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톨스토이에 이어 <타임캡슐 단편>에 소개되는 작가는 안톤 체호프입니다. ‘나비’는 제2회 퍼즐에서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의 여주인공 한나 슈미츠는 옛 애인 미하엘이 녹음해서 보내준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거기 녹음된 어떤 작가의 작품을 교도소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고 처음으로 ‘문자’를 깨칩니다.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그 작품입니다. - 편집자
1
바닷가 거리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드미뜨리 드미뜨리치 구로프도 얄따에서 지낸 지 벌써 2주일째라 이곳에 익숙해져서, 새로운 얼굴들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카페 베르나에 앉아 있다가 그는 창밖으로, 바닷가 거리를 지나가는 젊은 부인을 보았다. 키가 그리 크지 않은 금발의 여자로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뒤에는 하얀 스피츠가 따라가고 있었다.
이후로 그는 그 여자를 도시의 공원에서, 네거리 광장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났다. 그 여자는 혼자, 늘 같은 베레모를 쓰고 하얀 스피츠를 데리고 산책했다. 아무도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 그 여자를 단순히 이렇게 불렀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저 여자가 남편이나 친구와 함께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사귀어 보는 것도 괜찮을 텐데〉 하고 구로프는 생각했다.
그는 마흔이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 열두 살 난 딸 하나와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둘을 두었다. 그는 일찍, 대학교 2학년 때 결혼했는데, 지금 그의 아내는 그보다 1.5배는 더 늙어 보였다. 그의 아내는 키가 크고 뚱뚱하고 짙은 눈썹에, 직설적이고 거만하며 자신을 스스로 사려 깊은 여자라고 말했다. 그의 아내는 책을 많이 읽었으며, 유행하던 멋 부린 철자법에 따라, 남편을 드미뜨리가 아니라 지미뜨리라 불렀다. 그렇지만 그는 은근히 아내를 천박하고 속 좁으며 촌스럽다고 여기고 꺼려 해서 집에 있기를 싫어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바람을 피우기 시작해, 여러 여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여자들에 관해서라면 거의 언제나 나쁘게 말했고, 그가 있는 자리에서 여자들 이야기라도 나오면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저급한 인종!”
쓰디쓴 경험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여자들을 내키는 대로 불러도 된다고 여겼지만, 사실 그 〈저급한 인종〉이 없다면 그는 단 이틀도 살지 못할 것이다. 남자들만 있는 곳에서는 지루해했고, 기분도 나빠 말도 나누지 않고 냉담했지만, 여자들과 있을 때에는 자유로웠고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았다. 심지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여자들과 함께 있으면 편안했다. 그의 외모나 성격, 기질 전체에는 매력적이면서도 좀처럼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어, 그것이 여자들을 끌고 유혹했다. 그는 이 점을 알고 있을뿐더러, 그 또한 어떤 힘에 의해 여자들에게 이끌렸다.
잦은 경험, 정말로 쓰라린 경험을 자주 했기에 그는 이미, 모든 정사는 처음에는 생활에 유쾌한 변화를 가져다주고 부드럽고 산뜻한 모험으로 생각되지만, 점잖은 사람, 특히 속내를 잘 털어놓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모스끄비치(모스끄바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아주 복잡한 문제로 커져 곤혹스럽게 되어 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매력적인 여자와 새롭게 만날 때면 그 쓰라린 경험도 슬그머니 기억에서 사라져, 제대로 살고 싶어졌고, 모든 일이 정말이지 단순하고 유쾌하게 여겨졌다.
어느 해 질 무렵, 그가 노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베레모를 쓴 그 부인이 옆 테이블에 앉으려고 천천히 다가왔다. 표정, 걸음걸이, 의상, 머리 모양에서 그는 그 여자가 점잖은 신분으로, 남편이 있으며, 얄따에는 처음 그리고 혼자 왔고, 여기서 무료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 지역의 부정한 풍속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사실이 아니며, 할 수만 있다면 직접 저지르고 싶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들의 대부분을 지어낸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부인이 세 발짝쯤 떨어진 옆 테이블에 앉자, 손쉬운 승리니 산속의 유람이니 하는 것들이 생각나, 바로 그 신속하고 순간적인 관계에 대한, 이름도 성도 모르는 미지의 여인과 나누는 로맨스에 대한 유혹적인 상상이 불현듯 그를 사로잡았다.
그가 부드럽게 스피츠에게 손짓해, 그 개가 다가오자 손가락으로 얼렀다. 스피츠가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구로프가 다시 얼렀다.
부인이 그를 쳐다보고 곧 눈을 내리깔았다.
“물지는 않아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얼굴을 붉혔다.
“뼈를 줘도 될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친절하게 물었다. “얄따에 오신 지 오래되셨나요?”
“5일째예요.”
“나는 벌써 2주일째랍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간은 빠르죠, 그런데 여기는 정말 지루하군요!” 그녀가 그를 보지 않고 말했다.
“흔히들 이곳이 지루하다고 말하죠. 벨료프(러시아 중부 뚤라 근처의 작은 도시)나 지즈드라(러시아 중부 깔루가 근처의 작은 도시) 같은 곳에서는 전혀 지루한 줄 모르고 살던 사람도 이곳에 오면, 〈아, 지루해! 먼지투성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라나다(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유명한 관광 도시)에서 오기라도 한 듯이 말입니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둘 다 묵묵히, 낯선 사람들처럼 식사를 계속했다. 그렇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나란히 나왔다. 그리고, 어딜 가든 무얼 말하든 상관하지 않는 한가롭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농담 섞인 가벼운 대화가 시작됐다. 그들은 한가로이 거닐면서 묘한 바다의 빛깔에 대해 이야기했다. 무척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연보랏빛 바닷물 위로 달빛이 금색 선을 긋고 있었다. 그들은 뜨거운 낮이 지나도 여전히 무덥다고 이야기했다. 구로프는 자신이 모스끄비치이며, 인문학을 공부했으나 은행에서 일하고 있고, 한때 오페라 가수가 되려고 연습했으나 그만두었고, 모스끄바에 집 두 채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뻬쩨르부르그에서 자랐으며 지금은 결혼하여 2년째 S시에서 살고 있고, 얄따에는 앞으로 한 달쯤 더 머무를 거고, 역시 휴식이 필요한 그녀의 남편도 어쩌면 이곳에 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스스로도 우스워하며 자기 남편이 일하는 곳이 지방 관청인지 지방 의회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구로프는 그녀의 이름이 안나 세르게예브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후 자신의 호텔 방에 돌아온 그는 그녀를 떠올리며, 내일도 틀림없이 그녀와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침대에 누워 그는, 그녀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 그의 딸과 마찬가지로 여학생이어서 학교에 다녔을 일을 상상했다. 그녀가 웃을 때나 낯선 사람과 이야기할 때에 무척이나 수줍어하고 어색해하던 것을 상기했다. 분명히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녀가, 사람들이 뒤를 따라다니며 쳐다보고 그녀로서는 전혀 추측할 수 없는 은근한 목적을 가지고 말을 걸어오는 환경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늘고 연약한 목과 아름다운 회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여자에겐 어쩐지 애틋한 데가 있어.〉 이렇게 생각하고 잠이 들었다.
2
알고 지낸 지 1주일이 지났다. 휴일이었다. 방은 무더웠고, 거리에는 회오리바람이 불어 먼지가 일고 벗겨진 모자가 굴러다녔다. 하루 종일 목이 말라, 구로프는 자주 카페에 들러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 시럽을 탄 물이나 아이스크림을 권했다. 견디기 힘든 날이었다.
저녁이 되어 바람이 좀 잦아들자, 그들은 기선이 들어오는 것을 보기 위해 방파제로 나갔다. 부두는 꽃다발을 들고 누군가를 마중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세련된 얄따 사람들의 두 가지 특징, 중년의 부인들이 젊게 차려입고 장군들이 많은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파도가 심해 기선이 늦게, 해가 진 뒤에야 도착했다. 게다가 부두에 대기 위해 방향을 돌리는 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찾는 것처럼, 손잡이가 달린 안경으로 기선과 승객들을 바라보다가, 눈을 반짝이며 구로프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말이 많아져서 엉뚱한 질문들을 퍼붓고는 곧 무엇을 물었는지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혼잡한 사람들 속에서 손잡이가 달린 안경을 잃어버렸다.
법석대던 군중들이 흩어지고,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지고 바람도 완전히 잦아들었으나, 구로프와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아직 기선에서 내리지 않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그대로 서 있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제 구로프를 보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꽃향기를 맡고 있었다.
“저녁이 되니까 날씨가 좀 나아졌군요.” 그가 말했다.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요? 마차라도 탈까요?”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녀를 껴안고 입을 맞췄다. 물기 머금은 꽃향기가 그를 감쌌다. 그러다 누가 보고 있지 않나 해서 흠칫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신 방으로 갑시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빠르게 걸었다.
그녀의 호텔 방은 무더웠고, 그녀가 일본 상점에서 산 향수 냄새가 났다. 구로프는 새삼스레 그녀를 바라보며 〈이런 만남도 다 있군!〉 하고 생각했다. 그가 지닌 기억 속에는, 사랑 때문에 즐거워하고 비록 짧았을망정 행복했다며 그에게 고마워하는, 편안하고 선량한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사랑에 진실하지 않은 여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수다스럽고 가식적이며 히스테릭하고, 이건 사랑이나 열정이 아닌 고상한 무엇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이를테면 그의 아내와 같은 여자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삶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 내기 위해 탐욕스러운 표정과 집요한 욕구를 언뜻언뜻 드러내는, 두세 명의 매우 아름답지만 차가운 여자들에 대한 기억도 있는데, 그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변덕스럽고 분별력도 없으며 억지나 부리는 천박한 여자들이 되었다. 그 여자들에 대한 관심이 식자, 그들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역겹게 느껴졌고, 심지어 그들의 속옷을 장식하고 있는 레이스조차 비늘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 갑작스럽게 문을 두드릴 때 느끼는 그런 당혹스러움과 같은 서투른 감정, 미숙한 아이들의 수줍음과 어색함이 있을 뿐이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이 일을 꽤나 특별하고 심각하게 여기며, 마치 자신이 타락한 여자가 되어 버린 듯한 태도를 취해서, 그에게는 그것이 기이하고 어색해 보였다. 그녀는 낙담하고 풀이 죽은 표정으로, 얼굴 양옆으로 긴 머리카락을 애처롭게 늘어뜨린 채 우울한 생각에 잠겨 있어, 마치 옛 그림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처럼 보였다.
“잘못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더 이상 저를 존중하지 않겠죠.”
호텔 방의 테이블 위에는 수박이 놓여 있었다. 구로프는 한 조각을 잘라서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반 시간 이상이 지났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애처로워 보였고, 그녀에게서 착실하고 순진하며 세상일에 닳지 않은 여인의 순결함이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서 외로이 타오르는 촛불이 희미하게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무거워 보였다.
“내가 당신을 존중하지 않게 되다니요?” 구로프가 물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하느님, 저를 용서하세요!”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그녀가 말했다. “무서워요.”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무엇으로 변명하겠어요? 저는 천하고 나쁜 여자인걸요. 저 자신을 경멸하는데 뭘 변명하겠어요. 저는 남편이 아니라 저 자신을 배반한 거예요. 지금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그랬죠. 제 남편, 그래요,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이죠, 하지만 노예인걸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저는 몰라요. 하지만 그 사람이 노예 같은 사람이라는 것만은 알죠. 그 사람하고 결혼할 때 저는 스무 살이었어요. 저는 호기심이 강했고 더 나은 뭔가를 바랐죠. 그래, 다른 삶이 있을 거야 하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죠. 제대로 살아 보고 싶었어요! 제대로, 제대로… 호기심이 저를 괴롭혔어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시겠죠, 하지만, 맹세코, 저는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 같아, 어떻게 할 수 없어, 남편에게 아프다고 말하고 이곳에 온 거예요… 여기서 정신없이 미친 듯 걸어 다녔죠… 보세요, 저는 저속하고 타락한 여자가 돼버렸어요. 누구나 경멸해도 되는 그런 여자가.”
구로프는 이내 듣는 일이 지루해졌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갑작스러운 참회, 그리고 그 순진한 말투가 그를 짜증나게 했다. 눈에 눈물이 괴어 있지 않았다면, 그녀가 실없는 소리를 하거나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신이 뭘 바라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매달렸다.
“믿어 주세요, 저를 믿어 주세요, 제발…”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저는 정직하고 깨끗한 생활이 좋아요. 타락은 정말 싫어요.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저 자신도 모르겠어요. 귀신에 홀렸다는 말이 있죠. 제가 지금 그래요, 귀신에게 홀렸어요.”
“그만, 그만 됐어…” 그가 웅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움직이지 않는, 겁에 질린 눈동자를 바라보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로 달랬다. 그녀는 점차 평정을 되찾더니 다시 쾌활해졌다. 두 사람은 함께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잠시 뒤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바닷가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사이프러스가 우거진 번화가는 죽은 듯 조용했으며, 바다에서는 여전히 파도치는 소리가 났다. 고깃배 한 척이 물결에 흔들리고, 그 위에서 작은 등불이 졸린 듯 깜박거렸다. 그들은 마차를 찾아 타고 오레안다(얄따에서 6.4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짜르의 여름 휴양지)로 향했다.
“나는 조금 전 아래층 로비에서 당신의 성을 알았소. 흑판에 폰 디데리츠라 써 있더군. 남편이 독일 사람이오?” 구로프가 말했다.
“아뇨, 그 사람 할아버지가 아마 독일인이었을 거예요. 그 사람은 정교도예요.”
오레안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교회당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벤치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새벽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얄따가 보이고, 산 정상에는 흰구름이 걸려 있었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매미들이 울고 있었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공허한 바닷소리가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영원한 잠, 평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래에서는 바닷소리가, 이곳에 아직 얄따도 오레안다도 없었던 때에도 울렸고, 지금도 울리고 있고, 우리가 없어진 후에도 똑같이 무심하고 공허하게 울릴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 변화 없음에, 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에, 우리의 영원한 구원에 관한, 지상의 끊임없는 삶의 움직임에 관한, 완성을 향한 부단한 움직임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바다와 산과 구름과 넓은 하늘이 펼치는 신비로운 풍경 속에서 여명을 받아 더욱 아름답고 편안하고 매혹적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와 나란히 앉아, 구로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자신의 인간적 가치도 잊은 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아마도 야경꾼인 듯한 어떤 사람이 다가와 그들을 잠시 쳐다보고는 사라졌다. 이 사소한 일도 신비롭고 아름답게 여겨졌다. 아침 빛이 밝아 이미 불을 끈, 페오도시야(끄림 반도 남쪽의 작은 항구)에서 온 기선이 보였다.
“풀에 아침 이슬이 맺혔네요.” 침묵을 깨며 그녀가 말했다.
“이제 그만 갑시다.”
그들은 얄따로 돌아왔다.
이후 그들은 매일 한낮에 바닷가 거리에서 만나, 함께 가볍게 점심을 먹고 저녁 식사도 했으며, 산책을 하거나 황홀하게 바다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녀는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느니 심장이 몹시 뛴다느니 하며 불평을 늘어놓거나, 때로는 질투심에, 때로는 걱정에 젖어 그가 자기를 정말로 존중하지 않는 것 아니냐며 언제나 같은 질문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는 가로수 길에서나 공원에서 근처에 사람이 없을 때면 자주,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고 열정적으로 키스했다. 누가 보고 있지는 않나 하는 조바심 속에서 나누는 대낮의 키스, 더위, 바다 냄새, 언제나 눈앞에서 지나다니는 세련되고 포만감에 젖어 있는 한가한 사람들, 그런 가운데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생활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 듯했다. 그는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말하며, 정열에 젖어 그녀로부터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곧잘 생각에 잠겨, 그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조금도 사랑하지 않으며 천박한 여자로 여기지 않는지 고백하라고 졸라 댔다. 거의 매일 저녁 늦은 시간에 그들은 마차를 타고 도시 밖으로, 오레안다로 혹은 폭포가 있는 곳으로 나갔다. 이런 짧은 여행은 언제나 아름답고 장엄한 인상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그녀의 남편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으로부터, 눈병을 심하게 앓고 있으며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편지가 왔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잘됐어요, 저는 떠나야 돼요.” 그녀가 구로프에게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요.”
그녀는 마차를 타고 역으로 출발했고, 그가 그녀를 배웅했다. 역까지는 거의 하루가 걸렸다. 급행열차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출발을 알리는 두 번째 벨이 울렸을 때, 그녀가 말했다.
“한 번만 더 당신의 얼굴을 볼게요… 한 번만 더. 네, 그렇게…”
그녀는 울지 않았으나 마치 아픈 사람처럼 우울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떨렸다.
“당신을 생각하게 될 거예요…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잘 지내시길 빌겠어요. 제가 좋은 기억으로 남기 바라요.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는군요. 하기야 그래야 하겠죠, 다시 만나서는 안 되니까. 그럼 안녕히 계세요.”
기차는 빠르게 떠났고, 그 불빛도 곧 사라졌다. 잠시 뒤에는 기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달콤한 몰두, 이 혼란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라고 모든 것이 일부러 꾸며진 듯했다. 플랫폼에 홀로 남아 어둠 속을 응시하던 구로프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전선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듣자, 잠에서 막 깨어난 듯했다. 자신의 인생에 또 하나의 진기한 사건이 있었고, 그것도 이미 끝나 이제는 추억으로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음이 흔들리고 쓸쓸했으며 가벼운 후회를 했다. 그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이 젊은 여인은 그와 함께 있을 때 진정으로 행복하지 못했다. 그가 그녀에게 친절했고 또 애정을 보였지만, 그래도 그의 태도에는, 그의 목소리와 애무에는, 행운을 잡은 거의 두 배나 나이가 많은 사내의 가벼운 조소와 거친 오만의 그림자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늘 그를 선량하고 특별하며 고상하다고 말했으니, 분명히 그는 그녀에게 본래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중에 그녀를 속인 셈이다…
이제 정거장에서는 가을 냄새가 났고, 밤은 쌀쌀했다.
〈나도 북부로 돌아갈 때가 됐군.〉 구로프는 플랫폼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돌아갈 때가 됐어!〉
3
모스끄바의 집은 이미 겨울 채비를 해서 난로를 땠고, 아이들이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차를 마시는 아침이면 아직 어두워서 유모가 잠깐씩 불을 밝혀야 했다. 이미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첫눈이 내려 썰매를 처음 타는 날에는 하얀 땅과 지붕을 바라보는 일이 즐겁고, 숨 쉬는 것도 상쾌하고 달콤하다. 이런 때가 되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서리를 맞아 하얗게 된 푸근한 모습의 보리수나무와 자작나무 고목은 사이프러스나 종려나무보다 더 친근해, 그 옆에 있으면 산과 바다가 생각나지 않는다.
구로프는 모스끄바 출신이다. 기분 좋게 추운 날 모스끄바에 돌아온 그가 털외투를 입고 따뜻한 장갑을 끼고 뻬뜨로프까(모스끄바 중심의 번화가)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토요일 저녁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얼마 전의 여행과 그가 머물렀던 장소들에 대한 매력이 사라졌다. 점차 그는 모스끄바 생활에 젖어들어, 하루에 세 종류의 신문을 탐욕스럽게 읽으면서도 모스끄바 신문은 보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이제 그는 레스토랑, 클럽, 초대 만찬, 기념식에 마음이 끌렸고, 자기 집에 유명한 변호사들과 예술가들이 방문한다거나 의사 클럽에서 교수와 카드 친다는 걸 은근히 우쭐거리고 다녔다. 이제 접시에 가득한 훈제 고기와 양배추도 먹어 치우게 되었다…
한 달쯤 지나면 안나 세르게예브나도 기억에서 희미해져 아주 가끔, 다른 사람들처럼 측은한 미소를 띠고 꿈속에나 나타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 달도 더 지났고 겨울도 깊었건만, 기억 속에서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마치 어제 헤어진 것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기억은 더 생생해져 갔다. 그의 서재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저녁의 정적을 가르고 들릴 때면, 레스토랑에서 노래나 오르간 연주를 들을 때면, 벽난로에서 눈보라 치는 소리가 윙윙거릴 때면, 기억 속에서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방파제에 갔던 일과 새벽 안개 속의 산과 페오도시야에서 온 기선과 입맞춤이. 그는 한참이나 방 안을 서성거리며 그때를 떠올리고 미소 짓곤 했는데, 그러다 회상은 공상으로 바뀌어, 과거의 일이 상상 속에서 미래의 일로 혼동되곤 하였다.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꿈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림자처럼 어디든 그를 따라다녔고 사로잡았다. 눈을 감으면 그녀가 생생하게 보였다. 이전보다 더 아름다웠고 젊었으며 사랑스러웠다. 그 자신도 얄따에 머물 때보다 멋진 듯했다. 그녀는 밤마다 책장에서 벽난로에서 방 안 한구석에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그녀의 숨소리와 부드러운 옷자락 소리를 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여자들을 쳐다보며 그녀를 닮은 여자가 없나 찾곤 하였다…
그러다 견딜 수 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추억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집에서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집 밖에는 그럴 상대가 없었다. 이웃 주민들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은행에 그럴 만한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말한단 말인가? 과연 그가 그때 사랑을 했던가? 과연 그와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관계에 뭔가 아름다운 것, 시적인 것, 아니면 유익하거나 순수하게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있기나 한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막연하게 사랑과 여자에 관해서 이야기했지만, 누구도 그 속뜻을 알아채지 못했고, 그의 아내만이 짙은 눈썹을 실룩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지미뜨리, 당신에게는 멋쟁이 역할이 어울리지 않아요.”
어느 날 밤, 의사 클럽에서 카드놀이를 함께했던 관리와 밖으로 나오면서 그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시겠어요, 나는 얄따에서 아주 매력적인 여성과 사귀었단 말입니다.”
관리는 썰매를 타고 출발하다 갑자기 뒤돌아보며 이름을 불렀다.
“드미뜨리 드미뜨리치!”
“네?”
“조금 전 당신이 한 말이 옳았소. 그 철갑상어는 냄새가 아주 고약했어.”
평소에 하던 이 평범한 말이 어쩐지 갑자기 구로프를 짜증나게 했다. 이 말이 모욕적이고 불결하게 여겨졌다. 얼마나 야만적인 습관들이며 야만적인 사람들인가! 정말 의미 없는 매일 밤이고, 흥미도 가치도 없는 나날들이다! 미친 듯한 카드놀이, 폭식, 폭음, 끝없이 이어지는 시시한 이야기들. 쓸데없는 일과 시시한 대화로 좋은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고 결국 남는 것은 꼬리도 날개도 잘린 삶, 실없는 농담뿐이다. 정신 병원이나 감옥에 갇힌 듯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그날 밤 구로프는 화가 나 한숨도 못 잤고, 다음 날 하루 종일 머리가 아팠다. 이어지는 밤마다 그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침대에 걸터앉아서 생각에 잠기거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아이들도 귀찮았고, 은행일도 귀찮았고,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12월의 휴가가 주어지자 그는 여행을 준비했다. 아내에게는 한 청년의 취직 자리 때문에 뻬쩨르부르그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S시로 떠났다. 무슨 일 때문에? 그 자신도 잘 몰랐다. 그저 안나 세르게예브나를 보고 싶었고, 가능하면 만나 이야기하고 싶었다.
오전에 S시에 도착한 그는 호텔의 가장 좋은 방에 들었다. 바닥에는 회색의 군복 천이 깔려 있었고, 탁자에는 잉크스탠드가 먼지로 인해 회색 빛을 띤 채 놓여 있었다. 잉크스탠드에 장식된 말 탄 기수의 상(像)은 목이 떨어져 나간 채 모자를 든 손을 치켜들고 있었다. 호텔 수위가 그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폰 디데리츠는 호텔에서 멀지 않은 구(舊) 곤차르나야 거리의 자기 저택에서 부유하고 호화롭게 살고 있으며, 자기 소유의 마차를 가지고 있고, 이 도시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호텔 수위는 그 사람 이름을 이렇게 발음했다. 드리디리츠.
구로프는 서두르지 않고 구 곤차르나야 거리로 나가 집을 찾았다. 집 바로 앞에 못질을 한 회색의 긴 울타리가 펼쳐져 있었다.
〈이런 울타리는 쉽게 넘어갈 수 있겠군〉 하고 생각하며 구로프는 울타리와 창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오늘은 휴일이니까 남편이 아마도 집에 있을 거다. 어쨌거나 집으로 들어가 그녀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메모를 보냈는데 혹시 남편 손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허사가 된다. 가장 좋은 것은 우연히 만나는 거다. 그리고 그는 울타리 근처 거리에서 서성대며 만남을 기다렸다. 그러다 걸인 한 명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고 개들이 덤벼드는 것을 보았다. 한 시간쯤 뒤에는 피아노 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마도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치는 것일 거다.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더니 한 노파가 나오고 그 뒤를 따라 낯익은 하얀 스피츠가 뛰어나왔다. 구로프는 개를 부르고 싶었으나, 갑자기 심장이 뛰고 흥분하여 그만 그 개 이름을 잊어버렸다.
계속 서성거리고 있으려니 점차 회색 울타리가 싫어졌다. 그리고 초조해져, 어쩌면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이미 그를 잊고 다른 사람과 즐겁게 지내고 있으며, 이런 기분 나쁜 울타리를 아침부터 밤까지 보고 살 수밖에 없는 젊은 여자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호텔 방으로 돌아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오랫동안 소파에 앉아 있다가 식사를 하고 잠이 들었다.
〈이런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 잠에서 깨어나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벌써 저녁이 되었다. 〈어쩌자고 이렇게 잔 거야. 이 밤중에 뭘 어쩌자는 거야?〉
병원에서나 볼 수 있는 회색의 싸구려 모포가 덮인 침대에 걸터앉아 그는 자신에게 짜증을 냈다.
〈이렇게 해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만나겠다고… 이렇게 해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정말 딱하구나.〉
이날 아침에 역에서 『게이샤』(The Geisha(1896), 시드니 존스의 뮤지컬 작품)의 초연을 알리는, 매우 커다란 글씨로 된 포스터가 그의 눈에 띄었다. 이것이 생각나자 그는 곧장 극장으로 갔다.
〈그녀가 초연을 보러 올 가능성은 매우 높아〉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극장은 초만원이었다. 지방 극장이라면 어디나 그렇듯이, 샹들리에 위로 연기가 자욱했고 2층 객석은 소란스러웠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지방의 멋쟁이들이 뒷짐을 지고 첫 번째 열에 서 있었다. 현 지사의 지정 박스 앞자리에는 지사의 딸이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 앉아 있었고, 지사 자신은 두꺼운 커튼 뒤에 정중하게 앉아 있어 손만 보였다. 막이 흔들리고, 오케스트라는 한참이나 조율했다. 관객들이 들어와 자리에 앉는 시간 내내 구로프는 열심히 둘러보았다.
이때 한 여자가 객석에 들어왔는데 안나 세르게예브나였다. 그녀는 세 번째 열에 앉았다. 그녀를 본 순간, 구로프의 심장은 터질 듯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그녀보다 이 세상에서 더 가깝고 소중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시골의 군중 속에 묻혀 있는 이 조그만 여인, 손잡이가 달린 평범한 오페라글라스를 손에 들고 있는, 전혀 두드러지지 않는 그녀가 지금 그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고, 그의 슬픔이고 기쁨이며, 이 순간 그 자신이 원하는 유일한 행복이었다. 보잘것없는 오케스트라와 이류 바이올린 주자가 연주하는 소리 속에서 그는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했다.
한 젊은 남자가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함께 들어와 나란히 앉았다. 짧은 구레나룻을 기르고 매우 키가 크고 등이 굽은 남자였다. 그는 걸을 때마다 줄곧 절이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얄따에서 흥분하며 노예와 같다고 말한 남편이 틀림없을 것이다. 사실 그 남자의 긴 얼굴, 구레나룻, 조금 벗겨진 이마에는 노예 같은 비굴함이 담겨 있었으므로 구로프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 남자의 단춧구멍에서는 학위 배지 같은 것이 웨이터의 번호표처럼 빛나고 있었다.
첫 번째 막간 휴식 시간에 남편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서, 그녀는 혼자 좌석에 앉아 있었다. 같은 아래층에 자리를 잡았던 구로프가 그녀에게 다가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셨습니까.”
그를 쳐다본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시 한 번, 눈을 못 믿겠다는 듯이 두려움에 떨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기절이라도 할까 봐 두 손으로 부채와 오페라글라스를 꽉 쥐었다.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그녀는 앉아 있었고, 그는 서 있었다.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에 놀란 그가 미처 옆자리에 앉을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바이올린과 플루트가 조율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주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흠칫 놀랐다. 바로 그때, 그녀가 일어나 빠르게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공연히 복도와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그들의 눈앞으로 법관 복장을 한 사람들, 교사 복장을 한 사람들, 공무원 복장을 한 사람들이 스쳐 지나쳤다. 그들은 모두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부인들과 걸어 놓은 모피 외투들이 스쳐 지나쳤다. 스며든 바람에 담배 냄새가 퍼졌다. 심장이 심하게 뛰면서 구로프는 생각했다.
〈오, 하느님! 이 사람들, 이 오케스트라는 대체 왜…〉
그 순간 갑자기, 그날 저녁 역에서 안나 세르게예브나를 배웅했을 때, 그녀가 〈모든 것이 끝났다, 우리는 다시 만나서는 안 된다〉 하고 자신에게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다!
〈측면 좌석 입구〉라고 쓰인 좁고 어두운 계단에서 그녀가 멈춰 섰다.
“당신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여전히 창백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힘겹게 숨을 내쉬며 그녀가 말했다. “오, 당신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죽는 줄 알았어요. 대체 왜 오신 거죠? 왜?”
“이해해 주시오, 안나, 이해해 주시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서둘러 말했다. “제발, 이해해 주시오…”
그녀는 그를 두려움과 애원과 사랑이 뒤섞인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모습을 더 확실히 기억하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는 정말 괴로워요!”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말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을 생각했어요. 당신 생각으로 살았어요. 그렇지만 잊으려, 잊으려 했는데, 도대체 왜, 왜 오셨어요?”
위쪽 층계참에서 두 명의 학생이 담배를 피우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구로프는 신경도 안 쓰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를 끌어당겨 그녀의 얼굴에, 볼에, 손에 입 맞추기 시작했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그를 밀쳐 내면서 그녀가 두려움에 휩싸여 말했다. “우리는 둘 다 미쳤어요. 오늘 당장 떠나세요, 지금 떠나세요… 당신에게 간절히 부탁드리는 거예요, 간절히… 사람들이 와요!”
계단 아래서 누군가 올라왔다.
“떠나셔야 해요…”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작은 소리로 계속했다. “아시겠어요, 드미뜨리 드미뜨리치? 제가 모스끄바로 당신을 찾아갈게요. 저는 행복했던 적이 없어요, 지금도 불행하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행복하지 못할 거예요, 절대로!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맹세해요, 제가 모스끄바로 가겠어요. 그러니 지금은 헤어져요! 저에게 소중한, 사랑하는 당신, 지금은 헤어져요!”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나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계속 뒤를 돌아보면서. 그녀의 눈에서 정말 그녀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로프는 잠시 서 있다가, 주위가 조용해진 후 자신의 외투를 찾아 들고 극장을 떠났다.
4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모스끄바로 그를 찾아왔다. 두세 달에 한 번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의 부인병 때문에 대학 병원에 간다면서 S시를 떠났다. 남편은 반신반의했다. 모스끄바에 도착하면 〈슬라뱐스끼 바자르〉에 묵으며 곧장 구로프에게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을 보냈다. 그러면 구로프가 그녀를 만나러 갔다. 모스끄바에서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겨울 아침에도, 그는 그녀에게 가고 있었다(심부름꾼이 전날 저녁에 왔으나 그때 그는 없었다). 도중에 있는 학교까지 바래다주려고 딸과 함께 갔다. 습기를 머금은 눈이 펑펑 쏟아졌다.
“지금 기온은 3도인데, 그래도 눈이 내리는구나.” 구로프가 딸에게 말했다. “하지만 따뜻한 건 땅의 표면이지, 대기의 상층에서는 기온이 전혀 다르단다.”
“아빠, 그럼 왜 겨울에 천둥이 치지 않아요?”
그것도 설명해 주었다. 그는 말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아마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에게는 두 개의 생활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그런 공개된, 상대적 진실과 상대적 거짓으로 가득 찬, 주위 사람들의 삶과 아주 닮은 그런 생활이다. 다른 하나는 은밀하게 흘러가는 생활이다. 우연히 이상하게 얽힌 어떤 사정에 의해 그에게 소중하고 흥미로우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그 속에서라면 그가 진실하고 또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는, 그의 생활의 핵심을 차지하는 그런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없다. 반면에 진실을 숨기기 위해 자신을 감추는 그의 가식, 껍데기인 모든 것, 이를테면 은행에서의 일, 클럽에서의 토론, 그의 〈저급한 인종〉인 아내와 함께 가는 기념식, 이런 모든 것은 공개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경우처럼 남들을 판단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았고, 누구나 밤의 덮개 같은 비밀 아래서 자신만의 가장 흥미로운 진짜 생활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각자 개인의 생활은 비밀 속에서 유지되며,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그런 이유 때문에 교양 있는 사람들이 그토록 예민하게 사생활의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지도 몰랐다.
딸을 학교까지 바래다준 구로프는 슬라뱐스끼 바자르로 향했다. 그는 아래층에서 털외투를 벗고, 위층으로 올라가 조용히 노크했다. 그가 좋아하는 회색 옷을 입은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여행과 걱정에 지친 채, 어제 저녁부터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백한 그녀는 그를 보면서도 미소조차 짓지 못했지만, 곧장 그의 가슴에 안겼다. 2년이나 못 만난 것처럼 그들의 키스는 길고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어떻게 지냈소?” 그가 물었다. “별일은 없고?”
“잠깐만요, 말씀드릴게요… 잠깐만요.”
그녀는 우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몸을 돌려 손수건으로 눈을 가렸다.
〈울게 내버려 둬야지, 앉아서 기다리면 돼.〉 그렇게 생각한 그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그는 벨을 눌러 차를 주문했다. 그가 차를 마시는 동안, 그녀는 창문을 향해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생활이 서글프게 되었다는 비참한 생각에 감정이 격해져 운 것이다. 그들은 몰래, 마치 도둑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만 만날 수 있다. 어찌 그들의 생활이 파괴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그만!” 그가 말했다.
그는 그들의 이 사랑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끝이 언제일지 알 수 없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그에게 점점 더 애착을 갖고 그를 열렬히 사랑했기에,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이 언젠가 끝나게 될 거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한다 해도 그녀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기분을 바꿔 줄 생각으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머리가 이미 세기 시작했다. 최근 갑자기 더 나이 들어 보이고 추해진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손을 얹어 놓은 그녀의 따뜻한 어깨가 떨고 있었다. 아직은 무척 따뜻하고 아름답지만, 분명히 곧 자신의 삶처럼 시들고 바래질 이 생명에 그는 연민을 느꼈다. 도대체 왜 그녀는 그를 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는 언제나 여자들에게 본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이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평생 간절히 원하던 그런 사람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이런 실수를 알아차리고도 그들은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그로 인해 행복하지 않았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는 사귀고 가까워지고 헤어졌지만, 한 번도 사랑한 적은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랑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머리가 세기 시작한 지금, 그는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그는 아주 가깝고 친밀한 사람처럼, 남편과 아내처럼, 절친한 친구처럼 서로를 사랑했다. 그들은 서로를 운명이 맺어 준 상대로 여겼다. 그가 왜 결혼을 했고, 그녀가 왜 결혼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두 마리의 암수 철새가 잡혀 각기 다른 새장에서 길러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과거의 부끄러웠던 일들,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서로 용서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자신들을 바꿔 놓았음을 느꼈다.
예전에 그는 슬플 때면, 머리에 떠오르는 온갖 논리로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이제는 논리를 따지지 않고 깊이 공감한다. 진실하고 솔직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만 울어요, 내 사랑.” 그가 말했다. “그만 됐어요… 이제 얘기 좀 합시다, 뭐든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남의 눈을 피해야 하고 속여야 하며 서로 다른 도시에서 살며 자주 만날 수 없는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어떻게 하면 이 견딜 수 없는 굴레에서 벗어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는 머리를 감싸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으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때는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될 거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그 끝이 아직 멀고 멀어, 이제야 겨우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시작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서 전재. (안톤 체호프, 열린책들, 2004)
--------------------------
작가 소개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
1860년 러시아 남부 아조프 해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농노 출신 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료품 잡화점이 파산하면서 가족들 모두 모스크바의 빈민가로 이주하였고, 이후 그는 홀로 타간로크에 남아 고학하며 중등학교를 졸업했다.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한 뒤 의사가 되기까지 생계를 위해 필명으로 유머 단편들을 썼으며, 1886년에 처음으로 「추도회」라는 작품을 본명으로 발표하였다. 2년 뒤 단편집 『황혼』이 푸쉬킨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그는 「귀여운 여인」으로 톨스토이의 절찬을 받았고, 차이코프스키, 고르키 등과 교유(交遊)하며 러시아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단편 「대초원」, 「나비」, 「이웃사람들」, 「익명의 소설」, 「흑의의 수도승」, 「살인자」, 「아리아드네」, 「농부들」등이 있으며, 희곡 「이바노프」, 「바냐 아저씨」, 「곰」, 「청혼」, 「결혼」, 「기념일」, 「갈매기」, 「세 자매」, 「벚꽃 동산」 등이 있다.
--------
역자 소개
오종우
성균관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 저서로 『체호프 드라마의 웃음세계』, 『대지의 숨 ― 러시아의 숨표들』이 있고, 역서로 『러시아 희곡』 (전 2권, 공역)과 『영화의 형식과 기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