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블레이크는 그녀를 보았다. 대부분이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들인 몇몇 사람들이 로비에서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그들 속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혐오감과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공식적으로 아무 볼일도 없었고 서로에게 할 이야기도 없었다. 그는 돌아서서 로비 끝에 있는 유리문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가 초라해 보이거나 병들었거나 혹은 다른 어떤 식으로든 비참해 보이는 옛 친구나 동창을 못 본 척하고 지나칠 때 겪는 애매한 죄의식과 당혹감을 느끼면서. 웨스턴 유니언 사무실에 걸린 시계는 다섯시 십팔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급행열차를 타려면 탈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회전문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그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그는 비 때문에 거리의 소음이 얼마나 더 크게 들리는지를 알아차렸다. 밖으로 나오자 그는 매디슨 가를 향해 동쪽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교통은 꽉 막혀 있었고 저만치 앞쪽 간선도로에서는 차들이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보도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그녀가 퇴근 시간에 사무실 건물을 빠져나오는 그를 흘끗 쳐다보는 것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를 따라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도시의 길거리를 걸을 때 여간해서는 돌아서거나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 그런 습관이 블레이크를 붙들었다. 그는 비 오는 날의 퇴근 무렵 도시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세계로부터 그녀의 발소리를 구별해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걸어가면서―어리석게도―한 일 분쯤 귀를 쫑긋 세웠다. 그는 자기 앞쪽 길 건너편으로 연이어 늘어선 빌딩들의 벽에 갈라진 틈이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뭔가가 헐렸고 다른 무엇인가가 새로 올려지고 있었지만 그 철제 구조물은 보도의 방책보다 약간 더 올라가 있어서 그 틈새로 햇빛이 쏟아져 나왔다. 블레이크는 길 이쪽 맞은편에 멈춰 서서 어느 상점의 쇼윈도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장식가 아니면 경매인의 쇼윈도였다. 그 쇼윈도는 마치 거기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친구들을 맞기도 하는 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커피 테이블에는 컵들과 잡지책들이 놓여 있었고 꽃병에는 꽃들이 꽂혀 있었지만 꽃은 말라 비틀어졌고 컵은 비었고 손님들은 오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판유리에 또렷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과 뒤로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바로 그때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도 가까이 있어서 기겁할 정도였다. 그녀는 겨우 한두 발짝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원하는 게 뭐냐고 물을 수도 있었지만 알은체하는 대신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일그러진 모습으로부터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를 해치려는지도 몰랐다. 그를 죽일 마음을 먹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갑작스럽게 돌아선 탓에 쓰고 있던 모자챙에서 빗물이 조금 떨어져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몹시 긴장했을 때의 식은땀처럼 오싹했다. 차가운 물이 그의 얼굴과 맨손에 떨어졌고, 젖은 배수구들과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불쾌한 냄새와 자기의 발이 젖기 시작해서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의식―빗속을 걸을 때면 누구나 다 느끼는 불쾌감―이 그를 뒤쫓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고조시켜 그 자신의 체력이 형편없고 그래서 쉽게 상해를 입을 수 있다는 섬뜩한 인식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그의 앞쪽으로 불빛이 더욱더 밝은 매디슨 가 모퉁이가 보였다. 그는 만일 자기가 매디슨 가에 이를 수 있다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모퉁이에 출입구가 두 곳 있는 제과점이 하나 있었고 그는 간선도로 쪽으로 나 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서 여느 다른 통근자들처럼 커피링 빵을 하나 산 다음 매디슨 가로 나 있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가 매디슨 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신문 가판대 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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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존 치버 (John Cheever)
20세기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1912년 매사추세츠 주 퀸시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 때 세이어 아카데미에서 제적당한 경험을 소재로 한 단편 「추방」을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다양한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으며, 영화 시나리오 작가 및 대학 방문교수 등으로도 활동했다. 교외에 사는 저소득층과 자신의 경험을 녹여낸 첫 작품집 『어떤 사람들이 사는 법』을 필두로 『기괴한 라디오』,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사랑의 기하학』, 『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 『여단장과 골프 과부』 등 여러 작품집을 출간했다.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장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첫 장편 『왑샷 가문 연대기』로 전미 도서상을 받았고, 속편 『왑샷 가문 몰락기』로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며 윌리엄 딘 하우얼스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현대인의 소리 없는 절망과 복잡한 삶의 양상을 그려낸 『불릿파크』, 『팔코너』, 『얼마나 천국 같은가』 등의 뛰어난 장편을 발표하였으며, 특히 『팔코너』는 타임스 선정 영문학 100대 작품에 선정되기도 했다. 1978년 『존 치버 단편선집』으로 퓰리처상과 전미 비평가협회상, 전미 도서상을 받았고, 1982년 4월 암으로 사망하기 6주 전 미국 예술아카데미로부터 문학부문 국민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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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황보석
불문학을 전공한 역자는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사랑의 기하학』, 『기괴한 라디오』, 『작은 것들의 신』, 『불릿파크』,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성스러운 여행 순례 이야기』, 『공중곡예사』, 『달의 궁전』, 『뉴욕 3부작』, 『기록실로의 여행』, 『셀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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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영리해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라면 쉽사리 따돌릴 수 있을 터였다. 그는 택시에 올라탔다가 반대편 문으로 내릴 수도 있었고 경찰에게 알릴 수도 있었고 또 달아날 수도 있었다. 만일 달아난다면 그의 느낌으로는 그녀가 계획해둔 것이 분명한 폭력 사태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그는 그 도시에서 익히 알고 있는 구역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지상의 미로들과 지하 통로들, 엘리베이터 통로들, 그리고 사람들로 붐비는 로비들이 있어서 추적자를 따돌리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런 생각과 커피링 빵에서 솔솔 풍겨나는 달콤한 온기가 그에게 용기를 돋워주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상상일 터였다. 그녀는 아마도 어리석거나 판단을 잘못했거나 외로웠을 것이고, 그래서 결국에는 이런 짓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중요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누군가가 그의 사무실에서 역까지 미행을 할 이유라고는 없었다. 그는 어떤 중요한 비밀도 알지 못했다. 그의 서류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보고서들은 전쟁이나 평화, 마약 밀수나 수소폭탄 혹은 여타의 국제적 음모 같은 것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비에 젖은 보도에서 그를 뒤쫓는 사람들을 연상시킬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앞쪽에서 남성 전용 바의 출입문을 보았다. 오,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걸!
그는 깁슨을 한 잔 주문하고서 어깨로 바에 있는 두 남자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었다. 그녀가 창밖에서 자신을 찾아내 지켜보지 못하도록. 그곳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잔 걸치려고 들어온 통근자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옷에―그리고 신발과 우산에도―바깥의 비에 젖은 저녁의 고약한 냄새를 묻혀가지고 들여왔지만, 블레이크는 깁슨 맛을 보자마자 곧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평범하고 대체로는 젊어 보이지 않는 얼굴들, 걱정거리가 있다면 세율과 판매 촉진은 누가 맡게 될 것이냐를 두고 걱정하는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녀의 이름―덴트 양인가 벤트 양인가 아니면 렌트 양인가 하는―을 떠올리려고 했다가 그 이름을 기억해낼 수 없다는 것에 놀랐다. 자기는 기억력도 좋고 기억하는 것들도 많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더군다나 그 일은 불과 여섯 달 전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오후 인사과에서 그녀를 올려 보냈다. 그는 비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날씬하고 수줍음을 타는―아마도 20대인 듯한―살빛이 가무잡잡한 여자였다. 그녀의 옷차림은 수수했고 외모도 그저 그랬고 한쪽 스타킹에는 줄이 가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는 선뜻 그녀를 한번 써보기로 했다. 그의 비서로 일을 시작한 지 며칠 뒤, 그녀가 자기는 여덟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그 뒤로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었다면서 자기에게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가 그에게 검은색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녀를 좀 더 잘 알게 되자 그는 그녀가 너무 예민한 탓에 외로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번은 그녀가 자기의 상상으로는 그의 삶이 어떨 것 같다는―친구들도 많고 돈도 많고 여러 명의 사랑하는 가족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라는―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때 그는 그녀가 갖고 있는 묘한 박탈감을 알아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실제보다 더 휘황찬란하게 상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는 그녀가 그의 책상에 장미 한 송이를 놓아두었는데 그는 그것을 쓰레기통 속에 던져버렸다. “난 장미 따윈 안 좋아해.” 그가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그녀는 유능했고 시간을 엄수했고 타이프도 잘 쳤다. 그녀에게서 한 가지 흠을 잡는다면, 그것은 필체였다. 그녀의 제멋대로인 필체와 그녀의 외모는 서로 맞아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왼쪽으로 기운 동글동글한 글씨체를 쓸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녀의 필적에는 여기저기에 서투른 인쇄체가 섞여 끊기는 곳들이 있었다. 그녀의 필적을 보고 그는 그녀가 어떤 내면적―어떤 정서적―갈등의 희생자, 종이에 쓸 수 있는 선들의 연속성을 무너뜨릴 만큼 격렬한 갈등의 희생자였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그의 비서로 일한 지 삼 주쯤―그 이상은 아니고―되었을 때, 어느 날 그들은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었고, 그는 그녀에게 일이 끝나면 술을 한잔 사겠다고 했다. “정말 술 생각이 있으시다면,” 그녀가 말했다. “저의 집에 위스키가 좀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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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의 눈엔 꼭 벽장 같은 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 방 한쪽 구석에는 옷상자들과 모자 상자들이 쌓여 있었고 방 크기는 침대와 화장대, 그리고 그가 앉아 있는 의자가 겨우 들어갈까 말까 했는데도 벽 한쪽으로 보면대에 베토벤 소나타 연주곡집이 올려진 직립식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술을 한 잔 가져다주고 자기는 좀 더 편한 옷으로 갈아입겠다고 했다. 그는 얼른 그러라고 했다. 그가 거기까지 온 목적은 결국 그것이었으니까. 만일 그에게 어떤 주저함이 있었다면,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었을 터였다. 그녀의 망설임, 그녀의 관점에서 본다면 박탈감이 그에게는 어떤 결과도 생기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인 셈이었다. 그와 관계를 가졌던 많은 여성들 중 대부분은 자부심이 부족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선택되었었다.
한 시간이나 그쯤 뒤, 그가 다시 옷을 입는 사이 그녀는 울고 있었지만 그는 너무도 만족스럽고 몸은 덥고 졸리고 해서 그녀의 눈물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옷을 입고 있다가 그는 화장대 위에 놓인, 그녀가 청소하는 여자에게 써놓은 쪽지를 하나 보았다. 빛이라고는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것뿐이었는데―욕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그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보기 흉하게 휘갈겨 쓴 글자들이 다시 한번 그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마치 천박하기 짝이 없는 다른 어떤 여자의 필적임에 틀림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날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현명하기 그지없는 일을 했다. 그녀가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갔을 때 인사과로 전화를 해서 그녀를 해고해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조퇴를 했다. 며칠 뒤, 그녀가 회사로 와서 그를 만나보려고 했지만 그는 교환원에게 그녀를 들이지 말라고 했다. 그 이후로 그날 저녁까지 그는 한 번도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블레이크는 깁슨을 두 잔째 비우고 나서 시계를 보았다가 급행열차를 놓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완행열차―다섯시 사십팔분 열차―를 타면 될 것이었다. 그가 술집을 나섰을 때는 날은 아직 밝았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길 아래위쪽을 둘러보고 그 가엾은 여자가 가버린 것을 알았다. 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한두 번 어깨 너머를 돌아다본 바로는 이제 안심을 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자기가 완전히 제정신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술집에다 커피링 빵을 놓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물건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기억력의 감퇴가 그를 괴롭혔다.
그는 신문을 한 부 샀다. 그가 완행열차에 올랐을 때는 자리가 반밖에 차지 않아서 그는 강변이 바라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레인코트를 벗었다. 그는 홀쭉한 몸에 갈색 머리칼을 한, 그의 창백한 안색이나 회색빛 눈에서 불쾌한 기미를 알아채기 전까지는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남자였다. 그리고 옷차림도 수수해서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사치 금지법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의 레인코트는 버섯 색깔처럼 엷은 황갈색이었고 모자는 짙은 갈색으로 그가 입고 있는 양복과 같은 색이었다. 넥타이에 들어 있는 몇 줄의 밝은 색 선들만 빼놓고는 그의 옷에는 주도면밀하리만큼 색상이 결여되어 있어서 꼭 눈에 띄지 않는 보호색 같아 보였다.
그는 이웃 사람 누가 타고 있는지 객차 안을 둘러보았다. 그보다 몇 칸 앞 오른쪽 자리에 콤프턴 부인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미소는 순간적이어서 곧바로, 떠오르기가 무섭게 사라져버렸다. 블레이크 바로 앞에는 왓킨스 씨가 있었다. 왓킨스 씨는 머리를 깎아야 할 때가 되었고 사치 금지법을 어기고서 코르덴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와 블레이크는 언쟁을 한 적이 있어서 서로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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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프턴 부인의 미소가 곧장 사라졌다고 해서 블레이크가 마음 상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콤프턴 부부는 블레이크의 옆집에 살고 있었는데, 콤프턴 부인은 남의 일에 함부로 참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블레이크가 알기로 루이스는 안 좋은 일이 있기만 하면 콤프턴 부인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는데, 그러면 그 여자는 눈물 바람을 잠재워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가 무슨 고해신부라도 되는 것처럼 블레이크 부부의 사사로운 일들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가며 호기심을 발동시키곤 했다. 어쩌면 그녀는 가장 최근에 벌였던 그들의 언쟁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이었다. 어느 날 밤, 블레이크는 과로를 하고 피곤에 지쳐 집으로 돌아왔다가 루이스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하나도 해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루이스를 뒤에 달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그녀에게 그날이 5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주방 달력에다 그 날짜에 동그라미를 쳤다. “일주일 뒤는 12일이야.” 그가 말했다. “이 주 뒤는 19일이고.” 그가 19일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제부터 이 주일 동안 당신하고는 말을 하지 않겠어.” 그가 선포했다. “19일까지야.” 그녀는 울며불며 항의를 했지만, 그녀가 애원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팔 년이나 십 년쯤 전의 일이었다. 이제 루이스는 늙어서 그녀의 얼굴에는 지울 길 없는 주름들이 져 있었고, 그녀가 석간신문을 읽느라 안경을 코에 걸치고 있을 때면 그는 그녀가 마치 불쾌한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의 유일한 매력이었던 육체적 매력은 사라졌다. 블레이크가 방들을 연결하는 출입구에 붙박이식 책장을 설치하고 아이들이 자기의 책을 보지 못하도록 그 책장에다 잠글 수 있는 나무 문을 짜 맞추어 넣은 지도 구 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들의 장기화된 불화가 블레이크에게는 별 문제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아내와 다투었지만,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누구나 다 그랬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었으니까.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호텔 마당, 통풍 공간, 여름날 저녁의 거리―거친 말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블레이크와 왓킨스 씨 사이의 불편한 감정도 블레이크 가족과 관련이 있었지만 콤프턴 부인의 곧장 사라지는 미소 뒤에 놓인 그 무엇만큼 심각하거나 골치 아픈 문제는 아니었다. 왓킨스 부부는 셋집에서 살고 있었다. 왓킨스 씨는 매일같이 사치 금지법을 어겼고―한번은 샌들을 신고서 여덟시 십사분 열차를 타러 간 적도 있었다―밥벌이는 상업 미술가로 하고 있었다. 블레이크의 열네 살 난 장남인 찰리는 왓킨스 씨의 아들과 친구가 되어 왓킨스 가족이 살고 있는 너저분한 셋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 둘 사이의 우정이 그 아이의 예절과 단정함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왓킨스 씨 가족과 몇 번인가 식사도 같이하기 시작하더니 토요일이면 아예 그곳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제 물건들 대부분을 왓킨스 네 집으로 가져가고 집에서 보내는 밤보다 그곳에서 보내는 밤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하자 블레이크는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안 좋은 소리를 한 대상은 찰리가 아니라 왓킨스 씨였고 필요하긴 하지만 비난으로 들렸음이 분명한 말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왓킨스 씨의 길고 지저분한 머리와 그의 코르덴 재킷이 블레이크에게 자기의 생각이 옳았음을 재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콤프턴 부인의 곧바로 사라지는 미소와 왓킨스 씨의 지저분한 머리도 블레이크가 지하 깊은 곳을 달리고 있는 그 다섯시 사십팔분 열차의 편안치 못한 좌석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얻은 즐거움을 줄이지는 못했다. 그 낡은 객차에서는 마치 여러 가족들이 한꺼번에 방공호로 몰아넣어져 밤을 보낸 것 같은 기괴한 냄새가 풍겼다. 천장에서 그들의 머리와 어깨로 흘러내리는 불빛은 침침했고, 창문 유리에 낀 때는 기차가 여러 곳들을 지나면서 맞은 비에 줄줄이 흘러내린 자국이 져 있었다. 한 명 한 명 사람들이 펴든 신문들 뒤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파이프 담배와 궐련들의 연기구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블레이크에게는 그것이 자기가 안전한 길로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광경이었고, 그렇게 위험을 스쳐 보내고 나자 그는 콤프턴 부인과 왓킨스 씨한테까지도 약간의 온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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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지하를 벗어나 희미한 일광 속으로 나왔고, 슬럼가와 도시가 블레이크에게 그를 뒤쫓던 여자를 어렴풋이 상기시켜주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이나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 위해 그는 주의를 석간신문으로 돌렸다. 곁눈으로 그는 바깥 경치를 볼 수 있었다. 그곳은 산업 지대였고 그 시간에는 쓸쓸해 보였다. 거기에는 기계 보관소들과 창고들이 있었고 그 위의 구름들 사이로 갈라진 틈새―노란색 빛 한줄기―가 보였다. “블레이크 씨!” 누군가가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녀였다. 그녀가 흔들거리는 기차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한쪽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잡고 거기에 서 있었다. 그는 그제야 그녀의 이름이 생각났다. 덴트 양이었다. “아아, 덴트 양.” 그가 말했다.
“여기 좀 앉아도 될까요?”
“그래도 될 것 같군.”
“고마워요. 친절하기도 하셔라. 이런 식으로 불편을 끼쳐드리고 싶진 않아요. 그러고 싶진 않지만…” 그는 고개를 들었다가 그녀를 보고 놀랐지만 그녀의 소심한 목소리를 듣자 곧 안심이 되었다. 그가 엉덩이를 들썩거렸고―시시하고 조건반사적으로 나온 그런 몸짓으로―그녀가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서 젖은 옷 냄새가 났다. 그녀는 싸구려 깃 장식이 꿰매어 붙여진 모양 없는 검정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얇은 천으로 된 코트 차림에 장갑을 끼고 커다란 핸드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집이 이쪽 방향이오, 덴트 양?”
“아뇨.”
그녀가 핸드백을 열고 손수건을 찾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는 누가 보고 있을까봐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제껏 저녁 열차에서 수많은 승객들 옆에 앉아 보았다. 그들의 옷과 장갑에 난 구멍들을 보았고, 만일 그들이 잠들어 잠꼬대라도 하게 되면 그들의 걱정거리가 무엇일까 궁금해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신문에 코를 박기 전에 잠시 동안 그들 거의 모두를 다 분류해보기도 했는데, 그는 그들을 부유한 자, 가난한 자, 영리하거나 멍청한 자, 이웃이거나 낯선 사람으로 구분했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운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핸드백을 열었을 때 그는 그녀의 향수를 기억해냈다. 그 냄새는 그가 그녀의 집으로 술을 마시러 갔던 그날 밤 그의 피부에 밴 적이 있었다.
“저는 많이 아팠어요,”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이 주 만에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거고요. 정말 심하게 아팠어요.”
“아팠었다니 안됐구먼, 덴트 양.” 그가 왓킨스 씨와 콤프턴 부인에게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어디서 일하고 있지?”
“뭐라고요?”
“지금은 어디서 일하고 있냐고?”
“오, 웃기지 좀 마세요.” 그녀가 나지막하게 되받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당신은 그들의 마음을 멍들게 했어요.”
그는 목을 똑바로 펴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이 다른 어떤 곳에 있으려는 그의 단호한―그리고 가망 없는―갈망을 대변했다. 그녀는 말썽을 뜻했다.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현실 세계에 있다는, 누가 뭐래도 그다지 심하게 곤란하지 않은 세상에 있다는 느낌을 확인할 셈으로 반쯤 채워지고 반쯤 밝혀진 기차간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비에 젖은 코트에서 풍기는 냄새를 의식하고 있었다. 기차가 멈춰 섰다. 수녀 하나와 아래위가 붙은 작업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내렸다. 기차가 다시 출발하자 블레이크는 모자를 쓰고 벗어놓은 레인코트로 손을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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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려는 거죠?” 그녀가 물었다.
“난 다음 칸으로 가겠어.”
“오,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안 돼요, 안 돼, 안 돼.” 그녀가 하얀 얼굴을 그의 귓가에 너무 바짝 들이대고 있어서 그는 뺨에 와 닿는 그녀의 더운 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지 말아요,” 그녀가 소곤거렸다. “내게서 도망치려고 하지 말아요. 나한테는 권총이 있고 당신을 죽여야 할 텐데, 난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당신하고 얘기를 해보는 거예요. 움직이지 말아요, 안 그러면 죽일 거예요. 가만히, 가만히, 가만히 있어요!”
블레이크는 도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령 그가 일어서서 도와달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다손 치더라도 그럴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의 혀는 크기가 두 배로 부풀어 올랐고 그가 혀를 움직여보려고 하자 끔찍하게도 입천장에 딱 들러붙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정신 못 차리게 뛰는 심장 박동이 잦아들 때까지, 그래서 자기가 처한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었고, 그녀의 가방 안에 들어 있는 피스톨은 그의 배를 겨누고 있었다.
“이제야 내 말을 알아들었군요, 그렇죠?” 그녀가 말했다.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았나요?” 그는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혀가 입천장에 들러붙어 있어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우리 잠시 동안 조용히 앉아 있기로 해요.” 그녀가 말했다. “난 너무도 흥분이 되어서 생각들이 온통 뒤죽박죽이거든요. 우리 잠시 조용히 앉아 있기로 해요, 내가 다시 정신을 수습할 수 있을 때까지요.”
도움의 손길이 올 거야, 블레이크는 생각했다. 이건 그저 잠깐 동안의 문제일 뿐이야. 누군가가, 그 모습―그의 얼굴 표정이나 그녀의 특이한 자세―을 보고 멈춰 서서 끼어들면 그 상황은 모두 끝날 것이었다. 그는 단지 누군가가 자신의 곤경을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창밖에 흘러가는 강과 하늘을 보았다. 비구름이 셔터처럼 아래로 굴러 내려오고 있었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주황색 빛 한줄기가 수평선 위에서 눈부시게 밝아졌다. 그 눈부신 빛이 퍼져 나갔다. 그는 그 빛이 파도를 가로질러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강둑까지 차츰차츰 번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그 빛이 사라졌다. 그는 도움의 손길이 곧 오리라고 생각했다. 열차가 다시 멎기 전에 도움의 손길이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열차가 멈추고 몇몇 사람들이 타고 내렸어도 블레이크는 여전히 옆에 있는 여자의 손에 자기의 목숨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가 직시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도움이 오지 않을 가능성이었다. 그의 곤경이 눈에 띄지 않을 가능성, 콤프턴 부인이 그가 불쌍한 친척에게 셰이디 힐에서 저녁을 사주려고 데려가나보다 하는 추측을 하게 될 가능성은 나중에나 생각해볼 일이었다. 이윽고 입 안에 침이 다시 돌아오면서 그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덴트 양?”
“네.”
“원하는 게 뭐지?”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내 사무실로 오면 될 것을.”
“오, 이런. 거긴 이 주일 동안 매일같이 갔었어요.”
“선약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뇨,” 그녀가 잘랐다. “여기서 얘기하면 될 것 같아요.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너무 아파서 그걸 부치러 나갈 수가 없었어요. 나는 생각을 다 정리했어요. 난 여행을 좋아해요. 기차 여행을 좋아해요. 내 문제들 중 하나는 언제나 여행을 할 여유가 없었다는 거였어요. 당신은 이런 경치를 매일 밤마다 볼 테니 이제는 더이상 눈여겨보지 않겠지만 오랫동안 앓아누웠던 사람에게는 멋진 일이겠죠. 사람들은 하느님이 강이나 산에는 없다고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성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요. ‘그러나 지혜는 찾을 길 없고 슬기는 만날 길이 없구나. 물속의 용이 외친다. ‘이 속에는 없다.’ 바다도 부르짖는다. ‘나에게도 없다.’ 파멸과 죽음도 말하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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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지금 내가 미쳤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는 다시 심하게 아프긴 했지만 이제 나아질 거예요. 당신과 이야기를 해보는 것으로 더 나아지겠죠. 당신 비서로 일을 하기 전에 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거기에서는 전혀 나를 치료하려고 들지 않았어요. 단지 내 자존심을 앗아가버리려고만 했죠. 지금까지 석 달 동안 나는 아무 일도 못했어요. 설령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나를 다시 병원에 집어넣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고 그러니까 난 두려울 게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 조금만 더 조용히 앉아 있기로 해요. 난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니까요.”
열차는 계속 강둑을 따라 멈출 듯 멈출 듯 올라가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위기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려고 머리를 짜내보았지만 목숨을 위협받는 급박한 상황이어서 그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분별 있게 궁리를 하는 대신 애초에 그녀를 피할 수 있었을 법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후회가 들자마자 곧 그것이 다 소용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에 몇 달 동안 입원해 있었다는 말을 했을 때 의심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녀의 소심하고 주저하는 태도, 그리고 얼간이가 끼적여놓은 부호들처럼 보였던 그녀의 필적을 경계하지 않았던 불찰을 후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실수를 돌이킬 길이라고는 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후회막급인―아마도 그가 성인이 된 뒤로 처음 느끼는―심경이었다. 창밖으로 어둑어둑한 강에서 낚시질을 하는 사람들이 몇 보였고, 그다음에는 물가에서 물에 떠밀려 온 나무 쪼가리들을 대강 때려 박아 지은 것처럼 보이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한 보트 클럽이 보였다.
왓킨스 씨는 잠에 빠져 코를 골고 있었고, 콤프턴 부인은 신문을 읽고 있었다. 열차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속도를 늦추더니 또다른 역에서 불안하게 멈춰 섰다. 블레이크는 남행 열차 쪽 플랫폼에서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몇몇 승객들을 볼 수 있었다. 점심 도시락 통을 들고 있는 노동자 하나, 정장 차림의 여자 하나, 그리고 여행용 가방을 든 여자 하나. 그들은 따로따로 떨어져 서 있었고 그들 뒤쪽의 벽에는 광고판들이 몇 개 붙어 있었다. 와인으로 축배를 드는 커플 사진, 캐츠 포 운동화 사진, 그리고 하와이언 댄서의 사진. 하지만 그 사진들의 기분을 밝게 해주려는 의도는 플랫폼에 생긴 물웅덩이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거기에서 소멸되는 것 같았다. 플랫폼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외로워 보였다. 열차가 끌리듯 역을 벗어나 슬럼가의 흩어진 불빛들 속으로, 그다음에는 시골과 강의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셰이디 힐에 도착하기 전에 내 편지부터 읽어봐요,” 그녀가 말했다. “자리에 있으니까 집어 들어요. 당신에게 부칠 생각이었지만 너무 아파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거든요. 난 이 주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고, 세 달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어요. 집주인 말고는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해보지 못했고요. 자, 내 편지를 읽어봐요.” 그는 그녀가 가리키는 자리에서 편지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에 와 닿는 싸구려 종이의 촉감이 혐오스럽고 더럽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그 편지에는 괴상하고 구불거리는 필체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사람들 말로는 인간의 사랑이 우리를 신의 사랑으로 인도한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일까요? 난 매일 밤마다 당신 꿈을 꾸어요. 내 욕망이 그렇게도 굉장해서죠. 난 언제나 꿈을 꾸는 데는 선수예요. 화요일에는 피를 뿜어내는 화산 꿈을 꾸었어요. 내가 병원에 있었을 때 거기에서는 나를 치료해주는 거라고 해놓고는 내 자존심을 앗아가버리려고만 했죠. 그 사람들은 내가 그저 바느질이나 하고 바구니 세공품이나 만드는 꿈을 꾸길 바랐지만, 난 내 꿈꾸는 재능을 지켰어요. 내겐 통찰력이 있어요. 전화벨이 언제 울릴지도 알아맞힐 수 있죠. 난 이제껏 살아오면서 진정한 친구를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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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또다시 멈춰 섰다. 거기에는 또다른 플랫폼이 있었고, 와인으로 축배를 드는 커플과 운동화와 하와이언 댄서의 또다른 사진들이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얼굴을 다시 블레이크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대더니 그의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당신 얼굴에 쓰여 있거든요. 당신은 셰이디 힐에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죠? 그런데 어쩌나, 난 이걸 몇 주일 동안이나 계획했거든요. 생각할 거리가 그거밖에 없어서 말예요. 내 말을 막지 않으면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 난 악마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 말은, 이 세상에 악마가 존재한다면, 만약 이 세상에 누군가 악마로 나타난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제거하는 게 우리의 의무인가 하는 거였죠. 난 당신이 언제나 약자들을 등쳐먹는다는 걸 알아요. 분명히 알 수 있어요. 아, 가끔은 당신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또 가끔은 당신이 나와 나의 행복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유일한 장애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가끔은…”
그녀가 권총을 블레이크에게 갖다 댔다. 그는 총구가 배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 정도 거리라면 총알이 들어가는 자리에는 작은 구멍이 나겠지만 등에는 축구공만 한 크기의 구멍이 뚫릴 것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땅에 묻히지 않은 시체들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내장들, 눈알들, 부서진 뼈, 배설물, 그리고 다른 오물들.
“내가 평생 원한 건 약간의 사랑뿐이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총에 눌리는 압박감이 약간 줄었다. 왓킨스 씨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콤프턴 부인은 무릎 위로 양손을 포갠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객차가 가볍게 흔들렸고 창문과 창문 사이에 걸려 있던 코트들과 버섯 색깔의 레인코트들이 열차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흔들거렸다. 블레이크의 팔꿈치는 창문턱 위에, 그리고 그의 왼쪽 신발은 스팀파이프 덮개 위에 놓여 있었다. 기차간에서 황량한 교실 같은 냄새가 풍겼다. 승객들은 잠이 들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고, 블레이크는 자기가 그 열기와 젖은 옷 냄새와 흐릿한 전등 불빛으로부터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가끔씩 자기 자신을 북돋우기 위해 써먹곤 했던 자기기만 수법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자기기만으로 희망을 품을 기력마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차장이 객실 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알렸다. “셰이디 힐, 다음 역은 셰이디 힐입니다.”
“자,” 그녀가 말했다. “이제 당신이 앞에 서서 나가요.”
왓킨스 씨가 퍼뜩 잠에서 깨어 코트를 입고 모자를 쓴 다음, 어머니들이 흔히 보이는 몸동작으로 자기 물건들을 챙기고 있는 콤프턴 부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이 문 쪽으로 갔고 블레이크도 그들을 따라갔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의 뒤에 있는 여자를 눈여겨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차장이 문을 열자 블레이크는 다음 열차가 들어올 플랫폼에서 급행열차를 놓치고 흐릿한 불빛 아래서 자기네의 여행이 끝나기를 참을성 있게, 지친 듯 기다리고 있는 몇몇 다른 이웃들을 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열린 문을 통해 마을에서 방치된 연립주택과 나무에 못 박혀 있는 출입금지 팻말, 그리고 오일 탱크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의 양쪽 끝을 받치는 콘크리트 기둥들이 열린 문에서 너무도 가까이 지나가서 손이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북행 열차 플랫폼의 가로등 기둥들 중 첫번째 기둥과 검정색 바탕에 금색으로 셰이디 힐이라고 쓰인 표지판, 개선 협회에서 관리하는 조그만 잔디밭과 화단을 보았고 그다음엔 택시 승차장과 구식 역 건물의 한 귀퉁이를 보았다.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였다. 그는 빗물이 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물웅덩이와 번들거리는 포장도로에 반사되는 불빛들도 볼 수 있었다. 빗물이 튀는 소리와 빗방울이 떨어지는 그 한가로운 소리가 그의 마음속에 어떤 피난처 같은 심상을 떠올려주었지만, 그 심상은 너무도 밝고 낯설어서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삶의 어느 시기에 속해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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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등 뒤에 따라붙은 그녀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열두어 대의 자동차들이 역 건물 옆에 시동을 걸어놓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객차에서 몇 사람이 내렸다. 그들 대부분은 그가 아는 사람이었지만 그를 태워주겠다고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혼자서 혹은 둘씩 짝을 지어 걸어갔다. 비를 피할 요량으로 자동차 경적이 그들을 부르고 있는 피신처인 플랫폼을 향해서.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 술을 한잔할 시간, 사랑을 할 시간,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언덕 위의 불빛들―아이들을 목욕시키고, 고기를 굽고, 설거지를 하는―이 빗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나하나의 차들이 차례로 가장들을 태워 갔고 이제 그곳에는 네 명만 남았다. 그 오도 가도 못하던 승객들 중 두 명이 그 마을에 한 대뿐인 택시를 타고 떠났다. 몇 분 뒤 한 여자가 차를 몰고 와서 다정한 목소리로 자기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여보. 우리 집 시계들이 다 늦네요.” 그 마지막 남자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더니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블레이크는 마치 그와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우리가 파티를 마치고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이고도 원치 않는 마음과 영혼의 이별에 직면했을 때 하는 것처럼―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주차장을 건너 보도 쪽으로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역 건물 안에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벨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요란하게 울리는데도 받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가 올버니로 가는 다음 열차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역장인 플러네이건 씨는 한 시간 전에 이미 퇴근을 한 터였다. 그는 떠나기 전에 모든 불들을 다 켜놓았고 그 불빛들이 텅 빈 대합실을 비추었다. 양철 갓이 씌워진 그 전등들은 흐릿하고 맹목적인 불빛들의 묘한 슬픔을 띠고 플랫폼의 위쪽 아래쪽에서 띄엄띄엄 떨어져 타오르면서 하와이언 댄서와 축배를 드는 커플과 운동화 선전 간판들을 밝히고 있었다.
“여긴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뭔가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초라해 보일 줄은 몰랐네요. 밝은 데서 벗어나야겠어. 저쪽으로 가요.”
그는 다리가 저렸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 가요.” 그녀가 명령했다.
역 건물 북쪽으로는 화물 창고와 석탄 적치장과 선착장이 있었다. 선착장에는 푸줏간 주인과 제과점 주인과 주유소를 운영하는 사람이 일요일이면 타고 낚시질을 하는 보트들을 묶어놓았는데 그 보트들은 비 때문에 뱃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화물 창고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땅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쥐 한 마리가 종이 봉지 밖으로 대가리를 내밀고 그를 쳐다보았다가 그 봉지를 이빨로 물어 하수구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멈춰 서요.” 그녀가 말했다. “돌아서요. 오, 안됐기도 하셔라. 당신의 그 불쌍한 얼굴 좀 봐요. 그렇지만 당신은 모를걸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난 낮에 밖으로 나가는 게 무서워요. 파란 하늘이 내게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꼭 불쌍한 치킨 리킨*처럼.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나 되어야 내가 나인 것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당신보다는 더 낫죠. 난 아직도 가끔은 기분 좋은 꿈을 꾸니까요. 소풍과 천국과 인간의 우애에 관한 꿈을 꾸고, 달빛에 잠긴 성들과 가장자리를 따라 버드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강과 외국의 도시들에 관한 꿈을 꿔요. 그러니까 누가 뭐래도 사랑에 대해서는 내가 당신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거죠.”
그는 어두운 강으로부터 들려오는, 보트의 선체 밖에 달려 있는 모터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가버린 여름들과 가버린 즐거움들에 대한 그처럼 분명하고도 달콤한 기억들을 뒤에 달고 어두운 강을 가로질러 천천히 끌어오는, 몸을 근질거리게까지 하는 소리여서 그는 문득 산중의 어둠과 노래하는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절대로 나를 치료해주려고 들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들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열차의 소음에 그녀의 말소리가 묻혀버렸지만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 굉음이 그의 귀를 가득 채우는 동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자고, 읽고 하는 차창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열차가 다리 너머로 지나가자 소음도 멀어져갔고, 그에게다 대고 비명처럼 질러대는 그녀의 말소리가 들렸다. “무릎 꿇어! 무릎 꿇어! 시키는 대로 해. 무릎 꿇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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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에 나오는, 머리에 도토리가 떨어지자 하늘이 무너진다고 호들갑을 떠는 어리석은 암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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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이것 봐,” 그녀가 말했다. “당신 말이야,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해치진 않겠어. 왜냐하면 난 정말이지 당신을 해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당신을 도와주고 싶거든. 그렇지만 어떤 땐 당신 얼굴을 보면 도와줄 수가 없을 것 같은 때가 있어. 어떤 때는 설령 내가 착하고 사랑스럽고 제정신이라손 치더라도, 그러니까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태라고 하더라도, 어떤 때는 내가 그 모든 것들을 다 갖춘 데다 젊고 아름답기까지 하다손 치더라도, 그리고 설령 내가 당신에게 옳은 길을 알려주려고 전화한다손 치더라도, 당신은 나를 알은체도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아, 난 당신보다는 나아. 당신보다는 낫고 그래서 이런 식으로 내 시간을 낭비한다거나 내 인생을 망쳐서는 안 돼. 얼굴은 땅에 박아. 얼굴을 땅에 박으라고! 시키는 대로 해. 얼굴을 땅에 박아.”
그는 쓰레기 더미 속으로 고꾸라졌다. 석탄 덩어리가 그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다. 그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울고 있었다. “이제야 좀 속이 풀리네.” 그녀가 말했다. “이제는 당신한테서 손을 뗄 수 있겠어. 이 모든 것에서 손을 떼도 되겠어.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찾아 쓸 수 있는 친절과 건전한 정신이 내게도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이제는 손을 떼도 되겠어.” 그러고 나서 그는 잡석을 밟고 멀어져가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었다. 뒤이어 플랫폼의 딱딱한 바닥 위에서 나는 더 또렷하고 더 멀어진 발소리가 들렸다가 그 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나무로 된 육교의 계단을 오른 다음 그 다리를 건너 반대편 플랫폼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거기에 있는 그녀의 모습은 희미한 등불 속에서 작고 평범하고 순진해 보였다. 그는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 마침내 그녀의 태도와 표정에서 그녀가 자기를 잊었다는 것, 그녀는 원했던 바를 성취했고 자기는 안전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일어서서 땅에 떨어져 있던 모자를 집어 들고 집으로 걸어갔다. (*)
(존 치버 단편선집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