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처음부터 시작하자면, 프랜시스 위드가 미니애폴리스에서 탄 동부행 비행기가 난기류에 휩쓸렸다. 하늘은 흐릿한 파란색이었고 비행기 아래로는 구름들이 너무도 자욱하게 끼어 있어서 땅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는 창문 밖으로 안개가 끼기 시작했고, 그 역시 시계를 가릴 정도여서 비행기는 불이 꺼진 직후의 연기처럼 보이는 하얀 구름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구름 색깔이 회색으로 짙어지더니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프랜시스는 전에도 난기류에 휘말려보았지만 이때처럼 심하게 흔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호주머니에서 납작한 술병을 꺼내어 한 모금 마셨다. 프랜시스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남자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기의 진통제를 누구하고도 나누어 마시고 싶지 않았으리라. 비행기가 갑자기 급강하하면서 기체가 요란하게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비행기 안의 공기는 탁한 데다 과열되어 있었고 프랜시스의 왼쪽 발은 감각을 잃었다. 그는 공항에서 산 문고판 책을 좀 읽어보려고 했지만 정신이 반쯤은 맹렬한 폭풍 쪽으로 쏠려 있었다. 창밖은 새까맣게 어두웠다. 꺼진 불이 다시 타올라 어둠 속에서 섬광이 번뜩였고 비행기 안에서는 조명이 어두워지고 숨 막힐 듯한 공기에 창문 커튼들까지 내려져서 격앙되고 뒤틀린 집구석 같은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잠시 후 실내조명들이 껌뻑껌뻑하다가 나가버렸다. “내가 늘 하고 싶어한 일이 뭔지 아시오?” 프랜시스 옆자리의 남자가 느닷없이 물었다. “나는 늘 뉴햄프셔에 농가를 하나 사서 비육우(肥肉牛)를 키우고 싶었소.” 스튜어디스가 이제부터 비상착륙에 들어갈 것이라고 알렸다.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다 마음속으로 죽음의 천사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조종사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육 펜스를 받았다네, 이만저만이 아닌 육 펜스를. 내 모든 삶을 지속시켜줄 육 펜스를 받았다네…” 그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유압 밸브들이 끽끽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조종사의 노래를 삼켜버렸고 공중 높은 곳에서 자동차 브레이크처럼 끼이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비행기가 동체 아래쪽으로 옥수수 밭에 부딪히면서 너무나도 심하게 요동을 치는 바람에 앞쪽에 있던 노인 하나가 비명을 질러댔다. “내 배 터지네! 내 배 터져!” 스튜어디스가 덜컥 문을 열었고 누군가가 뒤쪽에 있는 비상문을 열어 계속 이어지는 죽어야 할 운명의 소음―튀어드는 물과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 냄새―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죽기 살기로 목숨을 구하려고 그들은 줄줄이 문밖으로 나와 명줄이 이어지기를 기도하며 옥수수 밭에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명줄은 이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행기가 불타거나 폭발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승무원과 스튜어디스가 승객들을 한데 모아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어느 헛간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들이 줄줄이 그들을 시내로 실어 날랐다. “꼭 마른 전투* 같군.” 누군가가 그 말을 했지만 여러 미국인들이 동료 여행자를 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의외로 아주 조금밖에 누그러지지 않았다.
필라델피아에서 프랜시스 위드는 기차를 잡아타고 뉴욕으로 갔다. 그리고 그 여행의 마지막으로 일주일에 닷새 동안 그의 집이 있는 셰이디 힐까지 운행되는 통근 열차가 막 출발하려는 참에 그 열차를 잡아타고 도시를 가로질렀다.
그는 트레이스 비어든과 같이 앉았다. “아시겠지만 나는 바로 얼마 전 필라델피아 외곽에 불시착한 그 비행기를 타고 있었는데요,” 그가 말을 꺼냈다. “우리는 어느 밭에 내려앉았고…” 그는 신문이나 폭풍우보다 더 빠르게 여행을 했었고 뉴욕의 날씨는 쾌청하고 온화했다. 그날은 사과처럼 상큼하고 보기 좋은 9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트레이스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는 했지만 그가 어떻게 관심이 끌릴 수 있었을까? 프랜시스에게는 죽음을 살짝 비껴갔던 그 상황을 생생하게 되살릴 능력이 없었다. 특히 화창하게 갠 시골, 가난한 사람들의 밭에 이미 수확의 조짐이 보이는 곳을 지나고 있는 통근 열차 안의 그 분위기에서는. 트레이스가 신문을 펼쳐 들었고 프랜시스는 자기만의 생각에 혼자 빠져들었다. 셰이디 힐 역의 플랫폼에서 그는 트레이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중고 폴크스바겐을 몰아 자기가 살고 있는 블렌홀로 주택 지구로 올라갔다.
위드 가족의 네덜란드 식민지풍 주택은 차도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컸다. 우선 거실만 하더라도 널찍했고 갈리아 지방*의 거실들처럼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왼쪽으로 2미터 남짓 되는 곳에 기다란 6인용 식탁이 있었고 그 식탁 한가운데에는 촛대와 과일 그릇이 놓여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풍겨나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줄리아 위드는 요리 솜씨가 좋았으니까. 거실의 가장 넓은 부분에는 벽난로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오른쪽으로는 몇 개의 책꽂이들과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그 방은 반짝반짝 윤이 났고 조용했고 서쪽으로 열려 있는 창문에서는 환하고 물처럼 맑은 늦여름의 햇살이 얼마쯤 흘러들었다. 그 집에서는 어떤 것도 소홀히 다루어지지 않았고 어떤 것도 광나지 않는 게 없었다. 그 집은 물건들이 가득 들어찬 궤짝을 열면 그 밑바닥에서 오래된 와이셔츠 단추나 녹슨 동전을 찾아내게 되는 그런 집이 아니었다. 벽난로의 바닥 돌은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고 피아노 위에 놓인 장미꽃들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넓은 위 뚜껑에 비치고 보면대에는 슈베르트의 왈츠 선곡집이 올려져 있는 그런 집이었다. 아홉 살 난 예쁜 여자아이인 루이자 위드는 서쪽으로 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그 아이의 남동생인 헨리는 그 옆에 서 있었다. 더 어린 남동생인 토비는 나무 상자에 붙은 반짝반짝한 놋쇠 명판에 새겨진 맥주를 마시고 있는 몇몇 삭발한 수도승들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프랜시스는 모자를 벗고 신문을 내려놓았지만 그 장면을 의식적으로 즐기지는 않았다. 그는 그렇게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의 천성, 타고난 모습이었고, 집으로 돌아온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그는 밝고 힘이 솟는 기분을 느끼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자, 얘들아,” 그가 말을 꺼냈다. “미니애폴리스 발 비행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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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른 전투: 1차 세계대전 때 파리 동쪽 상파뉴의 마른 강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물리쳤다.
* 갈리아 지방: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을 포함한 옛 로마의 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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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존 치버 (John Cheever)
20세기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1912년 매사추세츠 주 퀸시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 때 세이어 아카데미에서 제적당한 경험을 소재로 한 단편 「추방」을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다양한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으며, 영화 시나리오 작가 및 대학 방문교수 등으로도 활동했다. 교외에 사는 저소득층과 자신의 경험을 녹여낸 첫 작품집 『어떤 사람들이 사는 법』을 필두로 『기괴한 라디오』,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사랑의 기하학』, 『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 『여단장과 골프 과부』 등 여러 작품집을 출간했다.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장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첫 장편 『왑샷 가문 연대기』로 전미 도서상을 받았고, 속편 『왑샷 가문 몰락기』로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며 윌리엄 딘 하우얼스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현대인의 소리 없는 절망과 복잡한 삶의 양상을 그려낸 『불릿파크』, 『팔코너』, 『얼마나 천국 같은가』 등의 뛰어난 장편을 발표하였으며, 특히 『팔코너』는 타임스 선정 영문학 100대 작품에 선정되기도 했다. 1978년 『존 치버 단편선집』으로 퓰리처상과 전미 비평가협회상, 전미 도서상을 받았고, 1982년 4월 암으로 사망하기 6주 전 미국 예술아카데미로부터 문학부문 국민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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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황보석
불문학을 전공한 역자는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사랑의 기하학』, 『기괴한 라디오』, 『작은 것들의 신』, 『불릿파크』,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성스러운 여행 순례 이야기』, 『공중곡예사』, 『달의 궁전』, 『뉴욕 3부작』, 『기록실로의 여행』, 『셀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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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프랜시스를 열에 아홉 번은 반갑게 달려들며 맞았지만 그날 밤에는 저희들끼리의 싸움에 빠져 있었다. 프랜시스가 비행기 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끝내기도 전에 헨리가 루이자를 뒤에서 발로 한 번 걷어찼다. 루이자가 홱 돌아서면서 “망할 새끼!” 하고 욕을 했다. 프랜시스는 헨리를 벌주기 전에 먼저 루이자에게 나쁜 말을 했다고 야단부터 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루이자가 제 아버지에게로 돌아서서 헨리만 예뻐한다고 퍼부어댔다. 매번 헨리는 잘못한 게 없고, 저는 구박받고 외롭고 운이 나쁘다고. 프랜시스는 아들을 돌아다보았지만 그 아이는 제가 발길질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고 우겼다. 제 누나가 먼저 때렸다고, 자기 뺨을 때렸는데 그건 위험한 짓이라고. 루이자는 성질을 박박 내면서 때린 것을 인정했다. 자기가 뺨을 때렸다고, 그애가 제 도자기 수집품들을 엉망으로 망쳐놓아 일부러 뺨을 때렸다고 말했다. 헨리가 그건 거짓말이라고 되받자 상황을 지켜보던 어린 토비가 루이자에게 유리한 증거를 대려고 나무 상자에서 돌아앉았고, 그러자 헨리가 손으로 어린 토비의 입을 틀어막았다. 프랜시스는 두 아이를 떼어놓았지만 그러다 본의 아니게 토비를 나무 상자 쪽으로 밀었고 토비가 울기 시작했다. 루이자는 진작부터 울고 있었다. 바로 그때 줄리아 위드가 주방에서 식탁이 있는 쪽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예쁘고 총명한 여자로 머리칼이 일찍 세어서 흰머리가 많았는데, 싸움이 벌어진 것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녀왔군요, 여보.”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프랜시스에게 말했다. “자, 모두들 손 씻어라. 저녁 준비 다 됐다.” 그녀가 성냥을 켜서 눈물의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여섯 개의 초들에 불을 붙였다.
그 간단한 말 한마디가 스코틀랜드 족장의 싸우라는 외침처럼 전투원들의 난폭성을 다시금 부추긴다. 루이자가 헨리의 어깨에다 주먹을 한 방 먹인다. 헨리는 여간해서 울지 않지만 아홉 이닝 내내 공을 던지고 나서 지쳐 있다. 그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어린 토비는 제 손에 가시가 박힌 것을 알고 요란하게 앙앙 울어대기 시작한다. 프랜시스가 큰 소리로 자기는 사고 난 비행기에 타고 있었고 피곤하다고 떠들어댄다. 줄리아가 다시 주방에서 들어와 아직까지도 그 혼란을 알지 못한 채 프랜시스에게 위층으로 올라가서 헬렌에게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알리라고 한다. 프랜시스는 이때다 싶어 얼른 위층으로 올라간다. 그것은 본부중대로의 귀환 같은 일이다. 그는 큰딸에게 비행기 사고에 대해 이야기해줄 셈이지만 헬렌은 침대에 누워 <트루 로맨스>라는 잡지를 읽고 있는데, 프랜시스가 맨 먼저 한 일은 그 아이에게서 잡지를 빼앗고 그런 책은 사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나무라는 것이다. 헬렌은 그 책은 제가 산 것이 아니라고 대꾸한다. 제 가장 친한 친구인 베시 블랙이 빌려준 것이라고, 누구나 다 <트루 로맨스>를 읽고 베시 블랙의 아버지도 <트루 로맨스>를 읽는다고, 자기네 반에는 <트루 로맨스>를 읽지 않는 아이가 하나도 없다고. 프랜시스는 딸에게 자기는 잡지를 싫어한다고 분명하게 얘기한 다음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알린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서는 그런 것 같지 않기는 해도. 헬렌이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온다. 촛불 빛을 받으며 자리에 앉아 있던 줄리아가 무릎 위로 냅킨을 펼친다. 루이자도 헨리도 식탁으로 오지 않고 있다. 어린 토비는 그때까지도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앙앙 울고 있다. 프랜시스가 토비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아빠는 오늘 오후에 사고가 난 비행기에 타고 있었단다, 토비. 너 그 얘기 듣고 싶지 않니?” 그러나 토비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너 지금 당장 식탁으로 오지 않으면,” 프랜시스가 으름장을 놓는다. “저녁은 굶고 자러 올라가야 한다.” 어린 토비가 일어서서 그에게 도끼눈을 해 보이고는 계단을 달려 올라가 제 방으로 가서 문을 쾅 닫는다. “오, 저런.” 줄리아가 그러고 나서 그 아이를 따라 계단으로 간다. 프랜시스는 그녀에게 아이를 망치려 든다고 한마디 하지만 줄리아는 토비의 체중이 십 파운드 미달이고 그래서 어떻게든 먹여야 한다고 되받는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고, 그 아이는 제대로 먹지 않으면 추운 몇 달을 침대에서만 보내야 할 것이라고. 줄리아가 계단을 올라간다. 프랜시스는 식탁에 헬렌과 둘이 앉아 있다. 헬렌은 화창한 날에 잡지책을 너무 집중해서 읽은 탓에 울적한 기분을 느끼고 녹초가 된 것 같은 눈길로 제 아버지와 그 방을 둘러본다. 또 비행기 사고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셰이디 힐에는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줄리아가 토비를 데리고 돌아와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나누어준다. “내가 저 커다랗고 뚱뚱한 얼간이를 봐야 해?” 헨리가 루이자를 두고 빈정거린다. 토비 하나만 빼놓고는 모두가 다 그 작은 전투에 끼어들고 그 전투가 오 분 동안 식탁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전투가 끝나갈 때쯤 헨리가 냅킨을 제 머리 위에다 올려놓고 셔츠에다 음식 찌꺼기를 온통 흘리며 음식을 먹는다. 프랜시스가 줄리아에게 아이들은 저녁을 좀 더 일찍 먹이면 안 되겠느냐고 묻는다. 그 말에 줄리아의 권총이 장전된다. 자기는 저녁 식사를 두 번 준비하고 식탁을 두 번 차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자기의 젊음과 아름다움과 재치를 모두 앗아간 단조롭고 고된 일에 대해 속사포를 쏘아댄다. 그러자 프랜시스는 자기를 이해해줘야 한다고, 자기는 비행기 사고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그리고 밤마다 전쟁터가 되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싫다고 응수한다. 이제는 줄리아가 몹시 기분이 상해서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그는 매일 밤마다 전쟁터가 되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비난은 멍청하고 비열한데, 왜냐하면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온 집안이 평온하다는 것이다. 그녀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느라 말을 멈추고 자기의 접시를, 마치 그것이 넓은 만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여다본다. 그러고는 울기 시작한다. “불쌍한 엄마!” 토비가 그러더니 제 엄마가 냅킨으로 눈물을 훔치며 식탁에서 일어나자 제 엄마 옆으로 다가간다. “불쌍한 엄마,” 그 아이가 되뇐다. “불쌍한 엄마!” 그리고 둘이 함께 계단을 올라간다. 나머지 아이들은 뿔뿔이 전쟁터를 떠나 흩어지고 프랜시스는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신선한 공기나 좀 마시려고 어두운 정원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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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원은 산책길과 꽃밭과 앉을 자리가 있는 쾌적한 곳이었다. 저녁노을은 거의 다 스러졌지만 아직까지도 훤한 빛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 충돌과 전투로 인해 울적한 기분이 된 프랜시스는 셰이디 힐의 저녁 무렵에 들려오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망할 놈의 기생충들! 악당들!” 늙은 닉슨 씨가 새 모이 주는 곳으로 들어온 다람쥐들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물러가라! 내 눈앞에서 썩 꺼져!” 어떤 문인가가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누군가가 잔디를 깎고 있었다. 다음에는 길모퉁이에서 사는 도널드 고슬린이 <월광 소나타>를 치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매일 밤마다 그 곡을 쳤다. 템포는 아예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리고 그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는 것이 베토벤의 위대함인지 뭔지는 몰라도 분노와 외로움과 자기 연민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루바토*로 연주하면서. 그 음악 소리가 나무들이 늘어선 길거리 위아래로 울려 퍼졌다. 어느 사랑스러운 가정부―골웨이에서 온, 해사한 얼굴을 하고 자기 집 3층 방에서 찍은 옛날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향수에 젖어 있는 어느 처녀―에게 사랑과 애정을 호소하기라도 하듯. “이리 와, 주피터, 이리 와, 주피터.” 프랜시스가 머서 씨 집 리트리버 사냥개를 불렀지만 그 개는 씹다 남은 벨트 모자를 입에 물고서 토마토 줄기들 사이를 요란하게 뚫고 달아났다.
주피터는 일종의 변종이었다. 그 개의 사냥 본능과 팔팔한 활기는 셰이디 힐에 맞지가 않았다. 그놈은 기다랗고 총명하고 난봉꾼 같은 얼굴을 한 석탄처럼 새까만 개였는데 눈은 심술기로 반짝반짝 빛났고 대가리는 높이 쳐들려 있어서 문장(紋章)이나 태피스트리*에서 볼 수 있고 우산 손잡이, 지팡이 같은 것들에 장식으로 쓰이는 사납고 묵직한 목걸이가 채워진 개의 대가리 같아 보였다. 주피터는 휴지통들과 빨랫줄들, 쓰레기통들, 신발주머니들을 찾아 어디든 제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가든파티와 테니스 경기를 망치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행렬 성가집을 엉망으로 흩뜨려놓고 빨간 옷을 입은 남자만 보면 짖어댔다. 그놈은 하루에 두세 차례씩 닉슨 씨의 콘데사 데 사스타고들을 짓밟으면서 장미 정원을 뚫고 지나갔고, 목요일 밤마다 도널드 고슬린이 바비큐 요리를 하려고 불을 붙이기만 하면 당장 그 냄새를 맡고서 나타나곤 했다. 고슬린이 그놈을 몰아낼 방법이라고는 없었다. 막대기와 돌멩이와 험악한 소리로는 그놈을 단지 테라스 가장자리로 물러나게 할 수 있을 뿐이었고, 거기에서 그놈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도널드 고슬린이 소금을 집기 위해 돌아설 때를 기다리며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다음에는 테라스로 펄쩍 뛰어올라 고기를 불에서 가볍게 들어 올려 고슬린의 저녁 식사를 물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주피터가 살 날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라이트슨 씨 집의 독일인 정원사나 파커슨 씨 집의 요리사가 곧 그놈을 독살할 것이었으니까. 심지어 늙은 닉슨 씨까지도 어쩌면 그놈이 좋아하는 음식 찌꺼기에다 비소 살충제를 넣을 것이었다. “이리 와, 주피터, 주피터!” 프랜시스가 불렀지만 그 개는 이빨로 문 모자를 흔들면서 껑충껑충 뛰어갔다. 자기 집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프랜시스는 줄리아가 아래층으로 내려와 촛불들을 불어 끄는 것을 보았다.
줄리아와 프랜시스 위드는 외출을 아주 많이 했다. 줄리아는 사교 모임을 꽤 좋아했고 파티에 대한 그녀의 열망은 혼돈과 외로움이라는 가장 자연스러운 두려움에서 나왔다. 그녀는 아침마다 자기에게로 온 우편물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초대장들을 찾아보았고 대체로는 찾아냈지만 그럼에도 만족할 줄 몰랐다. 또 설령 그녀가 일주일에 칠 일 밤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외출한다손 치더라도 그녀의 무언가 아쉬운 듯한 표정―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듣는 사람의 표정―이 치유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늘 어딘가에 더 멋진 파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터였으니까. 프랜시스는 그녀가 주중에는 이틀 밤만 파티에 갈 수 있도록 제한했지만 금요일에는 융통성을 보였고 주말 동안에는 격랑에 내몰리는 일엽편주처럼 이리저리 차를 몰았다. 비행기 사고가 있은 다음 날 위드 부부는 파커슨 부부와 저녁을 함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프랜시스는 다른 날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왔고 줄리아는 그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애 볼 사람을 구해놓고 그를 재촉해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 파티는 소규모였지만 유쾌했고 프랜시스는 자리를 잡고 앉아 마음 편히 즐겼다. 새로 온 가정부가 마실 것들을 돌렸다. 그녀의 머리칼은 검었고 얼굴은 둥글고 희었는데 프랜시스는 어쩐지 그녀가 낯익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기억력을 정서적인 능력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나무 타는 냄새, 라일락 향기 같은 것들은 그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그의 기억은 일종의 부속물―잔해만 남은 창고―같은 것이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의 결점이 될 수 없었지만 그가 과거에서 그처럼 성공적으로 벗어난 것은 어쩌면 그의 결점일 수도 있었다. 그는 그 가정부를 다른 파티에서 보았을 수도 있었고 일요일 오후에 산책을 하고 있는 그녀를 마주쳤을 수도 있지만 어느 경우든 그는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좀 이상할 정도로 동그란―노르만이나 아일랜드 계통의―편이었는데 그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한 것은 그녀가 그럴 정도로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그는 넬리 파커슨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넬리는 그 가정부가 소개소를 통해서 왔고 그녀의 집은 노르망디의 트레농―전에 언젠가 그녀가 찾아가본 적이 있었던 교회와 레스토랑이 있는 조그만 마을―이라고 대답했다. 넬리가 자기의 해외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동안 프랜시스는 전에 그 여자를 본 것이 어디에서였는지를 알아냈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는 몇몇 다른 병사들과 함께 교체 보충대에 남겨졌고 트레농에서 사흘 동안의 외출 허가를 받았다. 이틀째 되던 날 그들은 점령 기간 동안에 독일군 사령관과 함께 살았던 젊은 여자의 공개 응징 장면을 보러 사거리로 걸어 나갔다.
가을의 어느 쌀쌀한 아침이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포장되지 않은 사거리는 아주 음울한 빛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좀 높은 지대에 있어서 바다를 향해 펼쳐져 있는 다른 구름과 언덕들의 모양이 얼마나 같은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죄인은 우마차에 붙들어 맨 세발의자에 앉혀진 채로 실려 왔다. 읍장이 죄목을 읽어 내리고 형을 선고하는 동안 그녀는 우마차 옆에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숙여져 있었고 얼굴에는 채찍질당한 영혼이 일시 정지되었을 때 보이는 그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읍장이 선고를 끝내자 그녀가 머리를 풀어헤쳐 등 뒤로 늘어뜨렸다. 왜소한 체구에 수염이 희끗희끗한 남자가 가위로 그녀의 머리를 잘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 나서 한 주발의 비눗물과 면도칼로 그녀의 머리통을 박박 밀었다. 한 여자가 다가와 그녀의 옷에서 단추들을 풀기 시작했지만 죄인은 그녀를 옆으로 밀어내고 자기 손으로 옷을 벗었다. 그녀가 속옷을 머리 위로 벗어 내어 땅바닥에 던지자 그녀는 알몸이 되었다. 여자들이 야유를 했지만 남자들은 조용했다. 죄인의 얼굴에 서린 가짜로, 또는 애처롭게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싸늘한 바람을 맞은 그녀의 하얀 피부에 소름이 돋고 그녀의 젖꼭지가 단단하게 굳어들었다. 야유하는 소리가 그녀도 자기네와 같은 인간이라는 인식으로 잦아들어 차츰차츰 사라졌다. 한 여자가 그녀에게 침을 뱉었지만 그녀의 나체에 서린 어떤 범할 수 없는 위엄이 그 시련을 끝까지 견뎌내게 했다. 모여든 사람들이 잠잠해지자 그녀가 돌아서서―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울고 있었다―낡아빠진 검은 신발과 스타킹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혼자서 비포장 길을 따라 마을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녀의 둥글고 흰 얼굴은 이제 좀 더 나이가 들어 있었지만 프랜시스에게 칵테일을 가져다준, 그리고 나중에는 저녁 식사를 차려준 가정부가 사거리에서 응징을 받았던 바로 그 여자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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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바토: 감정을 살리기 위해 자유롭게 템포를 잡는 연주법.
* 태피스트리: 색실로 풍경 같은 것을 짠 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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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전쟁이 너무나 먼 옛날 일이고 부역의 대가로 죽음이나 고문을 당해야 했던 세상은 오래전에 사라진 것 같았다. 또 그때 베시에서 함께 있던 병사들이 누구였는지도 프랜시스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줄리아에게서 신중함이나 사려분별을 기대할 수 없었다. 아니,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지금,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그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인간적 실수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수도 될 것이었다. 파커슨 씨의 거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과거도 전쟁도 없었다고―이 세상에는 어떤 위험이나 곤란도 없다고―묵시적인 합의를 한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기록한 역사에서는 그 예외적인 만남이 앞뒤가 들어맞겠지만 셰이디 힐의 분위기에서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부적절하고 실례되는 일이었다. 그 죄인은 커피를 내온 뒤 물러갔지만 그 만남으로 인해 프랜시스는 음울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만남이 그의 기억과 감정을 열어 넓혀놓은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줄리아는 안으로 들어갔고 프랜시스는 애 보는 사람을 집까지 태워다주기 위해 차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늘 아이들을 보아주곤 하던 늙은 헨라인 부인을 보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어떤 젊은 여자가 문을 열고 불이 켜진 현관 입구 계단으로 나오자 그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불빛 아래 멈춰 서서 자기의 책들을 다 챙겼는지 권수를 세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제는 세상이 온통 아름다운 젊은 여자들로 차 있었지만 프랜시스는 아름다움과 완전함 사이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사랑스러운 흠들, 사마귀, 모반(母斑), 아문 상처가 사라져가고 있었고 그는 자기의 의식 속에서 음악이 유리를 깨뜨리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의 삶에서 그 어느 것 못지않게 이상하고 깊고 놀라운 인식으로 가슴이 찡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 알 듯 말 듯한 어두운 표정―그에게는 직접적인 사랑의 호소처럼 느껴지는 표정―때문이었다. 책들을 다 세고 나자 그녀가 계단을 내려와 차 문을 열었다. 불빛 속에서 그는 그녀의 뺨이 눈물로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차에 올라타고 문을 닫았다.
“처음 보는 분이군요.” 프랜시스가 말했다.
“네, 헨라인 부인이 아파서요. 저는 앤 머치슨이에요.”
“아이들이 심술이라도 부렸나요?”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계기판의 희미한 빛 속에서 그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밝은 색 머리칼이 상의 옷깃에 걸렸고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흔들어 걸린 머리칼을 빼냈다.
“울고 있던 것 같아서요.”
“네.”
“그게 우리 집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아니, 아니에요. 선생님 댁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이건 비밀이 아니에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요. 우리 아빠는 알코올중독잔데 방금 전 어느 술집에서 전화를 걸어 뭐라고 한마디 했어요. 아빠는 제가 부도덕하다고 생각해요. 전화가 걸려 온 건 위드 부인이 돌아오시기 바로 전이었고요.”
“미안해요.”
“오, 하느님!” 그녀가 숨을 삼키고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프랜시스 쪽으로 돌아앉자 그는 한 팔로 그녀를 감싸고 자기 어깨에 기대어 울게 했다. 그의 품속에서 몸을 떠는 그 움직임이 그녀의 육체에 대한 그의 미묘한 느낌을 두드러지게 했다. 그들의 살과 살 사이에 있는 옷이 더 얇게 느껴졌고 그녀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하자 그의 느낌은 격렬하게 솟구치는 사랑과 같아져서 프랜시스는 이성을 잃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저는 벨뷰 애비뉴에 살고 있어요.” 그녀가 몸을 빼내면서 말했다. “랜싱 가를 따라 철교 쪽으로 내려가면 돼요.”
“알았어요.” 그가 차를 출발시켰다.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돌고… 이제는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철길까지 곧장 가고요.”
프랜시스는 길을 따라 자기 동네에서 벗어나 철길을 건너서 강 쪽으로 가다가 비교적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거리로 접어들었다. 그곳의 집들은 뾰족뾰족한 박공에 나무를 깎아 다듬은 가두리 장식이 붙어 있어서 비록 집들 그 자체는 프라이버시와 안락함을 충분히 제공할 수 없고 무척 비좁았지만 가장 순수한 긍지와 낭만의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거리는 어두웠고 그는 곤혹스러워하는 젊은 여자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이 기울어져 그 거리로 접어들면서 자기가 어떤 잊혀진 기억의 가장 깊숙한 부분으로 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어느 집 현관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불빛은 그것 하나뿐이었고 그녀는 그 불 켜진 곳이 자기 집이라고 알려주었다. 차를 세웠을 때 그는 현관 불빛 너머로 어두컴컴한 복도와 가지가 달린 기둥 모양의 구식 외투걸이를 볼 수 있었다. “자, 이제 다 왔어요.”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젊은 남자라면 뭔가 다른 말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책들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다가 돌아앉아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욕망의 눈물이 어려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서글프지는 않게―자기 쪽 문을 열고 차 앞으로 돌아가 그녀 쪽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책을 들고 있지 않은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서 그녀와 나란히 두 단짜리 콘크리트 계단을 올라가 집 앞 정원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그 정원에는 달리아, 금잔화, 장미 같은 꽃들―가벼운 서리를 견뎌낸 꽃들―이 아직 그대로 피어 밤공기를 달콤 씁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현관 계단에서 그녀가 손을 풀더니 갑자기 돌아서서 그에게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안으로 달려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현관 불이 꺼지고 다음에는 복도 불이 꺼졌다. 잠시 뒤에 그 집 2층 한쪽에 불이 들어와 아직은 잎사귀들로 덮여 있는 나무를 비추었다. 그녀가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다음 그 집이 어두워지기까지는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프랜시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줄리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는 두 창문 중 작은 쪽을 열고 침대로 들어가 눈을 감았지만 눈이 감기기가 무섭게―그가 잠 속으로 빠져들기 무섭게―그 처녀가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닫혀 있는 문들을 거칠 것 하나 없이 자유롭게 통과하면서 방들 하나하나를 그녀의 광휘와 향기와 음악 같은 목소리로 가득 채웠다. 그는 그녀와 함께 옛 모리타니아 호를 타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중이었고 나중에는 그녀와 함께 파리에서 살고 있었다. 그 꿈에서 깨자 그는 일어나 열린 창가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서는 마음속으로 자기가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서 해보고 싶은 일을 찾아보다가 스키를 생각해냈다. 그의 어렴풋한 마음속에서 눈으로 두껍게 덮인 산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날이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광대하고 기분을 돋워주는 것들이 보였다. 어깨 너머로는 눈으로 채워진 계곡이 성긴 머리칼처럼 듬성듬성 나 있는 나무들로 하얀 눈밭에 얼룩이 진 언덕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추위에 모든 소리가 다 삼켜졌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리프트 기계장치의 요란하게 절거덕거리는 쇠 소리뿐이었다. 스키 코스의 불빛은 파란색이었고 턴을 하기가 일이 분 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또 이제는 눈이 온통 짙은 푸른색이어서 어디가 어디인지―눈 위로 얼어붙은 자리, 얼음으로 덮인 곳, 맨땅이 드러난 자리, 그리고 마른 눈이 쌓인 깊은 구덩이들―알아보기도 더 어려웠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동안 그는 첫번째 빙하시대에 형성된 슬로프의 윤곽에 맞추어 속도를 조절하면서 어떤 단순한 감정과 상황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밤이 되자 그는 어느 지저분한 시골 술집에서 몇몇 옛 친구들과 함께 마티니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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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자 프랜시스의 눈 덮인 산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의 마음속에는 파리와 모리타니아 호의 생생한 기억들만이 남았다. 잠을 설친 탓에 몹시 피곤했다. 그는 몸을 씻고 면도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일곱시 삼십일분 열차를 놓쳤다. 그 열차는 그가 막 기차역에 차를 댔을 때 출발했고, 인정사정없이 그에게서 멀어져가는 그 열차에 대해 느끼는 갈망이 그에게 사랑과 관련된 유머들을 상기시켰다. 그는 이제 텅 빈 플랫폼에서 여덟시 이분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맑게 갠 아침이었고 그 아침이 그의 뒤섞인 용건들 위로 번쩍이는 빛의 다리처럼 던져지는 것 같았다. 그의 기분은 열에 떠서 고조되어 있었다. 그 처녀의 이미지가 그를 신비하고 매혹적인 세상으로 연결시켜주는 것처럼 보였다. 차들이 주차장을 채우기 시작했고 그는 셰이디 힐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온 차들은 서리로 하얗게 덮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을의 그 분명한 첫번째 조짐이 그를 짜릿하게 했다. 급행열차―버펄로 아니면 올버니에서 오는 야간열차―가 플랫폼과 플랫폼 사이의 선로로 들어왔고 그는 맨 앞쪽 열차들의 지붕이 얇은 얼음 막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든 것들에서 보이는 기적 같은 현상에 감격해서 그는 식당차에 있는 승객들, 여행을 하면서 달걀을 먹고 냅킨으로 입을 닦고 있던 승객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침대에 더러워진 시트가 덮인 침대칸이 상쾌한 아침을 뚫고 일렬로 죽 이어진 셋집 창문들처럼 뒤따라왔다. 다음 순간 그는 참으로 엄청난 장면을 보았다. 침대칸 창문들 중 하나에서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여자가 금발 머리를 빗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빗고 또 빗고 하면서 환영처럼 셰이디 힐을 지나갔고 프랜시스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그녀를 뒤쫓았다. 늙은 라이트슨 부인이 플랫폼에서 그에게로 다가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뭐랄까, 내 생각엔 댁이 여기서 나를 사흘 아침 연달아 보게 된 것에 틀림없이 놀랐을 것 같아요.” 그녀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내 창문 커튼들 때문에 나는 정기 통근자처럼 되고 말았어요. 내가 월요일에 산 커튼들은 화요일에 교환했고 화요일에 산 커튼들은 오늘 교환하려고 해요. 월요일에 나는 내가 꼭 원하는 것을 구했지만―장미와 새들 무늬가 든 모직 태피스트리였지요―그걸 집으로 가져왔다가 길이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제 교환을 했는데 그걸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그것들도 길이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 뭐예요. 이제 나는 그 실내장식업자에게 길이가 제대로 된 것이 있기만을 하늘에다 대고 기도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댁도 알다시피 내 집은, 댁도 내 집 거실 창문들이 어떤지 알 테니까, 뭐가 문제인지 상상이 갈 거예요. 난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난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압니다.” 프랜시스가 응수했다.
“어떻게요?”
“안쪽에다 검은 페인트칠을 하고 닫아버리면 됩니다.”
라이트슨 부인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고 프랜시스는 그녀에게 자기가 일부러 무례하게 구는 것임을 분명히 알려줄 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마음이 너무 상해 다리까지 절뚝거리면서. 엄청난 느낌이 그를 휘감았다. 마치 빛이 그 주위에서 흔들리고라도 있는 것처럼. 그는 브롱크스를 지나가는 동안 머리를 빗고 또 빗고 할 비너스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자기가 일부러 무례하게 구는 짓을 즐겼던 때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가 하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그의 친구들과 이웃들 가운데는 총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멍청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는 그들 모두의 말에 똑같이 귀를 기울여주는 실수를 범했다. 또 변별력의 부족을 기독교적인 사랑과 혼동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 혼동이 총체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는 자기에게 그처럼 기운을 돋워주는 독자적인 느낌을 불어넣어준 그 젊은 여자가 고마웠다. 새들이, 홍관조들과 마지막 남은 개똥지빠귀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하늘은 에나멜처럼 빛났다. 조간신문에서 풍겨나는 잉크 냄새까지도 삶에 대한 그의 욕망을 부추겼고 그 주위로 펼쳐져 있는 세상은 분명히 하나의 천국이었다.
만일 프랜시스가 사랑의 어떤 체계―사냥하는 활로 무장한 요정들, 비너스와 에로스의 변덕스러움이나 아니면 하다못해 마법의 물약, 미약(媚藥), 그리고 애타는 마음과 달의 차고 기욺을 믿었더라면 그의 예민한 감정과 열에 들떠 고조된 기분을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년의 가을 사랑은 보편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는 자기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될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여겼지만 그가 느끼는 것에 가을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푸른 숲에서 스포츠를 즐기고 가려운 데를 긁고 같은 컵으로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의 비서인 레이니 양은 그날 아침 출근이 늦었는데―그녀는 일주일에 사흘은 아침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그녀가 들어오자 프랜시스는 정신과 의사가 자기에게는 어떤 조언을 해줄지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 젊은 여자는 그의 삶에 음악 같은 어떤 것을 다시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음악이 어쩌면 그를 곧장 군 재판소에서 강간범으로 재판받도록 잡아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행복감이 무너져 내렸다. 게이 헤드 해변에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네 아이들의 사진이 그를 꾸짖었다. 그가 근무하는 회사의 편지지 상단에는 라오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뱀에 감겨 있는 그 사제와 아들들의 모습이 그에게는 아주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그는 점심 식사를 핑키 트래버트와 함께했다. 입담 수준에서는 그의 친구들이 보이는 도덕관은 건전하고 융통성이 있었지만 그는 만일 자기가 애 보는 여자를 건드린다면 도덕이라는 카드로 만들어진 집이 그들 모두에게―줄리아와 아이들에게도―무너져 내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랜시스는 그런 전례를 찾아 셰이디 힐의 최근 역사를 돌이켜보았지만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거기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거기에서는 어떤 비열한 행위도, 이혼도, 하다못해 추문이 돈 적조차도 없었다. 그곳의 상황은 하늘의 왕국보다도 더 적절하게 조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핑키와 헤어지고 난 뒤 프랜시스는 보석상으로 가서 그 여자에게 선물할 팔찌를 하나 샀다. 그 은밀한 구매가 그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고, 보석상 점원의 표정은 얼마나 부루퉁하고 우스꽝스러웠으며, 그의 등 뒤로 지나가는 여자들은 얼마나 좋은 냄새를 풍겼던가! 5번가에서 세상의 무게에 눌려 어깨가 굽은 아틀라스 상 앞을 지나면서 프랜시스는 자기의 몸을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가꾸어가는 노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는 그 처녀를 언제 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팔찌는 그의 상의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려고 문을 열었다가 그는 그 여자가 현관홀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문 닫는 소리가 들리자 돌아섰다. 그녀의 활짝 피어난 미소가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완벽한 아름다움이 맑게 갠 날처럼―폭풍우가 몰아친 뒤 갠 날처럼―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자기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는 저항을 했지만 오래 저항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어린 거트루드 플래너리가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나 이랬기 때문이었다. “어, 위드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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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트루드는 한마디로 부랑아 같은 아이였다. 그 계집아이는 탐험을 즐기는 성격을 타고 태어났고 그래서 저를 사랑하는 부모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 아이의 체질이 아니었다. 플래너리 부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거트루드의 행동에서 그 아이가 심각하게 분열된, 술에 취해 싸움이 벌어지기 일쑤인 집안에서 자라난 아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어린 거트루드의 옷들이 다 해지고 얇은 것은 그 아이를 따뜻하고 깔끔하게 입히려는 아이 어머니의 투쟁에 대한 그 아이의 승리였다. 빼빼 마르고 씻지도 않은 거트루드는 블렌홀로 동네 주변의 이 집 저 집을 두루 돌아다녔고 그러면서 아기들, 짐승들, 제 또래의 아이들, 사춘기 아이들, 그리고 때로는 어른들에 대한 애착에 기초를 둔 관계를 맺기도 하고 깨기도 했다. 아침에 앞문을 열면 거트루드가 현관 입구의 계단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었다. 또 면도를 하러 욕실로 들어가면 거트루드가 변기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였다. 그리고 어린 아들의 테두리 난간이 달린 침대를 들여다보면 그 침대가 비어 있고 좀 더 멀리까지 찾아보면 거트루드가 그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서 옆 동네로 밀고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었다. 그 아이는 도움이 되었고, 어디에서나 보였고, 정직했고, 배고파했고, 충실했다. 그리고 제 마음이 내켜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가야 할 시간이 되었어도 그 아이는 누가 뭐라고 하든 무심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거트루드.” 사람들은 밤이면 밤마다 이 집 아니면 저 집에서 하는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거트루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야, 거트루드.” “너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는 게 좋겠다, 거트루드.” “내 너한테 이십 분 전부터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어, 거트루드.” “네 엄마가 걱정하고 계실 거다, 거트루드.” “집으로 돌아가, 거트루드, 집으로 돌아가.”
때로는 사람 눈 주위의 주름들이 부식된 암석층처럼 보이기도 하고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눈 그 자체가 당혹스러울 만큼 동물적인 느낌을 불러일으켜서 어쩔 줄 모르게 되기도 한다. 프랜시스가 어린 계집아이에게 던진 눈길이 바로 그렇게도 험악하고 괴상해서 그 아이는 그 눈길에 겁을 먹었다. 그가 호주머니를 뒤져―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이십오 센트짜리 동전을 하나 꺼냈다. “집으로 돌아가, 거트루드, 집으로 돌아가.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거트루드, 아무에게도…” 줄리아가 위층에서 빨리 옷 갈아입으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숨이 턱 막혀서 거실로 달려 들어갔다.
그날 밤 늦게 자기가 앤 머치슨을 집까지 태워다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프랜시스와 줄리아가 참석한 파티가 이어지는 동안 내내 황금의 실처럼 이어져서 그는 멍청한 농담에도 큰 소리로 웃어대고 메이블 머서가 기르던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연인과 만날 약속을 마음 한구석에 두고 있는 여느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지개를 펴고 하품을 하고 한숨을 쉬고 구시렁거렸다. 팔찌는 그의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코에서는 풀 냄새가 났고 그는 차를 어디에 세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커의 옛 저택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고 그곳의 진입로는 연인들의 오솔길로 쓰였다. 또 타운센드 가도 막다른 길이어서 그는 마지막 집을 지나 거기에 차를 댈 수 있었다. 그리고 엘름 가에서 강둑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좁은 길은 풀들이 웃자라 있었지만 그는 아이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본 적이 있었고 관목숲으로 가려진 곳까지 깊숙하게 차를 몰아갈 수도 있었다.
위드 부부는 그 파티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고 그들을 초대한 주인과 안주인은 그들 네 사람이 현관홀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자기네들의 행복한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여자는 내 여자요.” 집주인이 자기 아내를 꼭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은 내 푸른 하늘이고 십육 년이 지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이 사람 어깨를 깨물고 있지요. 이 여자는 내가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거든.”
위드 부부는 말없이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프랜시스는 차를 진입로로 몰고 올라가 엔진을 공회전시키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차는 차고에 넣어도 돼요.” 그것이 줄리아가 차에서 내리며 한 말이었다. “내가 그 머치슨이라는 처녀에게 열한시가 되면 가도 된다고 했고 누군가가 그 여자를 집으로 태워 갔으니까요.” 그녀가 문을 닫았고 프랜시스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이제 그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바보는 용서받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광포한 색정, 질투, 그것이 그의 감정을 너무도 상하게 해서 눈물이 다 솟았다. 심지어 자신이 경멸스럽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현재 보이고 있는, 팔을 뻗쳐 운전대에 올려놓고 사랑을 찾아 그 팔에다 머리를 묻은 모습을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는 어렸을 때 열성적인 소년단원이었는데, 그 어린 시절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다음 날에는 사무실에서 일찍 나와 스쿼시를 연속으로 몇 게임 했지만, 그 운동과 샤워로 욕구가 강해지자 차라리 책상에 그대로 붙어 있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꽤 쌀쌀한 밤이었다. 대기 중에 날씨가 바뀔 것이라는 조짐이 강하게 배어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섰다가 그는 여느 때와는 다른 술렁거림을 감지했다. 아이들이 모두 가장 좋은 옷들로 차려입었고 줄리아가 계단을 내려왔을 때는 옅은 자주색 드레스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 모양의 브로치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술렁거림의 이유를 설명했다. 일곱시에 후버 씨가 크리스마스카드에 들어갈 가족사진을 찍어주러 오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프랜시스의 푸른색 양복과 색깔이 좀 들어 있는 넥타이를 꺼내놓고 있었다. 그해의 사진은 컬러사진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줄리아는 크리스마스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즐기는 그런 유의 의식이었다.
프랜시스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그날 하루 일로 피곤했고, 갈망으로 피곤했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그 피곤을 더 깊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앤 머치슨 생각을 하다가 줄리아의 화장대에서 비치는 분홍색 램프들의 불빛에 갇혀 있기보다는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그래서 줄리아의 책장으로 건너가 편지지를 한 장 꺼낸 다음 거기에다 쓰기 시작했다. “소중한, 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누구도 그 편지를 보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아무런 자제도 하지 않고서 ‘하늘의 축복’이니 ‘사랑의 둥지’니 하는 글귀들을 적었다. 그러면서 그는 침을 흘리고 한숨을 쉬고 몸을 떨었다. 줄리아가 그에게 내려오라고 소리를 쳤을 때 그의 공상과 현실 세계 사이에 놓인 심연이 그렇게도 넓게 벌어져서 그 소리가 그의 심장 근육에 악영향을 미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줄리아와 아이들은 현관 앞 계단에 서 있었고 사진사와 그의 조수는 그들 가족과 집 입구의 건축미를 모두 보여주기 위해 용량이 두 배인 배터리가 딸린 투광조명등을 설치해놓고 있었다. 늦은 기차를 타고 돌아와 집으로 가던 사람들이 위드의 집에서 크리스마스카드에 들어갈 사진을 찍고 있는 장면을 보려고 차 속도를 늦췄다. 후버 씨가 만족할 때까지 미소를 짓고 입술에 침을 축이고 하는 데는 삼십 분이 걸렸다. 조명등의 열기 때문에 쌀쌀한 공기 중에서는 상쾌하지 못한 냄새가 풍겼고 그 불들이 꺼졌을 때는 프랜시스의 망막에 그 잔상들이 어른거렸다.
그날 밤 좀 더 늦게, 프랜시스와 줄리아가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줄리아가 문간으로 갔다가 클레이턴 토머스를 안으로 들였다. 그는 얼마 전 줄리아가 그의 어머니인 헬렌 토머스에게 준 연극표 몇 장 값을 갚으러 온 것이었다. 줄리아는 그녀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는 양심 바른 사람이어서 굳이 갚으려고 들었다. 줄리아가 그에게 안으로 들어와서 커피나 한잔 같이하자고 했다. “저는 커피는 마시지 않을 겁니다.” 클레이턴이 대답했다. “하지만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가 줄리아를 따라 거실로 들어와서 프랜시스에게 인사를 하고 어색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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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턴의 아버지는 전쟁 중에 전사했고 그 젊은이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기미는 고유의 환경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셰이디 힐에서 구성원이 하나 빠진 가족은 토머스 모자뿐이어서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온전해서 자녀들이 여럿이었다. 클레이턴은 대학 2학년인가 3학년생이었고, 그와 그의 어머니는 팔려고 내놓은 커다란 집에서 단둘이 살고 있었다. 클레이턴은 한때 말썽을 좀 피웠었다. 몇 해 전 그는 돈을 훔쳐가지고 달아났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따라잡았을 때는 캘리포니아까지 가 있었다. 그는 키가 컸고 그저 그런 용모에 뿔테 안경을 썼고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자네 학교로는 언제 돌아가지, 클레이턴?” 프랜시스가 물었다.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클레이턴이 대답했다. “어머니에게 돈도 없고 또 그런 온갖 겉치레에 의미도 없고 해서요. 저는 일자리를 구할 거고 집이 팔리면 뉴욕에서 아파트를 하나 구할 거예요.”
“셰이디 힐이 그리워지지 않겠어?” 줄리아가 물었다.
“아뇨.” 클레이턴이 대답했다. “저는 여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어째서지?” 프랜시스가 물었다.
“글쎄요, 여기에는 제가 찬성하지 않는 게 많아요.” 클레이턴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이를테면 클럽 댄스 같은 것들이요. 지난 토요일 밤에 저는 댄스가 끝나갈 무렵 안을 들여다보았다가 그래너 아저씨가 미노트 아주머니를 트로피 상자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걸 봤어요. 두 분 모두 술에 취해 있었고요. 저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는 것에 찬성하지 않아요.”
“토요일 밤이었으니까…” 프랜시스가 얼버무렸다.
“그리고 비둘기장들도 모두 가짭니다.” 클레이턴이 말을 이었다. “또 사람들이 자기네 삶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도 그렇고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는데 제게 셰이디 힐이 정말로 잘못되어 보이는 건 그 어떤 미래도 없다는 겁니다. 너무도 많은 에너지가 이곳을 영속시키는 데―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을 지켜나가거나 하는 데―낭비되고 있어요. 그래서 이곳 사람들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생각은 더 많은 통근 열차들과 더 많은 파티들뿐이지요. 저는 그게 건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커다란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람들이 커다란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을 계속 다니지 못하게 된 건 너무 안됐어.” 줄리아가 말했다.
“저는 신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클레이턴이 말을 받았다.
“어떤 교회 쪽으로?” 프랜시스가 물었다.
“유니테리언, 신지학파, 초월주의, 인본주의파로요.” 클레이턴이 대답했다.
“에머슨이 초월주의자 아니었던가?” 줄리아가 물었다.
“저는 영국의 초월주의자들을 말하는 겁니다.” 클레이턴이 대답했다. “미국 초월주의자들은 모두 얼간이들이거든요.”
“그런데 자네, 무슨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지?” 프랜시스가 물었다.
“글쎄요, 저는 출판 쪽 일을 하고 싶어요.” 클레이턴이 대답했다. “하지만 모두들 거기에서는 할 일이 없을 거라고들 하는군요. 그렇더라도 그건 제가 관심을 갖는 일입니다. 저는 지금 선과 악에 대해 장편의 운문극을 쓰고 있어요. 어쩌면 찰리 아저씨가 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