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나쓰메 소세키의 「이상한 소리」를 타임캡슐 단편으로 소개합니다. 다음은 창비세계문학 일본편을 엮고 옮긴 서은혜 선생님의 작품 소개글입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비교적 밝고 명랑한 소설들을 쓰기도 했지만 인간의 어둡고 깊은 내면에 대한 성찰과 죽음에 대한 응시에서 오히려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하겠다. 이 작품에서도 죽음과 삶을 초월해 있는 듯한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가 ‘여유파’라 불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편집자
상
까무룩 잠이 드는가 싶더니 눈이 뜨였다. 옆방에서 묘한 소리가 난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어디서 나는 소린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듣고 있노라니 점차 귓속에 정리된 관념이 만들어졌다. 아무래도 강판으로 무 같은 것을 조심조심 갈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시간에 무얼 하려고 옆방에서 무를 갈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말하는 걸 잊었는데 여기는 병원이다. 밥하는 사람은 저 멀리 반 블록이나 떨어진 두 층 아래 부엌까지 가지 않으면 한 사람도 없다. 병실에서는 취사는 물론 과자를 먹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더구나 지금 이런 시간에 무엇 때문에 무를 갈고 있단 말인가. 이건 분명히 다른 소리를 무 가는 소리로 잘못 듣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자,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왜 이런 소리가 나는 것인지를 생각하면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나는 이해가 안되는 채로 좀더 의미있는 일에 머리를 쓰려고 해보았다. 하지만 일단 귀에 들어온 이 이상한 소리는, 그것이 계속해서 나의 고막에 하소연을 하고 있는 한, 묘하게 신경에 거슬려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주변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이 건물에 불편한 몸을 의탁한 환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있다. 자고 있는지 생각에 잠겨 있는지 이야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복도를 걷는 간호사들의 슬리퍼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악사악 하고 무언가를 갈아대는 이상한 울림만이 신경에 거슬린다.
내 방은 원래 특실로 두 칸이 이어져 있던 것을 병원 형편에 따라 둘로 나눠놓았기 때문에 화로 등이 놓인 부속실 쪽은 그냥 벽이 옆방과 경계를 이루고 있지만 이부자리가 깔려 있는 6첩방에는 동쪽으로 6자짜리 벽장이 있고 그 옆이 바쇼오후(芭蕉布, 파초로 짠 섬유, 오끼나와 특산품―옮긴이)로 된 장지문으로, 바로 옆으로 오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칸막이를 드륵 열기만 하면 옆방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가 있으련만 남에게 그런 무례를 범할 정도로 대단한 소리는 물론 아니었다. 마침 점차 더워져가는 시기이니 마루 쪽은 언제나 활짝 열어둔 채였다. 마루는 원래 이 건물 전체에 길고 좁게 이어져 있다. 하지만 환자들이 마루로 나와 서로 마주치게 되는 불편을 막기 위해 일부러 두 병실마다 문을 따로 달아 경계를 삼았다. 그것은 판자 위에 가느다란 나무로 열십자를 새긴 세련된 것으로, 청소하는 아이가 아침마다 걸레질을 할 때면 아래층에서 열쇠를 가져다가 일일이 이 문을 여닫곤 했다. 나는 일어나서 문턱에 섰다. 그 소리는 이 여닫이문 뒤에서 나는 모양이다. 문 아래쪽이 두 치 정도 뚫려 있지만 거기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소리는 그후로도 곧잘 되풀이되었다. 어느때는 5,6분씩 계속되어 나의 청신경을 자극하는 적도 있었고 어떤 때는 그 절반도 가지 않고 뚝 그쳐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결국 알 기회가 없이 지나갔다. 환자는 조용한 남자였지만 때때로 한밤중에 작은 소리로 간호사를 깨우곤 했다. 간호사는 또 기특한 여자여서 조그맣게 한두 번 부르면 상냥하고 기분좋게 ‘네’하고 대답하며 바로 일어났다. 그리고 환자를 위해 무언가 하는 모양이었다.
어느날 옆방이 회진 차례가 되었는데 평소보다 훨씬 품이 드는구나, 생각하고 있자니 나지막한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다. 그런데 두세 사람의 말이 뒤엉켜 좀처럼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듯한 답답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침내 의사의 음성으로, 어차피 그렇게 금세 나을 리는 없으니까요, 하는 말만이 확실히 들렸다. 그러고 나서 이삼일 지나 그 환자 방에 조심조심 드나드는 인기척이 있었지만 모두들 자신의 행동을 환자에게 삼가듯이 조심스레 움직이는 듯하다고 여기고 있는 동안 환자 자신도 그림자처럼 어느샌가 어디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바로 이튿날부터 새 환자가 들어와 입구의 기둥에 하얗게 이름을 적은 검은색 표찰이 내걸렸다. 앞서 말한 사악사악 하는 묘한 소리는 결국 확인하지 못한 채 환자가 퇴원을 해버린 것이다. 그러는 사이 나 역시 퇴원을 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대한 호기심은 그것으로 사라졌다.
하
석달쯤 지나 나는 다시 같은 병원에 들어갔다. 병실번호도 전과 숫자 하나가 다를 뿐으로, 말하자면 지난번 방의 바로 서쪽이었다. 벽 하나 건너 옛 처소에는 누가 있을까, 마음을 썼지만 하루 온종일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비어 있는 것이다. 하나 더 앞쪽이 바로 그 이상한 소리가 나던 곳이지만 여기엔 지금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후에 겪은 몸의 변화가 너무나 극적이었던데다가, 그 격렬함이 머리에 반영되어, 지난번의 과거의 그림자에 주어진 동요가 쉴새없이 현재를 향해 파문을 전해오는 까닭에 강판 소리 같은 것은 전혀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과 가까운 운명을 지닌 병원 환자들의 경과 쪽이 신경쓰였다. 간호사에게 일등실 환자가 몇명이냐고 물었더니 셋뿐이라는 대답이었다. 병이 심각한가 물었더니 심각한 것 같아요, 한다. 그리고 하루이틀 지나 나는 그 세 사람의 증세를 간호사에게 확인했다. 한 사람은 식도암이었다. 한 사람은 위암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위궤양이었다. 다들 오래가지 못할 사람들이랍니다, 하고 간호사는 그들의 운명을 싸잡아 예언했다.
나는 마루 쪽에 둔 베고니아의 조그만 꽃을 보며 소일했다. 실은 국화를 사려던 것이었는데 꽃집에서 1엔 60전이라고 하기에 50전에 팔라고 깎아보아도 흥정이 안되어, 돌아오는 길에 자, 60전 줄 테니 팔아라 해도 역시 깎아주질 않았다. 올해는 큰물이 져 국화가 비싼 것이라고 설명하던, 베고니아를 가져왔던 사람의 말을 떠올리며 번화한 길거리의 엔니찌(緣日, 신불을 공양하고 재를 올리는 날―옮긴이)의 야경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했다.
마침내 식도암인 남자가 퇴원했다. 위암인 사람은, 죽음이란 체념만 할 수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아름답게 죽었다. 궤양 환자는 점점 악화되었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가끔씩 동쪽 끝에서 간병하는 사람이 얼음 깨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그침과 동시에 환자는 죽었다. 나는 일기에 적어넣었다―‘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죽고 혼자만 남아 있으니 죽은 사람에 대해 남아 있는 것이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 환자는 구토기가 있어 저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울릴 정도로 소리를 내가며 줄곧 웩웩 토하고 있었는데 요 이삼일 그것이 뚝 그쳐 들리지 않기에 상당히 안정되어 다행이구나 싶더니 실은 너무 지쳐 소리를 낼 힘조차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후 환자는 교대로 들락날락했다. 나의 병은 날이 가면서 조금씩 좋아졌다. 마지막에는 슬리퍼를 끌고 넓은 복도를 여기저기 산책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연찮게 어떤 상주 간호사와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따스한 날 오후, 식후의 운동 삼아 수선화의 물을 갈아주려고 세면실에 가서 수도꼭지를 틀고 있는데 그 간호사가 자기가 맡은 병실의 찻잔을 씻으러 와서 언제나처럼 인사를 하며 잠시 내 손에 들린 붉은 화분과 그 안에 치솟듯 올라온 구근을 바라보다 말고 눈을 내 옆얼굴로 옮겨 지난번 입원하셨을 때보다 안색이 훨씬 좋아지셨네요, 하며 석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 듯한 얘기를 했다.
“지난번이라니, 그때 자네도 간병인으로 여기 와 있었던 건가?”
“예, 바로 옆방이었죠. 한동안 ○○씨 옆에 있었는데 모르셨나봐요.”
○○씨라면 그 이상한 소리가 나던 동쪽 옆방이었다. 나는 간호사를 보고, 이 사람이 그때 한밤중에 부르면 ‘네’ 하고 상냥하게 대답하며 일어나던 여자였나 싶어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나의 신경을 그렇게나 자극하던 소리의 원인에 대해서는 굳이 묻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아아, 그렇군, 하고는 화분을 닦고 있었다. 그러자 여자가 갑자기 약간 가다듬은 듯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그무렵 선생님 방에서 가끔 이상한 소리가 났는데…”
나는 갑자기 역습을 당한 사람처럼 간호사를 보았다. 간호사는 이어서 말했다.
“매일 아침 6시쯤 되면 어김없이 나는 것 같더라고요.”
“아아, 그거?” 나는 생각났다는 듯이 무심결에 큰소리를 냈다. “그건 말이야, 오토 스트랩(자동숫돌―옮긴이) 소리야. 아침마다 수염을 깎느라고 안전면도날을 숫돌에 얹어 간 거지. 지금도 하고 있어. 거짓말 같으면 와서 봐.”
간호사는 그저 헤에, 하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씨라는 환자는 그 숫돌 소리를 몹시 거슬려하며, 저건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야 하고 간호사에게 물어댔다는 것이다. 간호사가 도저히 모르겠다고 대답하니, 옆방 사람은 아주 좋아져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운동을 하는구나, 그 기계음이 아닐까 부럽다, 하고 몇번이나 되풀이 말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쪽 소리는 뭐였지?”
“이쪽 소리라뇨?”
“왜, 곧잘 무를 가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났잖아?”
“아아, 그거요? 그건 오이를 가는 소리였어요. 환자가 다리에 열이 나서 못 견디겠다, 오이즙으로 식혀달라고 하셔서 제가 날마다 갈곤 했어요.”
“그럼, 역시 강판 소리였구먼.”
“네.”
“그렇군, 이제 겨우 알았네. ―도대체 ○○씨는 무슨 병이었어?”
“직장암이요.”
“그럼, 아무래도 어렵겠네.”
“네, 벌써 오래전에. 여기서 퇴원하시고 얼마 안되어서였죠, 돌아가신 것이.”
나는 묵묵히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이 가는 소리로 남을 짜증스럽게 하며 죽은 남자와 숫돌 소리로 남을 부럽게 만들며 병이 나은 사람의 차이를 마음속에서 생각했다.
창비세계문학-일본 『이상한 소리』에서 전재 (나쓰메 소세키 외, 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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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나쓰메 소세끼 (1867-1916)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졸업. 마쯔야마 중학, 쿠마모또 5고의 영어교사를 거쳐 문부성 유학생으로 영국 유학. 귀국 후 제1고 교사, 도쿄제국대학 강사로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나는 고양이로다』에 이어 『도련님』, 『풀베개』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했고 『산시로오』, 『그러고 나서』, 『문』 등을 쓴 후, 위궤양으로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가 회복되어 이른바 후기 3부작으로 꼽히는 『피안 지나서』, 『행인』, 『마음』 등 인간 존재를 깊이 응시하는 장편들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일본 문단을 풍미하던 자연주의와 구별되어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는 세계로 ‘여유파’라 불리며 호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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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서은혜
전주대 언어문화학부 교수. 옮긴 책으로 『개인적인 체험』, 『경계에서 춤추다』, 『체인지링』, 『우울한 얼굴의 아이』, 『책이여, 안녕!』, 『회복하는 인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