행 능력이 뛰어난 간호사라는 걸 잊은 듯했다. R―의 무릎에 접시를 쏟을 듯이 거칠게 민다. R―은 애써 웃으며 장난으로 넘기려 한다. 하지만 두툼하게 썬 쇠고기 구이는 차마 먹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먹는 것만 봐도, 기름기 번지르르한 입술과 금수처럼 질겅질겅 씹어대는 이만 봐도 멀미가 쏠린다.
“네가 대단히 잘난 줄 아나 보지?” 노인은 경멸하듯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나이 때문이야. 병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더 사랑할 거야. 예전 모습 그대로인 것처럼 사랑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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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과 엉덩이가 딱 붙은 어른어른한 흰색 나일론 옷을 입고, 저주받은 도시에서 오랫동안 일하느라 발목이 부은 자비의 천사. 저주받은 도시에 청춘을 바친 자비의 천사. 이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야. 고통받는 자에게 평안함을 주는 일이야. 십 년 동안, 십 년 넘도록 어떤 남자도 키스하고 싶은 마음을 품지 않은 입술에서 뜨거운 숨을 내쉬는 자비의 천사. 어떤 날은 말을 이해하지 못해 애먹는다. 의사의 손 글씨, 신문과 책 들. (하지만 아그네스 오드와이어가 책을 읽은 적이 있던가?) 가끔은 뻑뻑한 혀가 제멋대로 움직여서 멀쩡히 잘 아는 말들까지 엉뚱하게 발음한다. 환자들의 이름을 외우는 건 일찌감치 그만두었다. 동료들도 혼동하기 일쑤다. 간호사나, 심지어 상근 의사들까지도 오래전에 은퇴해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으로 부른다. 자비의 천사 그녀는 고무 밑창 신발을 신고도 가끔 비틀거린다. 자비의 천사는 툭하면 딴생각을 하고 실수를 한다. 물건들을 떨어뜨리고 어디에다 두었는지 잊어버린다. 그러면서도 (누가 짐작이나 할까? 아그네스는 빙긋이 웃으며 생각한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대담하고 방만해졌다. 잡혀갈 의지가(바람이?) 있다는 듯이 를 기록하면서. 죽음이 임박하지 않거나 사망 선고를 받지 않은 환자들, 빈사 상태는커녕 비교적 건강한 환자들에게까지 자비를 행하면서… 나는 자비예요. 그녀는 희생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자비를 거부하지 마요.
세월이 흐르면서 아그네스의 솜씨는 완벽해졌다. 그녀는 죽음의 마법사가 됐다. 어쩌면 항상 자비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끔은 그녀의 손이 제멋대로 치사량의 근육 이완제, 모르핀을 주사했을지도 모른다. 심장에 기포를 일으키고. 베개를 능숙하게 활용하고. (문외한들은 이걸 모른다. 베개가 가장 효과적이며 발각 위험이 가장 적은 살인 도구라는 걸.)
그러고는 흙에서 뽑아낸 순무처럼 창백한 피부에 주근깨가 점점이 박혀 지저분한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본다. 이를 드러내고 겁에 질린 미소를 지어본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그녀는 얼굴 없는 고발자들을 남자로 상상한다. 그들은 흰색 나일론 간호사 복장을 한 아그네스 오드와이어를 뚫어져라 보고 또 보지만, 아그네스를 보면서도 그녀의 실체는 결코 보지 못한다.
20
1104호실 로퍼 씨의 몸을 씻는다. 마커스의 몸을 씻는다.
이 시간에 1인실로 누가 들어올 리 없지만, 그래도 R―은 침상 주변에 커튼을 친다. 축 늘어졌으면서도 이상하게 무거운 남자의 몸을 조심조심 스펀지로 닦는다. 털이 거칠거칠한 사타구니, 고무 꽁다리 같은 페니스, 고환. 이 남자(스물아홉 살밖에 안 된 젊은 남자)를 목욕시키다 보면 가끔 그의 페니스가 제 의지인 양 움직인다. 그녀가 보기에는 로퍼 씨의 호흡도 빨라지는 것 같다. 그는 갈망하는 듯이 부드럽게 신음을 내뱉는다… “로퍼 씨? 마커스.” R―은 주문처럼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목욕을 시키는 동안 마치 엄마가 아기를 어르듯이 그 이름을 몇 번이나 중얼거린다. R―은 그게 어떤 식으로든 제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찾아내려는 듯 “마커스 로퍼”라는 이름에 매혹된다.
심한 외상을 입은 이 환자는 어쩌다 한 번씩, 그리고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하찮으나마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는 조리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눈을 뜨고 초점은 없어도 (어쩌면) 빛과 얼굴을 인식한다. 왼쪽 눈동자는 하릴없이 헤매지만 오른쪽은 일단 눈만 뜨면 “시선”을 발산한다. R―은 이 기적이 일어났을 때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다. 그녀는 마커스 로퍼가 몇 번이나 자신과 의사소통을 시도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오해를 살까 봐 아무에게도, 로퍼의 신경외과 주치의에게도 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로퍼 씨? 나, 여기 있어요. 내가 당신 간호사예요. 내가 당신을 돌봐줄게요.” 그러고는 갑자기 수줍어하며 멈칫거린다. “당신을 사랑해요, 마커스.”
R―은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그렇게, 그 말을 해버렸다! 그녀는 그 말을 해버렸다.
고무장갑을 꼈는데도 과산화수소수 악취가 손에서 가시지 않는다. 고약한 최음제. 교대를 한 후 그 냄새를 맡으면서 그녀는 이 순간, 이 소중한 순간을 생각한다. 그를 생각한다.
아무렇게나 조각조각 피부를 이어 붙이고 화상을 입은 듯 흉이 진 얼굴, 쑥 들어간 눈과 상처 입은 입술에 R―은 몸을 숙여 입을 맞춘다. 소녀 같은 대담함, 환희에 휩싸여 입술을 문지른다. “마커스! 어쩌면 이렇게 차가울까. 하지만 따뜻해질 거예요. 곧 다시. 내가 약속할게요.”
* * *
한 주 한 주 지날 때마다 마커스 로퍼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줄어들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와서 보는 것. 그와의 의사소통은 거의, 어쩌면 전혀 없었다. R―은 로퍼의 가족, 그들의 힘들고 지친 얼굴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