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빠진의 「노예의 마음」을 타임캡슐 단편으로 소개합니다. 다음은 창비세계문학 중국편을 엮고 옮긴 이욱연 선생님의 작품 소개글입니다. “빠진의 초기 작품으로 아나키즘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소설에는 펑과 졍이라는 대립하는 두 계급을 상징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노예의 후손이고 한 사람은 노예 주인의 후손인데, 이 두 사람이 동료 학생으로 만난 것이다. 펑의 할아버지는 몸과 마음까지 철저히 노예화된 노예, 즉 자신이 노예인 줄도 모르는 노예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노예라는 것과 세상이 불공정하다는 것을 알지만, 감히 노예로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행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펑은 자신의 조상이 노예라는 것을 밝힌 가운데 반항과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혁명당에 가입한다. 노예의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한 몸부림이 혁명당에의 투신으로 나타난 것인데, 그는 결국 체포되어 총살당한다. 노예의 혈통을 끊기 위한 그의 선택이었다. 이런 펑을 만난 뒤, 노예의 수를 늘리는 것이 평생의 꿈인 노예 주인의 후손 졍은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펑이 한동안 보이지 않을 때 그는 공포와 죄책감에서 벗어나 노예 숫자를 늘렸고, 노예에 둘러싸여 여유롭고 편안한 귀족의 삶을 누리던 중에 펑이 총살을 당했다는 소식에 펑과 관련한 과거의 모든 것을 잊게 된다. 펑은 "자기 행복을 모두 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고도 조금도 후회를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노예의 마음이야. 그 마음을 우리 조상들은 할아버지에게 전해주었고,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전해주었고, 아버지는 다시 나에게 전해준 거야"라고 했다. 그가 죽음으로써 노예의 마음도 사라졌을까?” - 편집자
노예의 마음
“우리 조상은 노예였어!” 펑(彭)이 어느날 자랑스럽게 나에게 말했다.
난 친구가 많다. 그들도 나에게 자기 조상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쭐거리면서 말했다. “우리 조상은 얼마나 노예가 많았는데!” 그 친구들 대부분은 지금도 노예를 여러 명 거느리고 있었다. 물론 몇몇은 노예 숫자가 줄거나 완전히 없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런 친구들은 지나간 황금시대를 늘 안타깝게 회상하곤 했는데, 그들의 행동이나 이야기에서 알 수 있었다.
나의 경우, 내 기억에 따르면 이렇다.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노예가 네 명이었고, 할아버지는 여덟 명, 아버지 대가 되어서는 열여섯 명이었다. 나도 노예를 열여섯 거느리고 있다.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 내가 노예 주인이어서이다. 그리고 내게는 꿈이 있다. 노예 숫자를 열여섯 명에서 서른두 명까지 늘이는 것이다.
그런데 내 삶에 펑이 등장해서는 난데없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채 심지어는 뽐내듯이 나에게 자기 조상은 노예였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그가 틀림없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펑의 이력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내 친구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다른 친구들의 경우와 달랐다. 그는 우연히 내 삶에 뛰어들어왔다. 사정은 이러했다.
어느날 나는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생각에 빠져 넋을 잃은 채 찻길로 걸음을 내디뎠다. 차 한대가 뒤에서 다가오면서 계속 경적을 울려도 나는 듣지 못했다. 차가 나를 거의 치려는 순간 갑자기 억센 팔이 내 어깨를 잡고는 옆으로 밀쳤다. 나는 땅에 넘어질 뻔했고 차는 안전하게 지나갔다. 정신을 수습하고서 돌아다보니 큰 키에 깡마른 청년이 무뚝뚝한 얼굴로 내 뒤에 서 있었다. 나는 고맙다고 했다.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은 채 그저 날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눈길이 날카롭던지!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앞으로는 조심하라고.” 그러고는 뚜벅뚜벅 가버렸다. 나는 그날 그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과가 달랐다. 나는 문학을 공부했고, 그는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우리는 같은 수업을 들은 적이 없었지만, 자주 만났다. 만날 때면 그저 두세 마디 이야기를 건넬 뿐이었고 어떤 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차가운 눈길만 교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친구가 되었다.
우리 둘이 길게 이야기한 적은 거의 없었고, ‘날씨가 좋네’와 같은 인사치레를 건네본 적도 없다. 우리는 단도직입으로 말을 나누었다.
우리 둘은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와 친구가 된 것은 태반이 감격과 호기심 때문이었다. 난 그를 존경한 것 같다. 하지만 그를 결코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는 외모나 말이나 행동거지 할 것 없이 따뜻한 정이라곤 없었다. 어디로 보나 그는 냉혹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의 처지가 어떤지는 나도 몰랐다. 그가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생활하는 것을 보면 돈있는 집 자식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 무척 절약했고 영화도 보지 않고 무도장에도 가지 않았다. 하루종일 수업 듣는 것 말고는 숙소에 누워 책을 보거나 운동장이나 학교 밖에서 산책을 했다. 그는 웃지도 않았고 말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머릿속에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하고 삼년 동안 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삼년 내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하루는 내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펑 형, 진종일 그렇게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데, 도대체 뭘 그리 생각하는 거야?”
--------------------------
작가 소개
빠진 (巴金, 1904-2005)
쓰촨(四川)성 청떠우(成都) 출신이다. 크로포트킨에 심취하여 아나키즘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이런 영향으로 관료 지주 집안에 반발하여 1922년에 집을 나와 샹하이로 갔다. 1923년 프랑스에 유학하여 처녀작 『멸망(滅亡)』을 써서 귀국 후인 1929년에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1931~33년에 『안개(霧)』, 『비(雨)』, 『번개(電)』로 이어지는 애정 삼부곡을 썼고, 이어 그의 대표작인 『가(家)』(1933), 『봄(春)』(1938), 『가을(秋)』(1940)로 이루어진 격류 삼부곡을 발표했다. 봉건 대가정의 젊은이들이 겪는 비극과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환영을 받았다. 항일전쟁 기간 중에는 국민당이 통치하는 당시 현실의 어둠을 비판하는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 작가협회 부주석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문혁 때 그의 아나키즘 사상이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으면서 고초를 겪었다. 문혁이 끝난 뒤 1977년에 복권되었고, 1978년부터 문혁 시기의 경험을 담은 『수상록(隨想錄)』을 써서 문혁을 고발하고, 문혁이 일어난 데 대한 중국인들, 특히 지식인들의 책임과 총체적 반성을 촉구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고, 죽을 때까지 중국작가협회 회장을 맡았다. 대표작으로 『가』, 『차가운 밤(寒夜)』, 『휴식의 뜰(憩園)』 등이 있다.
-------------------------
역자 소개
이욱연
서강대 중국문화전공 교수. 중국 현대문학을 연구하면서 중국 문화와 중국 문학의 최근 동향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루쉰과 모옌을 비롯한 중국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이욱연의 중국문화기행』, 『포스트 사회주의 시대의 중국 문화』, 『곽말약과 중국의 근대』 등을 펴냈고,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인생은 고달파』, 『나비』 등을 번역했다.
**************************************************
그는 썰렁하게 대답했다. “자넨 몰라.” 그러고는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의 대답은 훌륭했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이 나이에 왜 그리 어둡고, 왜 그리 괴팍한가? 그 이유를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왜 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상하기만 해서 더더욱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런 뒤로 나는 더욱 그의 행동을 주의깊게 지켜보았고 그가 보는 책과 그가 어울리는 친구를 유심히 살폈다.
그는 사실 친구라고 해보아야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가 아는 사람이 몇몇 있었지만 아무도 그와 내왕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도 다른 사람의 친구가 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는 늘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상대가 누구이건 늘 그랬다. 여학생들이 이야기를 걸어도 좀처럼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잘 알았지만, 나에게도 쌀쌀맞게 대했다. 내 생각에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가 무슨 책을 보는지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 그는 꽤나 잡다하게 이것저것 보았고, 온통 이상한 책들 투성이로 나는 저자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책들이었다. 게다가 어떤 책들은 일년 내내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채 찾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책들이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책을 읽었다. 어제는 소설책을 읽고 오늘은 철학책을 읽고 내일은 역사책을 읽는 식이었다. 그가 읽는 책으로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책을 읽어보지 않고서는 책의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가 불쑥 내 방에 왔다. 이번 학기부터 나는 학교 밖에서 살고 있었다. 학교 부근에 살기 편한 방을 얻었는데, 이층이어서 창문으로 학교와 학교 앞 도로, 그리고 새로 생긴 조그만 골프장도 볼 수 있었다.
펑이 방에 들어와 주저없이 새로 산 하얀 소파에 앉았다. 낡은 외투의 먼지를 털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책상에서 책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에게 눈길을 한번 주고는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눈은 책에 있었지만, 머리에는 온통 그의 헌 외투 밑에 깔린 새로 산 소파 생각뿐이었다.
“졍(鄭) 형, 지금 중국에 노예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 그가 갑자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몇백만은 될걸.”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며칠 전에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난 그런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몇백만? 실제로는 몇천만도 넘어!” 펑이 괴로운 목소리로 변했다.
“노예의 의미를 넓게 잡으면 중국 인구 가운데 적어도 4분의 3 이상이 노예야.”
‘어쨌든 난 노예가 아니야.’ 나는 다행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생각했다. 다시 고개를 들고 펑을 보았을 때, 난 그가 왜 그리 괴로워하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자넨 노예가 있나?” 그가 갑자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한테 노예가 없는 줄 알고 업신여기고 있다고 생각했고, 나를 한참 잘못 보고 있구나 싶었다. 우리집에는 분명 열여섯 명의 노예가 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지었다. 나는 뻐기듯이 대답했다. “나 같은 사람들이야 당연히 노예가 있지, 우리집에는 노예가 열여섯 명 있어!”
내 말을 들고서 그가 픽 웃었다. 순간, 나는 내게로 날아오는 그의 눈길에 깃든 한없는 경멸을 발견했다. 그의 눈길에는 존경도 부러움도 없었다. 노예를 열여섯이나 데리고 있는 사람을 경멸하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알아냈다. 질투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의 경제여건을 볼 때 그에게 노예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동정하듯이, 안타깝다는 듯이, 그에게 말했다. “자네 집에도 노예가 있겠지?”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나를 쏘아보는 눈길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 조상은 노예야!” 그가 이 말을 할 때, 자랑스러운 업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그럴 리가 있나. 자네 뭘 그리 겸손해하나. 우린 친구 아닌가.” 내가 말했다.
“겸손이라고? 내가 뭣 하러 겸손을 떨겠어?”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자네가 자네 조상이 노예였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변명하듯 말했다.
**************************************************
“그래, 내 조상은 원래 노예였어.”
“하지만 자네는 대학에 다니고 있지 않은가…” 내가 말했다. 나는 그래도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네 얘기는 노예의 후손들은 대학에 다녀서는 안된다는 뜻인가?” 그가 거만하게 물었다. “내가 보기에 자네 조상들도 노예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는 않네.”
나는 머리에 채찍을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아 머리를 감싸쥐고 일어났다. 일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의 앞에 서서 잔뜩 화가 나서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우리 조상이 자네 조상 같은 줄 아나? 아냐, 절대 아니야. 우리 부친은 노예를 열여섯이나 거느렸고, 우리 조부는 노예가 여덟 명이었어. 증조부는 노예가 넷이었고. 그리고 그 윗대 조상들은 그보다 더 노예가 많았다고.” 사실, 그 윗대까지 올라가서도 노예를 데리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조그맣게 장사를 했으니 노예가 없었을 것이고 노예의 후손이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하지만 나는 늘 그가 높은 벼슬을 하고 호화스러운 저택에서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수백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살았다고 생각해왔다.
자주는 아니었어도 몇번은 사람들에게 “우리 조상도 높은 벼슬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감히 내 면전에서 내가 노예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건 보통 모욕이 아니었다. 평생 이렇게 심한 모욕은 처음이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기어이 복수를 하고 말 것이다. 나는 증오에 찬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우리의 눈길이 부딪쳤다. 그 순간 그의 싸늘한 눈길을 보고서 나는 차츰 평상심을 회복했다. 그를 잘 대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어서였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 자네 말을 믿네. 자네 같은 사람은 분명 노예 주인 집안에서 태어났을 거야. 나 같은 사람이 노예 주인 집안에서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내가 자부심을 느끼는 걸세.” 그의 태도는 아주 거만했고, 말은 비꼬는 투가 역력했다.
나는 그가 지금 질투가 나서 미칠 지경인 상태라고 생각했고, 그러자 픽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분노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손으로 뭔가를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그의 눈앞에서 나를 털어내는 것 같았다. “웃는군. 왜 웃지? 그래, 나는 노예의 후손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 그들의 마음하고 내 마음이 가까워져서 그래. …자네가 뭘 알겠어? 좋은 방에서 따뜻한 이불 덮고 달콤한 꿈을 꾸며 사는 자네가 알 턱이 없지. …난 정말 자네 같은 사람들의 눈을 동그래지게 만들고 싶어! …그래, 나는 노예의 후손이야. 내가 감출 게 뭐 있어. 난 내가 노예의 후손이라는 것을 조금도 부끄럼없이 선언할 수 있어. 부모도 노예였고, 할아버지도 노예였어. 증조부도 노예였고.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아마 우리 집안에는 노예가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을 거야.”
그가 분명 제정신이 아니고, 그래서 여기서 사고를 치지 않도록 핑계를 만들어 내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넨 노예가 열여섯 명 있지. 만족스럽고, 즐겁고, 자랑스럽겠지. 그런데 자네, 자네 노예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아나? 노예 이야기를, 한가지라도 들어본 적 있나? …아마 없을 거야. 자넨 모를 거야.”
“그래, 내가 자네한테 노예 이야기를 하나 해주지. …우리 할아버지는 아주 충성스러운 노예였어. 나는 우리 할아버지보다 더 충성스러운 사람을 보지 못했어. 주인집에서 사십오년을 고생고생하며 일했지. 할아버지는 노예의 아들이어서 아주 어려서부터 노예가 되었지. 내가 기억할 수 있을 때 이미 할아버지는 백발이었어. 그때 우리는 어느 관사 뒤편의 낡은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 나 이렇게 살았어. 어머니는 집에서 편히 자는 경우가 드물었지. 어머니는 주인집에서 마님하고 아가씨 시중을 들었고. 나는 할아버지가 큰주인나리나 작은주인에게 꾸중 듣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할아버지는 얼굴을 붉힌 채 연방 “알겠습니다요”라고 말했지. 겨울에 사나운 바람이 낡은 집을 뒤흔들면 찬바람이 문틈으로 새어들어와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침상은 어찌나 딱딱하고 이불은 또 어찌나 얇던지. 어린아이와 할아버지, 그리고 장년이 되어가는 아버지는 마른 나뭇가지와 건초를 찾아 바닥에 불을 피우고는 쪼그려앉아서 불을 쬐었어. 그때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또 설교를 시작했어. 커서 정직하고 성실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당신처럼 충성을 다해 주인을 모셔야 한다고. 할아버지는 착한 마음으로 살면 꼭 좋은 일이 있다고 했지. 아버지는 말씀이 없던 분이셨어. 할아버지가 일장 설교가 끝날 무렵, 불기운도 점점 사그라지고 시간도 늦어서 우리 세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서 침상에서 추운 밤을 보냈지.”
**************************************************
“그런데 할아버지가 말한 ‘좋은 일’이 결국 일어났어. 어느 여름날 새벽에 할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거야. 나중에 화단 홰나무가지에 목을 맨 채 발견되었지. 나는 할아버지의 죽은 모습은 보지 못했어. 어머니가 보지 못하게 했고, 사람들이 서둘러 시체를 처리해버렸거든. 할아버지는 나무 판때기에 눕혀졌고 거적으로 상반신을 덮어서, 난 할아버지의 그 튼튼하고도 더러운 발만 겨우 볼 수가 있었지. 할아버지는 그렇게 가셨고, 그게 할아버지와 마지막이었어.”
“할아버지가 왜 목을 매셨을 것 같나? 소문에 그 이유는 간단했어. 할아버지가 죽기 전날에 주인이 귀중품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할아버지가 그걸 훔쳐가서 팔았다고 한 거야. 할아버지는 자기처럼 주인에게 충직한 몸이 어찌 감히 주인 물건을 훔치겠느냐고 하소연했지. 하지만 그 하소연은 주인에게 뺨 두 대를 맞는 것으로 돌아왔고 갖은 욕을 하더니 할아버지더러 물어내라고 했어. 할아버지는 수치스럽다고 생각했어. 주인에게 송구스럽다고 여긴 거지. 주인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주인의 은혜에 보답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생각할수록 괴로웠지. 더구나 노예 노릇을 오래 했어도 모아놓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그 돈을 물어낼 길도 없었지. 결국, 사십오년 동안 충성을 다해 주인을 모셨건만 결과는 허리띠로 정원 홰나무에 자기 목을 매는 것이었어.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말한 ‘좋은 일’이었지.”
“관사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할아버지가 불쌍하다고 하면서도 할아버지가 물건을 훔쳤다고 생각했지. 그때부터 나는 노예의 후손이자 도둑의 손자가 되었지. 하지만 난 할아버지가 물건을 훔쳤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어. 할아버지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믿었지. 할아버지는 좋은 분이셨거든. 그뒤, 밤이면 아버지는 늘 나를 품에 안고 주무셨어. 아버지는 낮에 일이 힘들어서 금방 잠이 들었지. 하지만 난 착한 할아버지가 생각나곤 했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평소 인자하던 할아버지 얼굴을 떠올렸어. 눈물이 났어. 눈물이 눈을 가렸지. 문득 내가 할아버지 품에 있는 것 같더군. 난 할아버지를 꼭 껴안았어. 감정이 북받쳐 소리를 질렀지. ‘할아버지, 전 믿어요. 할아버지가 훔쳤을 리가 없어요. 절대 할아버지가 훔치지 않았어요.’”
“그때 말소리가 들렸어. ‘뉴얼아, 너 뭐라고 하는 거냐?’ 아버지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지. 난 소띠여서 어려서 이름이 뉴얼(牛兒)이었어. 난 눈물을 닦았고, 할아버지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어.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였고. 나는 큰 소리로 울었어. 아버지도 잠을 잘 수가 없었지. 아버지도 우셨어. 아버지가 날 달래면서 말하더군. ‘뉴얼아, 네 말이 맞다. 할아버지가 훔친 게 아니야. 난 누가 훔쳤는지 알아.’ 그래서 나는 아버지 어깨를 끌어당기며 다급하게 말했어. ‘누가 훔쳤는지 말해주세요. 누가 훔쳤냐고요? 아버지는 아시죠? 나한테 말해주세요.’ 아버지는 난처해 보였지. 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한숨을 쉬더군. 그런 뒤, ‘이야기해줄 테니,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고 약속해라.’ 나는 맹세했어. 아이의 말이라 믿음이 가지 않았겠지만 아버지는 내게 말해주더군. 그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어. ‘난 큰도련님이 훔쳤다는 것을 안단다. 네 할아버지도 아시고. 이 일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된다. 할아버지가 나서서 당신 목숨을 버리셨으니 나도 진실을 입밖에 낼 수가 없다. 이제 돌아가셨으니 말해도 믿을 사람도 없고, 도리어 우리만 성가셔진다…’”
펑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는 잠시 멈추었다. 이어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내가 지금 전한 아버지 말은 물론 꼭 그대로가 아니야. 하지만 핵심은 잊지 않았어. 설마 내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계속 이야기하라고 했다. “나도 아버지가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몰랐어. 차마 더 물어보지 못했고. 난 할아버지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고, 그래서 많이 울었지.”
“그때 내게는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어. 난 부모님을 사랑했고, 부모님도 날 사랑했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 얼굴에는 늘 수심이 가득했지. 웃는 모습을 본 일이 드물어.”
“어느날 밤, 겨울이었어. 아버지는 나랑 방에서 불을 쬐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밖이 시끄럽더니, ‘사람 살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난 놀라서 아버지 품에 숨어서 아버지 목을 꼭 껴안았지. 아버지가 내 귀에 대고는 따뜻하게 말했지. ‘괜찮아. 안 무서워. 아빠가 있잖아.’ 조금 있자 밖이 조용해졌어. 몇시간쯤 지났을까, 누가 와서 아버지를 부르더군. 주인나리가 부른다는 거였어. 가서는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더군. 나는 혼자 방에서 덜덜 떨었어. 조금 있으니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돌아왔지. 두 사람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더군. 아버지는 나를 안고 계속 우셨어. 어머니에게는 가슴아픈 말을 하셨지. 그날 밤 우리 셋은 꼭 끌어안고 잤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눈 이야기는 기억이 안 나. 당시 어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었거든. 몇마디는 기억나. ‘내가 죽는 게 나아, 살아봤자 뭐 하겠어? 우린 주인의 노예이니 주인 말을 들을 수밖에. …우리가 자식을 더 많이 낳고 그 아이들이 손자를 낳아봤자 남의 노예가 될 뿐이야. 누구도 노예의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어. 이렇게 살아 뉴얼마저 남의 노예가 되고 노예의 혈통을 이어가게 하느니 차라리 내 목숨을 주인에게 팔아서 뉴얼을 공부시켜 이런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나아…”
펑은 그때 눈이 붉어졌다.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한 말은 지금도 기억나.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아버지 말을 내 말투로 전해서 자네들 말투와 비슷해졌지만 그래도 그 말 속에 아버지의 그 마음이 뛰고 있는 것을 얼마간 느낄 수 있을 걸세.”
“…어머니는 별말이 없이 그저 아버지를 안고 우셨어. 입으로 웅얼거리면서 말하시더군.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그래요…’ 난 두 분이 왜 그러는지 몰랐지만 나도 울었어.”
**************************************************
“이튿날 새벽 침상에서 자고 있는데, 누가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지. 어머니가 아버지 옷소매를 잡고 울었고 나도 어머니를 따라했어. 그 사람들이 그러더군, 아버지가 어제저녁에 사람을 때려죽였다고. 믿을 수가 없었어. 어제저녁, 아버지는 분명히 나를 데리고 불을 쬐고 있었거든.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을 때 아버지는 나를 품에 꼭 안아주었고,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으니 밖에 나가 사람을 때려죽였을 리가 없는 거지. 아버지는 따지지도 않고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한테 끌려갔어. 나는 마음이 다급했고, 뛰어가 아버지 소매를 붙잡고 늘어졌는데,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더군. 그 사람들은 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아버지는 끌려가셨어.”
“그뒤로 아버지를 다시 보지 못했어. 들리는 말로는 몇달 되지 않아 감옥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하더군. 어머니도 관사 일을 그만두셨지. 우리는 관사 밖에 살게 되었고, 난 공부할 기회를 얻었지. 돈은 다 주인이 주었고. 주인은 아버지 목숨을 사서 자기 아들 대신 죽게 한 것이었지(난 나중에 작은주인님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 주인은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어. …자네가 보기에 내가 감격했을 것 같은가? 아닐세. 난 그를 증오했어. 그의 아들도. 그들은 내 원수였고,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해쳤어. 하지만 난 그들의 돈이 필요했어. 우리 아버지가 목숨으로 바꾼 돈 말이야. 아버지는 목숨을 바쳐서 내게 지금 이런 여건을 만들어준 것이지. 아버지의 목적은 이루어졌어. 어쨌거나 난 노예의 혈통을 끊었으니까 말이야…”
그가 갑자기 말문을 닫았다. 그의 얼굴에 무서운 경련이 일었다. 그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폭발하려는 분노를 참는 것 같았다. 속에 어떤 말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에 얼마간 마음이 움직이기는 했지만, 난 여전히 날카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눈길이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자네 남에게 말 못할 무슨 고충이라도 있나?”
내 뜻을 알아차린 듯, 그의 낯빛이 이내 붉어졌다. 부끄러워서인지 분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몇걸음 걷더니 다시 앉았다. 갑자기 얼굴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그가 말했다. “맞아, 내 이야기는 이게 다가 아니야.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내가 다 이야기하지. 하루는 학교에서 좀 일찍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어떤 남자와 침상에 앉아 있더라고. 두 사람은 나를 보지 못했고, 나는 문밖에 숨었어. 분노와 수치심이 일더군. 나는 밖에서 죽어라고 공부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집에서 다른 남자와 놀아나다니. 그런 생각에 마음이 아팠어. 하지만 난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그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모욕을 주기는 싫었어. 그 남자가 작은주인님이라는 것도 알았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 작은주인님 말이야! 우리 할아버지를 해치고 아버지를 해친 그 인간이 이제 어머니까지 해치려고 온 것이지. 어머니가 작은주인님에게 말하는 것 같더라고. ‘어서 가세요. 어서. 아이가 올 시간이에요.’ 작은주인님이 뭐라고 몇마디 하자 어머니가 다시 말하더군. ‘제발 오지 마세요. 이렇게 오시다 보면 아이와 맞닥뜨릴 거예요. 제발 은혜를,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방으로 들어갔더니 어머니 혼자 침상 모퉁이에 앉아서 고개를 파묻고 멍하니 있더라고. 내가 급하게 어머니 앞으로 다가가자 깜짝 놀라면서 얼굴이 빨개지면서 물었어. ‘너 왔니?’”
“나는 어머니 다리를 꼭 껴안았지. 창피하고 화가 나서 말했어. ‘엄마, 엄마가 창피해 죽겠어. 아빠가 죽은 지 일년도 안되었는데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니!’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 ‘난 학교에서 죽어라 공부하는데 엄마는 이런 짓이나 하고, 창피해 죽겠어.’ 엄마는 ‘뉴얼!’ ‘뉴얼!’ 하면서 내 이름만 부르더니 침상에 몸을 숙이고는 엉엉 울었어. 어머니 울음소리에 내 마음이 약해졌어.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어떻게 매일 밤마다 내 옆에서 내 공부를 도와주었는지, 어떻게 날 위로하고 힘을 주었는지가 떠올랐어.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잘못을 빌었어. ‘엄마, 내가 잘못했어요. 제가 그런 말로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용서하세요.’ 어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고 앉아서는 나를 곁으로 부르시더군. 그러고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어. ‘뉴얼아, 네 잘못이 아니다. 내가 너한테 용서를 구해야 한다. 네 아버지가 죽은 뒤로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다 너 때문이다. 너 아니었으면 난 벌써 네 아버지 곁으로 갔을 게다. 너 아버지가 죽기 전에 한 말 기억하니? 아버지는 널 꼭 공부를 시켜 노예가 되지 않게 하라고 했어. 다른 인생을 살라고 말이다. 네 아버지가 당신 목숨을 던졌는데, 나라고 목숨이 아깝겠느냐? 전생에 무슨 죄를 졌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내가 관사에서 마님하고 아가씨를 모실 때, 작은주인님이 자주 나를 성가시게 굴곤 했다. 난 그때마다 이리저리 피하곤 했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 사람이 자주 날 찾아왔다. 나도 그 사람이 그저 심심풀이로 날 가지고 노는 거라는 걸 알았다. 다른 데 가서는 그렇게 쉽게 못할 것인데, 다 내 얼굴이 반반한 게 죄다. 우리가 지금 그 집 돈으로 살고 있고 너도 공부를 해야 하고 그 집 돈이 필요하니 그 집하고 척질 수가 없다. 그 인간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다. 그러니 내가 거절할 방도가 없다. … 뉴얼, 날 용서해해라. 널 공부시킬 수 있고 널 노예로 만들지 않을 수만 있다면 네 엄마는 이 한몸 하나도 아깝지 않다.’ 물론 이 말도 어머니의 원래 말이 아니라 내가 대강 기억하는 것이네.”
**************************************************
“난 어머니를 꼭 껴안았어. 나는 한결 어머니가 사랑스러웠어. 전보다도 훨씬. 나는 괴롭게 말했지. ‘어머니,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나 공부 그만둘래요. 더이상 어머니를 이렇게 고생시킬 수가 없어요. 공부를 그만둘래요. 그냥 노예가 될게요.’”
“어머니가 내 입을 막으면서 말했어. ‘허튼소리 그만해라. 넌 공부해야 한다.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 널 공부시키기 위해서라면 평생을 고생스러워도 엄마는 괜찮다.’”
“어머니는 울면서 밤새도록 나를 설득했고, 결국은 어머니 말을 듣기로 했지. 이튿날 새벽, 나는 예전처럼 학교에 갔고, 공부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았지. 정말 열심히 공부했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라면 무엇이든 죄다 먹어치웠지. 그 지식 너머에 내 빛나는 앞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거든. 난 노예의 혈통을 끊고자 하는 부모님의 바람을 기어이 이루어드리겠노라고 결심했거든.”
“하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이 내 머리를 짓눌렀고, 지난 과거가 귀신처럼 내 마음에 달라붙어 놓아주지를 않았어.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어. 노예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더욱더 그랬지. 하지만 희망은 있었어. 나에게는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의 기대가 있었거든. 그것이 내게 그 모든 것을 견뎌낼 힘을 주었어.”
“작은주인님은 당연히 자주 드나들었지. 속으로는 그를 증오하면서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어. 그가 가고 나면 어머니는 사람이 변했어. 오랫동안 울기만 해서 어머니를 달래느라 한참 동안 애를 먹었지. 그런 생활이 아마 조금만 더 계속되었어도 어머니는 진즉 죽었을 거야. 그런데 다행히도 네댓 달이 지나 작은주인님에게 어린 첩이 생겨 더이상 우리집에 오지 않았지. 어머니와 난 평화롭게 몇년을 지냈어. 내가 여기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 말이야.”
“어머니가 죽은 지 이제 삼년이야. 하루도 어머니를 잊은 적이 없어. 하루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잊은 적도 없고. 난 늘 비천하게 살다 간 그들을 생각해. 난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 그들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적도 없고. 나는 내 조상이 노예라는 게 자랑스러워. 그래, 난, 아주 자랑스러워. 할아버지가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려 목을 매고 아버지는 다른 사람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감옥에서 죽고, 어머니는 간통한 여자로 몰렸지만, 누가 그 사람들을 더럽다고 할 수 있어? 남에게 해코지라도 했나?…”
그의 말이 격해졌다. “그래, 자넨 아마 그 사람들들 비웃겠지. 무시할 거야. 하지만 자네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면 달라질 거야. 그들의 황금빛 마음은 자네 같은 사람들한테서는 찾을 수가 없어!”
“난 자주 밤이 깊도록 잠을 못 자. 그들을 생각하면서 시달리곤 하지. 이건 부끄러움이 아니야. 이건 분노야. 난 상상하곤 해. 지금 내가 편안하게 침상에서 잠을 잘 때, 지금 어디선가는 수백만, 수천만의 노예가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 사람들은 내 할아버지처럼 살면서 고생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 시각, 주인들은 달콤한 꿈에 취해 있겠지. 그들 가운데 어느 늙은이는 도둑 누명을 쓰고 이튿날 새벽 목을 매고 죽을 운명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나이든 노예는 어쩔 수 없이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징역살이를 가려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어머니와 딸은 주인 품에서 노리개가 되고 있겠지. 아이들은 아버지를 껴안고 울고 있고. 이런 생각을 하면 내 마음은 독한 저주로 가득차지. 난 자네 같은 사람들을 저주했어. 자네 같은 사람들을 없애버리려고 했지.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말이야. 자네들은 내 할아버지를 죽이고, 내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가고, 내 어머니를 욕보였어, 지금 그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자네들은 아직도 살고 있어. 나는 자네들에게 기어이 복수할 것이야!…”
그의 모습이 무섭게 변했다. 그가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맞설 태세를 하려던 순간 그가 창문 앞으로 갔다. 그는 창 앞에서 바깥을 내다보면서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더니 분노하면서 말했다. “저것 봐!” 난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엇비스듬히 보이는 작은 골프장이었다. 골프장에는 대낮처럼 불이 환했다. 흰옷을 입은 하인 두세 명이 문 앞에서 어슬렁거렸고 반라의 외국 여자가 표를 팔고 있었다. 말쑥하게 빼입은 남녀 청년들 한쌍씩이 여유롭게 문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일년 내내, 하루종일 죽어라 일하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나무에 목을 매어 죽고,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들어 죽고, 어머니와 누이는 겁탈을 당하고, 우리 아이들은 울고 있어. 저 사람들, 자네 같은 사람들 중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도 양심있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 그의 목소리에 끝모를 분노가 담겨 있었다.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계급의 온갖 고통이 그 목소리 속에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사정없이 내 마음을 때렸다. 내 눈이 돌연 번쩍 뜨였다. 내 눈앞에 수많은 비참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내 집에 노예가 열여섯 명이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안다. 그리고 노예 숫자를 서른두 명까지 늘이려고 한 적도 있다. 16, 32. 이런 숫자들이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내가 바로 그 작은주인님 같았다. 내가 그의 할아버지를 해치고 아버지를 나 대신 징역살이시키고 그의 어머니를 능욕한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워졌다. 포획물을 채가려고 노리는 두 눈이 내 몸에 훑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종말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
“졍 형, 왜 그래? 뭐라고 한 거야?”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나는 한참 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눈만 비볐다.
“졍 형, 내가 무섭나? 내가 자네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나는 어느정도 진정되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흉악한 모습이라곤 없었다. 그가 전에 내 목숨을 구해주었던 것도 기억났다. 나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펑 형, 자네는 왜 그때 날 구해주었나? 나도 노예 주인이고, 자네의 원수인데, 왜 그냥 차에 치여 죽게 내버려두지 않은 건가?”
그는 쓴웃음만 지을 뿐 한동안 가만있었다. 그런 뒤 차분하게 말했다. “아마 내게도 노예의 마음이 있나봐.”
나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한바탕 울고 싶었다.
그는 내가 말이 없자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줄 알고는 덧붙였다. “자기 행복을 모두 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고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노예의 마음이야. 그 마음을 우리 조상들은 할아버지에게 전해주었고,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전해주었고, 아버지는 다시 나에게 전해준 거야.” 그는 손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나는 그의 가슴에서 붉은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보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가슴을 보았다. 프랑스제 실로 만든 내 멋진 상의가 모든 것을 덮고 있었다.
“노예의 마음, 난 언제나 이 노예의 마음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그의 고통스러운 소리가 내 귓가에까지 전해졌다. 나는 얼른 귀를 막았다. 나는 그런 노예의 마음조차도 없다. 아마 난 필경 마음이라는 것조차 없는 사람인가 보다. 나는 너무도 부끄럽고, 두렵고, 슬프고, 혼란스러워 쓰러졌다. 그가 언제 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뒤 나는 그를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그의 행동이 갈수록 괴팍하게 변해서였다. 운동장에도 그의 발길이 줄었고, 학교 밖을 산책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나는 숙소에서 그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우리는 결국 소원해졌다. 나중에는 그의 이야기를 잊게 되었다. 내게는 나의 친구들이 있고, 나의 오락이 있었다. 영화관에도 가고 무도장에도 가고 여자친구하고 골프장에도 갔다. 나는 친구들과 자기 집 노예 이야기를 할 때면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집에는 노예가 열여섯 명이야. 머잖아 노예 숫자를 서른두 명까지 늘일 수 있을 거야.”
내가 졸업을 하고 몇년 지나지 않아 그 꿈은 정말 이루어졌다. 나는 서른두 명의 노예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마음을 다 바쳐 우리 집안사람들을 모셨다. 나는 즐겁고, 만족스러웠다. 예전에 펑이 내게 말한 노예 이야기는 깨끗이 잊어먹었다.
어느날, 나는 아내와 같이 정원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고, 다섯 명의 노예가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날 신문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이곳 지방뉴스 난에서 한 혁명당원이 총살을 당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혁명당원의 이름이 펑과 같았다. 분명 그 사람, 내 생명을 구해주었지만 내게서 잊혀진 은인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가 여러 해 동안 잊혀졌다가 다시 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그가 이제야 그 노예의 마음을 떨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 생명을 구해준 일을 떠올리자 마음이 꺼림칙했다. 나는 신문을 물끄러미 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 당신 웬 한숨이에요?” 아내가 손을 건네 내 손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따뜻하고도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오. 옛날 학교 친구 하나가 죽어서.”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내의 한없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얼굴과 빛나는 큰 눈을 보면서, 나는 모든 것을 잊었다. (*)
창비세계문학-중국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에서 전재 (루쉰 외, 창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