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시에 사는 언니가 시골에 사는 여동생을 찾아왔다.
언니는 상인에게 시집을 가서 도시에서 살았고 여동생은 농가에 시집을 갔던 것이다. 두 자매는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언니가 자기의 도시생활을 뽐내어 자랑하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 집에 살고 있는가, 아이들을 얼마나 잘 차려 입혀 놓았는가, 얼마나 맛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있는가, 얼마나 자주 마차를 타고 놀러 다니며 극장 구경을 하는가 등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동생도 분한 생각이 들어서 상인의 생활을 깎아 내리고 자기네 농가 생활을 추어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생활을 언니의 생활과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하기야 우리 집 생활이 화려하지는 못해요. 하지만 그 대신 걱정이란 게 없거든요. 언니네 생활이 호사스럽기는 하고 떼돈을 벌기도 하지만 또 언제 빈털터리가 될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속담에 ‘손해는 이득의 형님’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또 이런 말도 있지요. ‘오늘의 부자도 내일이면 남의 집 처마 밑에 서게 된다’고. 거기다 대면 우리네 농사일은 탄탄하단 말예요. 농사꾼 생활이 굵지는 못해도 오래는 가거든요. 부자는 못 되더라도 배고픈 일은 없으니까요.”
그러자 언니가 대꾸를 했다.
“배만 고프지 않으면 뭘 해. 돼지나 송아지와 함께 사는 주제에! 그렇다고 좋은 옷을 입어, 좋은 교제를 해? 네 남편이 아무리 억척같이 벌어 봐야 결국 거름 속에서 살다가 거름 속에서 죽지 뭐니? 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지.”
“그게 어떻다는 거예요?”
동생은 말했다.
“그게 우리들의 일인 걸요. 그 대신 우리네 생활에 위험이라는 건 조금도 없거든요. 누구한테 머리 숙일 필요도 없고, 누굴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말예요. 하지만 언니 사는 도시에선 온통 유혹 속에서 사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오늘은 무사하더라도 내일이면 어떤 악마에게 홀릴지 모르니까요. 형부만 하더라도 그렇지, 언제 노름에 미칠지 술에 빠질지 알 게 뭐예요. 그리고 그렇게 되는 날에는 모든 게 끝장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동생의 남편인 바홈은 벽난로 곁에서 여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말이 옳아” 하고 그는 말했다.
“옳은 얘기야. 우리야 어릴 때부터 땅을 파먹고 살아왔으니 어리석은 생각은 할 수가 없지. 곤란한 건 단 한 가지 땅이 부족한 점뿐이지. 여기다 땅만 여유가 있으면 난 겁날 게 없어. 악마도 무섭지 않아.”
여자들은 차를 다 마신 뒤에도 한참 동안 옷 이야기를 하다가 찻잔과 접시를 치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악마 하나가 난로 뒤에 웅크리고 앉아 이 말을 죄다 듣고 있었다. 악마는 농부가 마누라의 이야기에 말려들어 자기에게 땅만 있으면 악마도 무섭지 않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됐어’ 하고 악마는 생각했다. ‘어디 너와 한 번 승부를 겨루어 보자. 내가 너에게 땅을 듬뿍 주지. 땅으로 너를 사로잡아야지.’
2
마을에, 그다지 큰 땅은 소유하지 않았으나 한 여자 지주가 살고 있었다. 여지주는 120데샤치나(헥타르)쯤 되는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여주인은 이제까지 농민들과 사이좋게 지내 왔고, 농민들을 학대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 군인 출신 남자가 관리인으로 고용되고 난 뒤부터는 그자가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벌금을 받아내어 농민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바홈이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말이 지주네 귀리 밭으로 뛰어든다든가, 암소가 지주집 마당으로 들어간다든가, 송아지가 목초지로 들어간다든가 하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어서 그럴 때마다 일일이 벌금을 물게 되었다.
벌금을 물게 될 때마다 바홈은 집안 식구들을 욕하고 때리곤 했다. 이 관리인 때문에 바홈은 여름 동안 무척이나 죄를 지었다. 그래서 가축들을 우리에 들여놓을 계절이 되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을 정도였다. 사료는 아까웠지만 걱정거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겨울 동안, 여지주가 땅을 팔려고 한다느니 여관집 주인이 도로변의 땅을 사려 한다느니 하는 소문이 떠돌았다. 농민들은 그 말을 듣자 탄식을 했다. 이 일을 어쩌나, 하고 그들은 생각했다.
‘만일 여관집 주인이 땅을 사게 되면 그자는 여지주네보다 더 지독한 벌금을 매길 게 틀림없어. 그러나 우리는 이 땅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지. 우리는 모두 여지주네 소유지 둘레에서 살고들 있으니.’
사람들은 한무리를 지어 여지주를 찾아가서 땅을 여관집 주인에게 팔지 말고 자기들에게 양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꼭 여관집 주인보다 비싼 값으로 사겠다고 약속했다. 여지주는 승낙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조합에서 땅을 모두 사들일 준비를 하고 여러 번 모임을 가졌으나 의논이 성립되지 않았다. 악마가 훼방을 놓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의견을 모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형편대로 따로따로 사기로 했다. 여지주도 이에 동의했다. 바홈은 이웃집 사람이 20데샤치나를 샀는데, 여지주가 반액만 받고 나머지는 1년 안에 갚으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바홈은 그것이 부러웠다. ‘다들 땅을 다 사버리면 나는 아무것도 없게 되잖아.’ 그래서 바홈은 아내와 의논을 했다.
“다들 땅을 사는데 우리도 10데샤치나쯤은 사야하지 않겠소. 그러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단 말이야. 관리인 녀석이 물리는 벌금 때문에 살 수가 없어.”
두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를 의논했다. 그들에게는 저금이 100루블 있었다. 그래서 송아지 한 마리와 벌꿀을 반 팔아 선금을 받고, 아들을 머슴살이 보내고, 동서에게 빚을 내어 겨우 땅값의 반을 모았다.
그런 다음 바홈은 조그만 숲이 있는 15데샤치나의 땅을 봐 놓고 여지주를 찾아갔다. 15데샤치나의 가격을 흥정하자 계약금을 치렀다. 그리고 읍에 나가 매매 수속을 끝냈는데, 돈은 반액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2년 안에 치르기로 했다.
이래서 바홈은 땅 임자가 되었다. 바홈은 씨앗을 빌려서, 사들인 땅에다 농사를 지었다. 농사는 잘 되었다. 1년 만에 그는 여지주에게도 동서에게도 빚을 갚아 버렸다. 바홈은 마침내 진짜 지주가 되었다. 자기 땅을 경작해서 씨를 뿌리고, 자기 땅에서 꼴을 베고, 자기 땅에서 땔감을 베어 대고, 자기 땅에서 가축을 길렀다.
바홈은 영원히 자기 소유가 된 밭을 갈러 나가거나, 경작물의 상태나 목초지의 상태를 돌아보러 나갈 때마다 가슴이 기쁨으로 뿌듯했다. 거기 가면 풀도 꽃도 다 다른 집 것과는 아주 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에도 곧잘 지나다녔던 땅이 틀림없었으나 지금은 아주 특별한 땅으로 생각되었다.
3
이렇듯 바홈은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만약 마을 사람들이 그의 농작물이나 목초지를 망치지만 않았더라도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진지하게 부탁을 해보았으나 도무지 효과가 없었다. 소에 꼴을 먹이러 나온 사람이 그의 목초지에 소를 몰아 넣기도 하고, 말을 밭에 풀어놓아 밭을 짓밟아 놓기도 했다. 그러나 바홈은 그것을 내쫓기만 하고 너그럽게 보아 왔지, 한 번도 법에 호소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참다못해 지쳐 버린 그는 마침내 재판소에 고발을 했다. 원래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는 건 땅이 좁아서지 마음이 나빠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또 이렇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둘 수야 없지. 내버려두다간 내가 망하겠는걸. 혼을 좀 내줄 필요가 있어.’
이렇게 하여 처음 벌어진 재판이 어느새 2번이 되고 두 번 모두 상대방이 벌금을 물게 되었다. 그래서 근방 사람들이 이제는 반대로 바홈을 원망하기 시작하여 일부러 밭과 목초지를 망쳤다. 어떤 사람은 밤중에 숲으로 들어가 여남은 그루의 보리수나무 껍질을 벗겨 버렸다. 바홈이 숲 속을 지나가다 보니 무언가 허연 것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 보니 껍질이 벗겨진 어린 보리수나무가 부근에 잔뜩 어질러져 있고 여기저기 둥치 잘린 그루터기가 남아 있었다. 하다못해 숲 가장자리 것이나 베든지, 한 그루라도 남겨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악당들이 깡그리 베어 버렸던 것이다.
바홈은 화가 치밀었다. ‘나쁜 놈들 같으니! 이놈들을 찾아내어 단단히 혼을 내 줘야지.’ 그는 누구의 소행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쇼므까의 짓이 틀림없다고 단정하고는 곧장 쇼므까네로 가서 쇼므까를 만나 보았으나 말다툼만 했을 뿐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었다. 그래서 바홈은 더욱더 쇼므까의 짓이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고발을 했다. 두 사람은 법정에 소환을 받았다. 여러 차례 신문이 있었으나 쇼므까는 무죄가 되었다.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홈은 약이 올라 촌장과 재판관하고까지 다투었다.
“당신들은 도둑의 편을 드는 거요? 만약 당신네들이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다면 도둑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바홈은 재판관과 이웃사람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였다. 마을 사람들은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하며 그를 위협했다. 이렇게 하여 바홈은 넓은 땅을 가졌으나 좁은 세상에서 살게 되고 말았다.
그때 농민들이 새로운 고장으로 옮겨 살려고 한다는 소문이 났다. 바홈은 생각했다.
‘나야 내 땅을 떠나야 할 이유가 없지. 더구나 이 근방 사람이 떠난다고 하면 이곳 땅도 좀더 넓어지겠지. 그러면 나는 땅을 사서 이 부근 일대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그러면 좀더 살기가 좋아질 거야.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는 좀 좁단 말이야.’
어느 날 바홈이 집에 있을 때 길 가던 나그네 한 사람이 들렀다. 집안 사람들이 그 나그네를 집에 들이고 음식을 대접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나그네는 아래쪽, 볼가 강 너머에서 왔으며 거기서 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그네는 띄엄띄엄 말을 이어, 그곳으로 숱한 사람들이 이주해 간다고 했다. 그들이 그곳에 이주하면 마을의 조합에 가입되어 1인당 10데샤치나씩 땅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까지 들려 주었다.
“한데 그 땅이 또 어찌나 비옥한지 밀농사를 지으면 그 키가 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 자라고 다섯 줌으로 한 다발이 되어 버리지요. 어떤 사람은 하도 가난해서 빈손으로 왔는데 지금은 말 여섯 필과 암소를 두 마리나 가지게 되었답니다.”
바홈은 흥분하여 “그렇게 잘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야 하필 이런 좁은 데서 고생스럽게 살 필요가 없지. 이 따위 땅이나 집은 팔아 버리고 거기 가서 그 돈으로 집을 짓고 한번 잘 살아 보자. 이렇게 좁은 데 있다가는 평생 죄만 짓고 말 테니. 아무튼 내가 가서 직접 보고 와야지” 하고 말했다.
여름이 되자 채비를 하여 그는 길을 떠났다. 사마라까지는 볼가 강으로 해서 기선을 타고 내려갔고 그 다음부터는 걸어서 400베르스따쯤 갔다. 이윽고 목적지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들은 대로였다. 농민들은 1인당 10데샤치나의 땅을 배당받아 여유 있게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든지 기꺼이 조합에 가입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돈이 있는 사람은 배당받은 땅 외에도 자기가 필요한 만큼 제일 좋은 땅을 3루블의 가격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알고 싶은 것을 죄다 알아 가지고 가을이 채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자 바홈은 가진 것을 모두 팔기 시작했다. 땅은 꽤 비싸게 팔렸다. 집도 가축도 모두 팔렸다. 그래서 마을의 조합에서 탈퇴하고 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가족을 데리고 새 고장으로 옮겨갔다.
4
바홈은 가족을 데리고 새 고장에 이르자 곧 큰 마을의 조합에 가입했다. 마을의 노인들에게 한잔씩 대접을 하고 필요한 서류를 모두 갖추었다. 바홈은 마을 이주가 허락되어 다섯 명의 가족에 대해 목장을 제외한 여기저기의 땅 50데샤치나를 배당받았다. 그의 땅은 이제까지 가졌던 것의 세 배 넓이가 되었다. 더구나 그것은 아주 비옥한 땅이다. 생활도 전에 비해 열 배나 나아졌다. 경작지와 목초는 마음대로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가축은 얼마든지 키울 수 있었다.
처음에 집을 짓고 가축을 늘리고 하는 동안은 바홈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해했으나 차차 살아가는 동안 이 땅으로도 아직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해에 바홈은 자기 밭에 밀을 갈았다. 그것이 잘되었다. 그는 밀농사를 더 짓고 싶었으나 배당된 땅이 모자랐다. 남은 땅은 밀농사에 적당치가 않았다. 이 지방에서는 밀을 억새밭이나 휴한지(休閑地) 같은 데 심지 않으면 안 되었다. 1년이나 2년쯤 밀농사를 짓고 나면 또다시 풀이 날 때까지 묵혀 두어야 했다. 한데 그런 땅은 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아무래도 모자라기가 일쑤였다. 그 때문에 여기서도 투쟁이 벌어졌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그 땅을 갖고 싶어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해마다 내야하는 세 대신 상인에게 빼앗겨 버렸다.
바홈은 밀농사를 좀더 많이 짓고 싶었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상인에게 가서 1년 동안 땅을 빌리기로 했다. 그리하여 지난해보다도 더 많이 심었는데 그것이 풍작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마을에서 좀 멀어서 15베르스따나 운반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상업을 겸한 농민이 별장을 가지고 차츰 부유해져 가고 있었다. 바홈은 생각했다. 만일 땅을 영원히 내 소유로 하고, 별장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처리할 수가 있을 텐데. 그리하여 바홈은 어떻게 해서든지 땅을 자기 소유로 하기 위해 더 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홈은 이렇게 하며 3년의 세월을 보냈다. 땅을 빌려서는 밀을 심고 또 빌려서는 밀을 심곤 했다. 해마다 밀농사는 풍작이 되어 돈도 많이 모였다. 생활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바홈은 해마다 남에게 땅을 빌리기 위해 안달을 해야 하는 일이 귀찮게 느껴졌다. 어디 좋은 땅이 있기만 하면 사람들이 당장 달려가서 빌려 버린다. 어물어물하다가는 농사도 못 짓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3년 만에 그는 어떤 상인과 동업으로 마을 사람에게 목장을 빌려서 쟁기질을 완전히 끝내 놓았는데, 사람들이 재판을 벌이는 바람에 모처럼의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는 생각했다.
‘만약 이것이 내 땅이었다면… 누구에게 머리 숙일 필요도 없고 귀찮은 일도 없을 텐데…’
그래서 바홈은 영원히 자기 것으로 살 수 있는 땅이 없을까 하고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600데샤치나의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파산을 해서 그걸 싸게 판다는 것이다. 바홈은 그 사람과 교섭을 했다. 여러 번 교섭한 끝에 1,500루블로 흥정이 되어, 반액은 조금 기다려 주기로 했다.
거의 완전히 이야기가 결정되었을 무렵에 한 나그네 상인이 밥을 한술 얻어먹으려고 바홈네 집에 들렀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상인은 자기는 멀리 빠시끼르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빠시끼르 사람에게서 5,000데샤치나의 땅을 샀는데 불과 1,000루블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홈은 묻기 시작했다. 상인은,
“그저 노인들의 비위만 잘 맞춰 주면 됩니다. 나는 옷과 깔개 따위로 약 100루블어치와 또 차 한 상자를 나누어주고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에겐 술을 대접해 주었지요. 그래 가지고 1데샤치나에 20꼬뻬이까라는 헐값으로 샀지 뭡니까?” 하고 말하며 그는 등기증서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 땅이 전부 내를 끼고 있어서 모두 억새풀이 나 있는 평원이랍니다”라고도 덧붙였다. 바홈이 여러 가지 자세히 캐묻자 “그 땅은 1년을 걸어도 아마 못 다 돌 거예요. 그것이 모두 빠시끼르 사람들 땅이지요. 그곳 사람들은 양같이 순해서 공짜나 다름없이 살 수가 있어요” 하고 말했다.
‘가만 있자’ 하고 바홈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500데샤치나의 땅에 1,000루블을 내고도 또 빚을 내야 하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뭣 때문에 한담? 그곳에만 가면 같은 1,000루블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데!’
5
바홈은 그곳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상인이 가고 난 다음 자기도 곧 길 떠날 채비를 했다. 그는 집에다 아내를 남겨 놓고 하인 한 사람을 데리고 떠났다. 그는 가다가 읍에 들러서 상인이 말한 대로 차 한 상자와 선물과 술을 샀다. 그리고서 약 500베르스따쯤 갔다. 7일만에 그는 빠시끼르의 유목지에 이르렀다. 모두가 상인이 말한 대로였다.
사람들은 내를 낀 초원에서 펠트로 된 텐트 수레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경작도 하지 않고 곡식도 먹지 않았다. 초원에는 가축과 말이 떼를 지어 돌아다녔다. 망아지는 수레 뒤에 매어져 있고 그곳에 하루 두 번씩 어미말이 가도록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암말의 젖을 짜서 그것으로 끄므이스(馬乳)를 만든다. 여자들은 끄므이스를 휘저어 섞어 치즈를 만들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다만 끄므이스나 차를 마시고 양고기를 먹으며 피리나 불 따름이었다. 모두들 살이 찌고 쾌활하며, 여름 동안은 놀고만 있었다. 그들은 무식하여 러시아 어도 할 줄 몰랐으나 너그럽고 친절했다.
바홈의 모습을 보자, 빠시끼르 인의 텐트 수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그를 에워쌌다. 통역이 나왔다. 바홈은 그에게 자기는 땅 문제로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빠시끼르 인은 반가워하며 바홈을 얼싸안듯이 하여 제일 좋은 텐트 수레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양탄자 위에 깃털 방석을 깔아 앉게 하고 자기들은 주위에 빙 둘러앉았다. 차와 끄므이스를 내와 대접했다. 그리고 양고기 요리도 대접했다.
바홈은 여행 마차에서 선물을 내려서 빠시끼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바홈은 빠시끼르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준 다음 차도 나누어 주었다. 빠시끼르 사람들은 무척 기뻐했다. 자기들끼리 소곤소곤하다가 통역을 시켜 이렇게 말하게 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관습에 따라 받은 선물에 대하여 무엇으로라도 답례를 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물건을 주셨으니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무엇이든지 좋은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제일 바라는 것은” 하고 바홈이 말을 시작했다. “당신네들의 땅입니다. 우리 고장은 땅이 좁은데다 너무 오랫동안 경작해 와서 토질이 나빠졌는데 이곳은 땅이 많을 뿐더러 모두 기름지군요. 나는 아직 이렇게 좋은 땅을 본 적이 없습니다.”
통역이 그 말을 전했다. 빠시끼르 인들은 다시 의논을 했다. 바홈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눈치를 살피니 아주 유쾌한 듯 줄곧 떠들며 웃고들 있었다. 이윽고 조용해지더니 모두 바홈 쪽을 보았다. 그리고 통역이 말을 시작했다.
“모두들 말하기를”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의 친절에 대하여 이 사람들은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의 땅을 기꺼이 드리겠답니다. 그러니까 손짓으로 얼마만큼이라고 말씀하십시오. 그만큼 드리기로 하겠다니까요.”
그들은 또다시 의논을 하다가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바홈은 무엇을 다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통역이 대답했다.
“실은 이 중에, 땅에 관한 문제라면 촌장에게 물어 볼 필요가 있으니 우리끼리 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과 그럴 필요없다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6
이렇듯 빠시끼르 사람들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곳에 여우 가죽 모자를 쓴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모두 입을 다물고 일어섰다. 통역이 말했다.
“이분이 바로 촌장어른이십니다.”
바홈은 얼른 일어나 제일 좋은 옷 한 벌과 닷 근짜리 차 상자를 촌장에게 내놓았다. 촌장은 그것을 받아들고 맨 윗자리에 앉았다. 여러 빠시끼르 사람들이 그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했다. 촌장은 대충 듣고 나자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여서 그들의 말을 중지시키고 바홈에게 러시아 어로 말했다.
“좋습니다. 마음에 드시는 곳을 가지십시오. 땅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필요한 만큼 가지라지만 이걸 어떻게 가져야 한담?’ 하고 바홈은 생각했다. ‘아무튼 계약만은 단단히 해놓을 필요가 있어. 줘 놓고 나중에 도로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친절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말씀대로 이곳에는 땅이 많습니다만, 나는 조금만 있으면 됩니다. 나는 다만 나의 것이 얼마만큼이라는 것만 알면 됩니다. 하여간 일단 측량을 해서 내 몫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당신들이 친절해서 나에게 땅을 주셨더라도 당신네 아들 대에 가서 도로 빼앗아갈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옳은 말씀이오. 규칙대로 합시다.”
촌장은 말했다.
그래서 바홈이 말했다.
“들으니 이곳에 상인 한 사람이 왔었다고 하는데, 당신네들은 그 사람에게 땅을 주고 등기증서를 작성하셨더군요. 나에게도 그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촌장은 승낙했다.
“네, 그런 것쯤이야 어렵지 않지요. 우리 고장에도 서기가 있으니 함께 읍으로 나가서 정식 수속을 밟읍시다.”
“한데, 값은 어느 정도로 하면 될까요?”
바홈이 말했다.
“우리 고장에서는 값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하루치 1천 루블로요.”
바홈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재는 건가요. 하루치란? 그게 몇 데샤치나쯤 됩니까?”
“우리 고장에서는 그런 식으로 측량할 줄을 모릅니다.”
촌장은 말했다.
“항상 하루치 얼마로 팔고 있지요. 말하자면 그 사람이 하루 종일 걸은 만큼의 땅을 드리는 거죠. 그래서 하루치 1천 루블이라는 겁니다.”
바홈은 놀랐다.
“그렇다면 하루 종일 걸으면 상당한 면적이 되겠는데요.”
촌장은 웃었다.
“네, 그게 모두 당신 것이 됩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만약 당일에 출발점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그건 무효가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돌아다닌 곳을 어떻게 표를 하지요?”
“우리가 어디든지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함께 갑니다. 그리고 거기 서 있을 테니까 당신은 그곳을 출발해서 빙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때 당신은 괭이를 들고 가셔서 어디든지 필요한 곳에 표를 해 두십시오. 즉 조그맣게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나무나 풀을 꽂아 두십시오. 나중에 쟁기로 구덩이에서 구덩이로 갈아엎을 테니까요. 어디서 돌든 상관은 없지만, 꼭 해 떨어지기 전에 출발점까지 돌아오셔야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돌아오신 땅은 모두 당신 것이 됩니다.”
바홈은 기뻤다. 그들은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약속한 뒤, 이야기를 하며 끄므이스도 마시고 양고기도 먹고 차도 마시며 밤이 이슥하도록 즐겼다. 이윽고 그들은 바홈에게 깃털 이불을 덮어주어 자게 하고는 저마다 자기 수레로 돌아갔다. 그들은 내일 새벽에 모여서 해돋이까지 출발점으로 가자고 약속했다.
7
바홈은 깃털 이불을 덮고 누웠으나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줄곧 땅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땅을 크게 차지해야지’ 하는 궁리에 잠겨 있었다. ‘하루 종일 걸으면 50베르스따는 돌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지금이 제일 해가 긴 때다.’ 그래서 그는 다시 생각했다.
‘둘레가 50베르스따라고 하면 면적이 어느 정도나 될까. 그 중 나쁜 곳은 팔든가 빌려 주면 된다. 그리하여 좋은 곳만 골라 그곳에 정착하기로 하자. 암소 두 필이 끌게 할 쟁기를 만들고 머슴 두 사람을 고용하여 50데샤치나 정도만 경작하고 나머지 땅에서는 목축을 하기로 하자.’
바홈은 밤새도록 뜬눈으로 지샜다. 그러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나마 눈을 감자마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그가 자고 있는 수레 속에 누워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참이다.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가 웃고 있는가 알고 싶어 수레 밖으로 나갔다. 나가 보니 빠시끼르의 촌장이 수레 앞에 앉아서 두 손으로 배를 안고 몸을 흔들며 웃어대고 있다. 바홈은 곁으로 가서, “뭘 그렇게 웃고 계십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다가 보니 그것은 그 빠시끼르의 촌장이 아니고 그에게 땅 이야기를 해서 그를 이곳으로 오게 한 상인 같았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언제 이리로 왔소?” 하고 물으려 하자 어느새 그는 상인이 아니고 전에 볼가강 너머에서 왔던 농부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건 농부도 아니고 뿔과 발굽이 있는 악마가 배를 안고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속옷 바람에 맨발인 남자 하나가 나둥그러져 있었다. 바홈은 가까이 가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굴까? 그런데 남자는 이미 죽어 있고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바홈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 “뭐야, 꿈이었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열린 문 쪽을 보니 밖은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는 떠날 시간이 됐으니 모두 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바홈은 곧 일어나 여행 마차에서 자고 있는 하인을 깨워 말을 매게 하고 자기는 빠시끼르 인들을 깨우러 갔다.
“시간이 됐습니다. 초원에 나가 땅을 측량해야지요.”
빠시끼르 인들도 일어나서 모두 모였다. 촌장도 왔다. 빠시끼르 인들은 또 끄므이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바홈에게도 차를 대접하려 했으나 그는 사양했다.
“어서 출발합시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까요” 하고 그는 말했을 뿐이다.
8
빠시끼르 인들은 준비를 마치고 어떤 사람은 말을 타고 어떤 사람은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바홈은 하인과 함께 자기 마차를 탔다. 그들은 땅을 팔 연장을 준비했다. 초원에 이르니 날이 훤히 밝았다. 빠시끼르 어로 ‘시한’이라는 언덕에 당도하자 그들은 마차에서 내려 한데 모였다. 촌장이 바홈 곁으로 와서 한 손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보다시피 이 넓은 땅이 모두 우리 땅입니다. 마음에 드시는 곳을 택하십시오.”
바홈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땅은 아득히 눈앞에 펼쳐진 억새풀 초원으로, 손바닥같이 평평하고 양귀비같이 검었으며 조금 파인 곳에는 여러 가지 잡초가 사람 키만큼이나 자라 있었다.
촌장은 여우 가죽 모자를 벗어서 그것을 땅에 놓았다.
“그러면, 이것을 표지로 하지요. 자, 여기서 출발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곳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돌아서 오신 만큼이 당신의 땅이 됩니다.”
바홈은 돈을 꺼내어 모자 속에다 집어넣고 윗옷을 벗어 조끼바람이 되자 가죽띠를 단단히 매고 빵 주머니를 품속에 넣고 물병도 가죽띠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장화를 단단히 신고 하인이 들고 있던 괭이를 받아든 다음 출발 준비를 했다. 그는 어느 쪽으로 나갈까 잠시 생각했다. 어디를 보아도 훌륭한 땅이었다. 생각 끝에 해 돋는 쪽을 향해 가기로 했다. 이리하여 그는 해 돋는 쪽을 향해 서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하늘 저쪽에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1분도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지. 조금이라도 시원할 동안에 걷는 것이 편할 거야.’
하늘 끝에서 해가 얼굴을 내밀기가 무섭게 바홈은 괭이를 어깨에 메고 초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바홈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었다. 1베르스따쯤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눈에 잘 띄도록 잔디를 여러 덩이 묻어 놓았다. 그러고는 또 걸어갔다. 걷기 시작하니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조금 가다가 또 구덩이를 팠다.
바홈은 뒤를 돌아보았다. 햇빛을 받은 언덕은 물론 그 위의 사람들까지 선명하게 보였으며, 여행마차의 쇠바퀴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바홈은 이제 5베르스따쯤은 걸었으리라 생각했다. 차차 더워져서 조끼를 벗어 어깨에 걸치고 걸었다. 점점 더 더워졌다. 해를 보니 벌써 아침 시간이다.
‘이제 한 구덩이가 끝난 셈이구나. 한데 하루에 네 군데 구덩이를 파게 되어 있으니 아직 부러지기에는 빠르겠지. 그러나 장화는 벗기로 하자.’
그는 앉아서 장화를 벗어서 띠에다 차고 또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어디 5베르스따만 더 걷자. 그리고서 왼쪽으로 꾸부러지자. 땅이 너무 좋아서 단념하기가 아까운걸. 가면 갈수록 더 좋으니.’
그는 계속 곧바로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언덕은 이미 아득히 멀어지고 사람들은 개미처럼 아물아물했고 무엇인가 반짝거리는 것도 겨우 짐작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이만하면 이쪽은 충분히 잡았다. 이제는 구부러져야겠다. 땀을 흘렸더니 목도 타는군.’
바홈은 이렇게 생각하고 멈추어서 되도록 큼직하게 구덩이를 파고 거기다 잔디를 묻었다. 그리고는 물통을 집어들고 듬뿍 물을 마신 다음 거기서 곧바로 왼쪽으로 구부러졌다. 또다시 걷기 시작했으나 풀의 키가 갈수록 커 몹시 더웠다.
바홈은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늘을 쳐다보니 바로 한낮이었다.
‘자, 이쯤에서 한숨 돌리자.’
바홈은 걸음을 멈추고 거기 앉았다. 물을 마셔 가며 빵을 먹었을 뿐 눕지는 않았다. 누웠다가 만일 잠이라도 드는 날에는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앉았다 또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월하게 걸을 수가 있었다. 금방 빵을 먹었기 때문에 기운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더위는 점점 심해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도 그는 꾹 참고 걸으며, 한 시간의 인내가 일생의 덕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번 구부러져서도 꽤 멀리 걸었다. 그래서 다시 왼쪽으로 구부러지려 하다가 보니 가까이에 촉촉한 분지가 있었다. 이걸 그대로 버리기엔 아까운데 저기라면 아마(亞麻)가 잘 될 거야, 그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다시 곧장 걸었다. 분지를 차지하고 나자 그 너머에다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두 번째 모퉁이를 만들었다. 바홈은 언덕 쪽을 돌아다보았다. 더위 때문에 모든 것이 아물아물하게 아른거리는 대기 속에서 언덕 위의 사람들이 아련하게 보였다.
‘자, 두 쪽은 이렇게 길게 잡았으니 이번에는 좀 짧게 잡아야겠는걸.’
세 번째로 접어들자 그는 걸음을 빨리 했다. 해를 보니 이미 오후도 한나절이 지나 있었는데 세 번째 모퉁이에서는 겨우 2베르스따도 못 왔고, 출발 지점까지는 족히 15베르스따는 남아 있었다.
‘이러다간 안 되겠다. 지형은 비뚤어졌더라도 이젠 돌아가야겠다. 더 이상 탐내지 말고 서둘러야겠어. 땅은 이만하면 충분해.’
바홈은 급히 구덩이를 파고는 거기서 곧장 언덕 쪽을 향했다.
9
바홈은 곧장 언덕 쪽을 향해 걸었으나 점점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몸은 땀투성이가 되고 장화를 벗은 발은 찢기고 베이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좀 쉬고도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해지기 전에 도착할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는 사정없이 넘어갔다.
‘아, 실패한 게 아닌지 모르겠어. 너무 욕심을 낸 게 아닐까? 만약 늦으면 어떡한담.’
그는 언덕과 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출발점까지는 아직도 멀었으나 해는 이제 막 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바홈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몹시 괴로웠으나 쉴새없이 걸었다. 그러나 가도 가도 길은 멀었다. 마침내 뛰기 시작했다. 조끼도 장화도 물통도 모자도 내팽개치고 오직 괭이만을 들고 그것을 지팡이 삼아 뛰었다.
‘아, 내가 너무 욕심이 지나쳤어. 이제 다 끝났다. 해 떨어지기 전에는 도착할 것 같지 않아.’
그는 이렇게 두려운 생각으로 숨까지 막혀 왔다.
바홈은 무작정 달렸다. 땀에 젖은 속옷은 몸에 찰싹 달라붙고 입은 바싹 말라 버렸다. 가슴은 대장간 풀무처럼 펄럭거렸고 심장은 망치질을 하듯이 뚝딱거렸다. 다리는 남의 다리처럼 휘청거렸다. 바홈은 이러다가 죽어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죽는 것은 무섭지만 멈춰 설 수는 없었다.
‘그렇게 고생스레 뛰어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멈추어 선다면 그야말로 바보 소릴 듣겠지.’
그가 계속 달리고 달려서 겨우 가까이까지 왔을 때 빠시끼르 사람들이 그를 향해 질러대는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 외침소리 때문에 그의 심장은 한층 더 열이 올랐다. 바홈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달리고 있었는데 해는 이미 지평선 가까이 저녁 노을 속으로 떨어져 가느라 새빨간 큰 공처럼 보였다. 드디어 이제 넘어가는 것이다. 해는 이제 떨어지고 있었다.
출발점까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바홈은 언덕 위에 서 있는 사람들,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그를 재촉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땅 위에 놓인 여우 가죽 모자 속의 돈까지도 보였다. 그리고 촌장은 땅바닥에 앉아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러자 바홈은 꿈 생각이 났다.
‘땅은 많이 차지했지만 하느님이 그 위에 살게 해 주실까? 아, 나는 나를 망쳤다! 도저히 달려갈 수가 없어.’
바홈은 해를 보았다. 그것은 이미 땅에 닿아 있어서 한쪽 끝은 가라앉고 한쪽 끝은 아치형이 되어 있었다.
바홈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발을 이끌며, 넘어지려는 것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그래도 바홈은 가까스로 언덕 밑까지 이르렀다.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해는 지고 말았다.
바홈은 깜짝 놀랐다.
‘애쓴 보람도 없이 허사가 되었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발을 멈추려다가 문득 들으니 빠시끼르 인들이 쉴새없이 뭔가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러자 퍼뜩 언덕 밑에 있는 그에게는 해가 진 것 같지만 언덕 위에서는 아직 다 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홈은 용기를 내어 언덕으로 달려 올라갔다. 언덕 위는 아직도 밝았다. 바홈은 달려 올라가자마자 모자를 보았다. 모자 앞에는 촌장이 앉아서 두 손으로 배를 잡고 큰 소리로 웃어대고 있었다. 바홈은 꿈 생각이 나서 깜짝 놀랐다. 오금이 떨어지지 않아 그는 앞으로 쓰러졌으나, 쓰러지면서도 두 손으로 모자를 움켜쥐었다.
“허어, 장하구려! 땅을 완전히 잡으셨소!”
촌장이 소리쳤다.
바홈의 하인이 달려가서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으나 그의 입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쓰러져 죽고 말았던 것이다.
하인은 괭이를 집어들고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치수대로 정확하게 3아르신(1아르신은 약 70센티미터)을 팠다. 바홈의 무덤을 위해. 그리하여 그를 그곳에 묻었다.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전재. (톨스토이, 동서문화사, 2007)
★ 톨스토이에 이어 <타임캡슐 단편>에 소개되는 작가는 안톤 체홉입니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 땅이 필요한가」 다음으로 실릴 체홉의 단편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입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나비 퍼즐(2회)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의 여주인공 한나 슈미츠는 옛 애인 미하엘이 녹음해서 보내준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거기 녹음된 어떤 작가의 작품을 교도소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고 처음으로 ‘문자’를 깨치게 됩니다. 이 작품이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입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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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1828-1910)
톨스토이는 1828년 러시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나 카잔대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촌 계몽활동을 하다가 실패하고 군에 입대했다. 그는 1852년 첫 작품 『유년시절』를 발표한 후 주로 <현대인>이란 잡지를 통해 『소년시절』, 『청년시절』, 『카자크 사람들』 등을 발표했다. 이후 투르게네프, 곤챠로프 등 공인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또한 「바보 이반」, 「두 노인」 등 민중소설도 썼으며 종교론, 예술론, 인생론, 희곡 등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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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근식
중앙대 러시아어학과 교수. 중앙대 동북아연구소 소장. 저서로 『아이뜨마또프 작품의 주제발전연구』, 『러시아정교회와 반체제 및 민족주의』, 『뿌쒸낀의 꿈의 분석』, 『한국에서의 뿌쉬낀 연구』 등이 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의 참회/인생의 길』, 『백치』, 『인생이란 무엇인가』, 아이뜨마또프의 『하얀 배』, 아나똘리 김의 『아버지 숲』, 도스또예프스끼 『백치』, 잘리긴의 『위원회』, 부또프의 『곤충들의 천문학』, 마야꼬프스끼의 『미국 발견』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김주영의 『천둥소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등을 러시아어로 옮겼다.
고산
동서문화사 편집인. 동인문학상 운영위원회 집행위원장.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저서로 『고산 삼국지』, 『고산 국어대사전』, 『한국출판100년을 찾아서』, 『新文館 崔南善?講談社 野間淸治. 愛國作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