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찰스 W. 체스넛의 「그랜디썬의 위장」("The Passing of Grandison")을 타임캡슐 단편으로 소개합니다. 다음은 창비세계문학 미국 편을 엮고 옮긴 한기욱 선생님의 작품 소개글입니다. “『그의 젊은 시절의 아내 및 피부색에 관한 이야기들』에 수록되었다. 남부 켄터키의 대농장주의 아들인 딕 오언즈가 여자친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버지 소유의 흑인 노예 그랜디썬을 북부로 데려가 도망치도록 유도하지만 뜻밖의 결과를 낳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아이러닉하고 유머러스한 어조에 있다. 발표 당시 도망노예 문제는 과거지사가 되었으나 여전히 폭발성이 강한 흑백간의 차별문제를 이런 어조로 유연하게 다룬 것이다. 그것은 당시 체스넛의 독자인 교육받은 백인 중산층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유일한 방식이기도 하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당대 문학에서 널리 퍼져 있는 흑인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나 인식을 조롱과 아이러니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백인 주인 오언즈 대령과 그의 아들 딕이 충직한 흑인 노예라는 상투형에 사로잡혀 사태를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코믹한 아이러니와 허를 찌르는 반전이 일어난다. 백인 주인을 속이는 흑인 노예의 이야기 전통을 활용하되 수준 높은 아이러니와 반전의 서사를 구사함으로써 인종문제에 대한 상투적이고 정형화된 인식을 극복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 편집자
그랜디썬의 위장
1
여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랬다고 하면, 아마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남자가 하지 않을 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젊은 딕 오언즈가 아버지 소유의 흑인 노예 한명을 캐나다로 도망치게 하려고 했는지를 분명히 밝히려면 사전에 몇가지 사실을 말해두는 것이 좋겠다.
1850년대 초반, 노예제반대 정서가 커지고 도망노예들이 끊임없이 북부로 빠져나가자 접경주(남북전쟁 전 자유주에 접해 있으면서도 노예제를 채택한 몇몇 주를 일컬음―옮긴이)의 노예소유주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도망노예법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때 오하이오 출신의 한 젊은 백인남자가 공교롭게 ‘엄한 주인’을 만난 어떤 노예의 고통에 깊은 연민을 느껴 그 노예가 자유롭게 되도록 도와주려 했다. 이 시도는 발각되어 좌절당했고, 유괴자는 재판을 받아 노예절도죄로 유죄를 선고받고 일정 기간 교도소 수감 형에 처해졌다. 그가 형기를 조금밖에 채우지 못하고 병에 걸린 동료 수인들을 간호하다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어버리자 이 사건은 그 슬픈 사연으로 관심을 끌면서 노예제 반대운동의 연대기에서 유명해졌다.
딕 오언즈는 이 재판을 참관했었다. 그는 지적이고 잘생겼으며 호감을 주지만 우아한 신사가 그렇듯 극히 나태한 스물두살가량의 젊은이였다. 아니, 나이든 펜더슨 판사가 여러번 표현했듯이 그는 악마처럼 게을렀다. 물론 이는 단순한 비유법에 불과하고 인류의 적인 악마를 정당하게 대접하는 표현은 아니다. 왜 한번도 진지한 일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딕은 잘 조율된 남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그럴 필요가 없었노라고 유순하게 대답하곤 했다. 딕의 아버지는 부자였고 자식으로는 미혼의 딸 하나가 더 있었지만 그녀는 건강이 나빠 십중팔구 결혼을 하지 못할 듯했다. 그러므로 딕은 대토지의 추정 상속인이었다. 부나 사회적 지위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에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채러티 로맥스는 그를 부끄럽게 만들어 법률을 공부하도록 했으나 펜더슨 판사 사무실에서 매일 한두 시간을 보내는데도 그는 법률 공부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딕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성의 채찍이나 야심의 박차야. 그가 둘 중 하나라도 갖는다면 머잖아 그를 제어할 재갈이 필요할 거야.” 학자답게 비유법을 좋아하고 켄터키 사람답게 말[馬]을 좋아하는 판사가 말했다.
그러나 스물다섯살이 되기 전에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을 해내도록 딕을 자극하는 데는 사실 체러티 로맥스의 제안만 있으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당사자인 두 사람만이 실제로 알고 있었으나, 좋은 이야기인데다가 특별히 감출 만한 이유도 없기 때문에 전쟁(1861~65년의 남북전쟁을 일컬음―옮긴이) 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젊은 오언즈는 이 노예절도범 또는 순교자―둘 중 하나이거나 모두에 해당하는―의 재판을 참관했고 재판이 끝나자 채러티 로맥스를 찾아갔다. 해가 진 후 두 사람이 베란다에 앉아 있는 동안 그는 그녀에게 재판에 관한 모든 것을 얘기해주었다. 그는 최근 몇년간의 경력이 보여주듯 훌륭한 이야기꾼이었고, 재판과정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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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찰스 W. 체스넛
(Charles W. Chesnutt, 1858~1932)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출생. 자유 흑인 부모 사이에 태어났으며 백인 피가 7/8인 혼혈이지만 흑인의 정체성을 지녔다. 남북전쟁 후 가족을 따라 노스캐롤라이나 주 페이옛빌로 가서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교직에 종사했다. 1883년 클리블랜드로 돌아와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법률속기회사를 차렸다. 1880년대 중반부터 단편을 발표했고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급 문예지인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에 작품을 실었다. 흑인의 구전 민담을 활용한 단편집 『여자 주술사』(The Conjure Woman, 1899)와 흑백혼혈의 문제를 다룬 『그의 젊은 시절의 아내 및 피부색에 관한 이야기들』(The Wife of His Youth and Other Stories of the Color Lines, 1899)을 잇달아 출간하여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전통의 정수』(The Marrow of Tradition, 1901)를 비롯하여 인종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장편들이 평단과 독자로부터 외면 받은 이후에는 전미 흑인지위 향상협회(NACCP) 활동에 힘을 쏟았다. 체스넛은 흑인 민담의 활용과 흑백혼혈의 주제를 통해 인종적 정체성의 문제를 파고들고 아이러닉한 화법과 어조를 구사함으로써 상투형의 낭만적 흑인문학 전통을 혁신하는 데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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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기욱
인제대 영문과 교수.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주요 논문으로 「미국 르네쌍스기의 작가들」,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저서 및 역서로 『영미문학의 길잡이』(공저), 『우리 집에 불났어』, 『마틴 에덴』,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공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공역)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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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내 원칙은 그 죄수를 반대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에게 공감했어.” 그는 시인했다. “그는 훌륭한 집안 출신이고 말년에 부양하고 위로해드려야 할 존경할 만한 노부모님이 있는 것 같았어. 그는 한 흑인 노예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이 일에 연루된 것인데, 그 흑인의 주인은 자기 노예들을 학대해서 오래전에 이 나라에서 쫓겨났어야 할 사람이야. 이 일이 그저 쌤 브릭스 노인의 노예문제였더라면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아버지와 나머지 사람들이 사태에 대한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판사에게 그걸 전했고, 결국 그 친구는 삼년형을 선고받게 된 거야.”
로맥스 양은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귀를 기울였다.
“나는 쌤 브릭스 노인이 장작으로 흑인 노예의 다리를 부러뜨렸을 때부터 늘 그를 증오해왔어요.”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나는 잔인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할머니한테서 물려받은 퀘이커교도 핏줄이 솟구쳐나와요. 개인적으로 나는 쌤 브릭스의 흑인 노예들 모두가 도망쳤으면 좋겠어요. 그 젊은이로 말하자면, 나는 그 사람을 영웅으로 생각해요. 인류를 위해 뭔가 대담한 일을 했으니까요.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남자라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채러티, 만약 내가 뭔가 영웅적인 일을 하면 나를 사랑할 수 있겠어?”
“딕, 당신은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예요. 쓸모있는 일을 하기에는 너무 게으르거든요. 카드놀이나 여우사냥보다 더 힘든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왜 이래, 자기! 당신한테 일년 동안 구애를 해왔는데, 그거야말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힘든 일이야. 당신은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가 애원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그녀는 그가 붙잡지 못하도록 손을 뺐다.
“딕 오언즈, 뭔가 뜻있는 일을 할 때까지는 당신을 절대로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 때가 오면 생각해볼게요.”
“하지만 언급할 가치가 있는 일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 나는 기다리고 싶지 않다고. 변호사가 되려면 이년 동안 책을 읽어야 하고 게다가 명성까지 얻으려면 오년을 더 일해야 해. 그때쯤에는 우리 둘 다 백발이 되어 있을 거야.”
“글쎄요,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그녀가 대꾸했다. “남자가 자신이 사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평생이 걸리는 것은 아니에요. 이 남자는 뜻있는 일을 했고,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좋아, 나도 다른 남자들 못지않게 시도할 용의가 있다고. 자기, 내가 무슨 일을 하길 원해? 나를 한번 시험해봐.”
“어머나!” 채러티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 안하니, 뭔가 뜻있는 일을 하세요. 정말이지, 생각해보면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지 안하든지 왜 내가 신경써야 하죠?”
“채러티, 나도 당신이 왜 신경을 써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딕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나 자신이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정말로 똑똑한 남자가 게을러빠져서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지는 꼴은 정말 보기 싫다는 것만 빼놓으면 그렇지요.” 그녀는 약간 누그러져서 덧붙였다.
“자기, 고마워. 당신한테 칭찬을 한마디 들으니 벌써 머리가 예리해졌어. 묘안이 하나 떠올랐어! 내가 만약 흑인 노예를 캐나다로 도망가게 해준다면 나를 사랑하겠어?”
“말도 안돼요!” 채러티가 경멸조로 말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네요. 당신 아버지가 노예를 백명이나 소유하고 있는데, 아니, 다른 사람의 노예를 훔치다니 말이에요!”
“아, 그 점에 있어서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딕이 가볍게 받아넘겼다. “아버지 노예 하나를 도망치게 만들면 돼지. 어차피 우린 노예가 너무 많거든. 아마도 이 일은 그 남자의 경우만큼 그렇게 어렵지 않겠지만, 이것도 똑같이 불법적인 일이니까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줄 거야.”
“백문이 불여일견이에요.” 채러티가 대답했다. “물론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 뿐이에요. 나는 테네시에 있는 숙모를 뵈러 삼주간 떠나 있을 거예요. 내가 돌아올 때 당신의 자질을 입증할 만한 일을 했다고 내게 장담할 수 있다면 나는― 음,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하러 찾아와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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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젊은 오언즈는 다음날 아침 아홉시경에 일어나 몸단장을 하면서 비슷한 나이의 꽤 영리하게 생긴 젊은 흑백혼혈 하인에게 몇가지 질문을 했다.
“톰.” 딕이 불렀다.
“예, 딕 도련님.” 하인이 대답했다.
“북부로 여행갈 건데, 나랑 같이 가고 싶나?”
톰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북부 여행이었다. 그것은 추상적으로는 오랫동안 심사숙고해왔지만 구체적으로 시도할 만큼 충분한 용기를 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만한 분별력은 있었다.
“딕 도련님, 도련님이 저를 돌봐주셔서 집에 무사히 데려오신다면 저야 괜찮지요.”
그러나 톰의 눈은 그의 말이 거짓임을 나타냈고, 그의 젊은 주인은 톰이 도망치기 위해서 좋은 기회만 노리고 있음을 확신했다. 주인집이 편안한데다 실패할 경우 전망이 어두웠기 때문에 톰이 무모하게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을 듯했다. 하지만 자유주에 가서 약간만 꼬드기면 톰이 타락하리라고 젊은 오언즈는 확신하면서 흐뭇해했다. 게으른 사람답게 필요한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논리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언즈는 자기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으면 톰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오언즈 대령은 딕이 아침식사를 하러 갔을 때 이미 외출한 터라 딕은 점심때까지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 그는 튀긴 닭고기가 차려진 식탁에서 대령에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요즘 약간 저조한 상태예요. 여행을 좀 하면서 환경을 바꾸면 건강이 나아질 것 같아요.”
“북부 여행을 해보지그래.” 그의 아버지가 제안했다. 대령은 부성애뿐 아니라 대토지 상속자로서 아들에 대한 상당한 존중심도 갖고 있었다. 대령 자신은 비교적 가난하게 ‘키워졌고’ 열심히 일하여 재산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자신이 기어오른 신분의 사다리를 경멸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부자와 좋은 집안 태생의 사람에게 보내는 존경심 같은 것을 아들을 대할 때도 무의식적으로 드러냈다.
“아버지 제안대로 하겠어요.” 아들이 대답했다. “뉴욕으로 올라가서 한동안 지내면서 내친김에 일주일가량 보스턴에도 가볼까 생각해요. 아시다시피, 저는 거기에 가본 적이 없어요.”
“네가 뉴욕에 가면 내 대리상과 의논할 일도 좀 있지.” 대령이 대꾸했다. “그리고 네가 거기 올라가 북부사람들 사이에 있는 동안 불한당 같은 노예폐지론자 녀석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며 무슨 짓을 하는지 눈과 귀를 활짝 열어 지켜보면 좋겠어. 요즘 그 녀석들이 갈수록 설쳐대서 우리가 편치 못하고 정말 너무 많은 검둥이들이 배은망덕하게 도망치고 있단 말이야. 어제 그 친구가 유죄판결 받은 것이 그런 녀석들의 기를 꺾어주기를 바라. 내 검둥이들 중에 하나라도 달아나게 하려는 녀석은 반드시 붙잡고 싶어. 그런 녀석은 인정사정 볼 것 없어. 그런 녀석은 법정에서 재판받을 기회도 얻지 못할 거야.”
“걔들은 해로운 패거리예요.” 딕이 동의했다. “그리고 우리 제도에도 위험하죠. 그런데 아버지, 만약 제가 북부로 간다면 톰을 데려가고 싶어요.”
대령은 매우 관대한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종종 말하듯 수년간 검둥이들을 연구해왔고 또한 더 자주 주장하듯 검둥이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흑인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또한 상속받았을 경우보다는 자기가 힘들여 일하고 꾀를 짜내서 획득한 노예들의 가치를 훨씬 높이 평가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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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톰을 북부로 데려가는 것은 안전하지 못해.” 그는 즉각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톰은 괜찮은 녀석이긴 하지만 비열한 노예폐지론자들 사이에 두기에는 너무 영리해. 어떻게 배웠는지 몰라도 녀석이 글 읽는 법을 배웠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어. 요전날 녀석이 신문을 갖고 있는 것을 봤는데, 목판화를 보고 있는 체했지만 녀석은 분명히 신문을 읽고 있었던 거야. 녀석을 데려가는 것은 결코 안전하지 못한 것 같아.”
딕은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다. 대령은 다른 문제라면 아들의 청을 다 들어줬을 테지만, 흑인 노예들은 그의 부와 지위를 밖으로 드러내는 징표였고, 따라서 그에게는 신성했다.
“누굴 데려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세요?” 딕이 물었다. “제게 몸종이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랜디썬이라면 무슨 문제가 있겠니?” 대령이 제안했다. “그라면 쓸모도 있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식탐이 너무 많아서 밥줄이 끊길 모험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네 엄마의 하녀인 베티에게 빠져있어서 머잖아 둘을 결혼시키기로 약속했어. 내가 그랜디썬을 불러올릴 테니 그에게 이야기를 해보자. 이봐, 잭 녀석아.” 대령은 옆방에서 파리를 잡아서 날개를 뜯어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누런 피부의 젊은이를 불렀다. “헛간으로 내려가서 그랜디썬에게 이리로 오라고 해.”
“그랜디썬.” 문제의 흑인이 모자를 손에 쥐고 앞에 서자 대령이 말했다.
“예, 주인님.”
“나는 자네를 항상 잘 대해줬지?”
“예, 주인님.”
“항상 자네가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었지?”
“예, 주인님.”
“위스키건 담배건 맘껏 먹었지, 그랜디썬?”
“그렇습죠, 주인님.”
“그랜디썬, 자기를 돌봐줄 친절한 주인도 없고 아플 때 약을 주는 여주인도 없는, 저 아래 판자도로(판자를 깔아 만든 도로―옮긴이) 가의 불쌍한 자유 흑인들보다 자네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알고 싶을 따름이고 또― 또―”
“그렇습죠, 주인님, 제가 저 비참한 자유 검둥이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말고요! 누군가가 그들한테 누구에게 속해 있냐고 물으면 그들은 아무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습죠. 누군가가 저한테 누구에게 속해 있냐고 물으면 저는 대답하기가 부끄러울 일이 없습죠, 주인님, 암 그렇고말고요!”
대령은 희색이 만면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감사였다. 그의 봉건적인 마음은 그런 감사에 찬 경의 표시에 감격했다. 한편에서는 친절하게 보호해주고 다른 편에서는 현명하게 복종하고 충성스럽게 의존하는 이 복된 관계를 파괴하려는 자들은 얼마나 냉혈하고 무정한 불한당들인가! 대령은 그런 사악함을 떠올리기만 하면 어김없이 분노가 치밀었다.
“그랜디썬.” 대령은 말을 이었다. “자네 젊은 주인 딕이 몇주 동안 북부로 갈 건데, 그애가 자네를 데려가게 할까 생각중이야. 그랜디썬, 젊은 주인을 잘 돌봐주도록 자네를 이번 여행에 보내려는 거야. 젊은 주인한테는 시중들 사람이 필요할 텐데, 이 오래된 농장에서 그애와 함께 자란 아이들만큼 그 일을 잘할 사람이 없을 거야. 젊은 주인을 자네 손에 맡길 테니, 자네가 틀림없이 자네 의무를 충실히 해서 그를 집으로―정겨운 켄터키로―무사히 데려오겠지.”
그랜디썬이 씽긋 웃었다. “아, 그렇습죠, 주인님. 제가 딕 도련님을 돌보겠어요.”
“그렇지만 그랜디썬, 이 망할 놈의 노예폐지론자들을 조심하라고 자네한테 주의를 주고 싶네.” 대령은 이어서 강조해서 말했다. “녀석들은 하인들을 안락한 가정과 관대한 주인으로부터, 고향인 남부의 푸른 하늘, 녹색 들판, 따뜻한 햇살로부터 꾀어내어 저 먼 황량한 나라, 캐나다로 보내려 하고 있어. 캐나다는 숲에 살쾡이와 늑대와 곰이 득실대고, 일년이면 육개월간 처마 밑까지 눈이 쌓이고, 추위가 너무 혹독해서 입김이 얼고 피가 응결되고, 또 도망쳐온 검둥이들이 병들어서 일을 못하면 쫓겨나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굶어죽는 나라란 말이야. 그랜디썬, 자네는 분별력이 있으니 그런 어리석고 사악한 자들 때문에 길을 잃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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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말굽쇼, 주인님, 그 비열하고 가증스러운 노예폐지론자들은 누구도 제 근처에 얼씬하지 못하도록 하겠어요. 주인님, 제가― 제가― 그들을 때려도 될까요?”
“물론이지, 그랜디썬.” 대령이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녀석들을 있는 힘껏 치게. 녀석들은 맞는 걸 상당히 좋아할 것 같아. 젠장, 좋아할 것 같다니까! 녀석들은 검둥이한테 맞아도 싸!”
“아니면 주인님, 제가 그들을 치지 못한다면, 딕 도련님한테 일러주면 도련님이 그들을 혼내주겠지요.” 그랜디썬은 생각에 빠져 말을 이었다. “딕 도련님이 그들의 면상을 뭉개놓으실 거예요. 주인님, 도련님이 그러실 거라는 것을 저는 그냥 알아요.”
“그래 맞아, 그랜디썬, 자네 젊은 주인이 자네를 보호해줄 거야. 젊은 주인이 곁에 있는 동안 자네는 다칠까봐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주인님, 그들이 저를 훔치려 하지는 않겠지요?” 그 흑인은 돌연 불안한 듯 물었다.
“그랜디썬, 그건 잘 모르겠어.” 새 씨가에 불을 붙이며 대령이 말했다. “녀석들은 지독한 미치광이들이라서 무슨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어. 하지만 자네가 젊은 주인 곁에 꼭 붙어 있고 그가 자네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자네의 실제적인 요구를 이해하며 자네의 진정한 이익을 깊이 마음에 두고 있음을 명심한다면, 그리고 자네한테 말붙이는 낯선 사람들을 피하도록 조심한다면 자네는 자네 집과 친구에게로 돌아올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그리고 자네가 딕 주인님을 기쁘게 해준다면, 그분은 자네한테 선물을 사주고, 자네가 가을에 결혼할 때 베티가 낄 목걸이도 사줄 거야.”
“감사합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나리.” 온몸에 감사의 빛을 발하며 그랜디썬이 대답했다. “주인님, 주인님은 분명 훌륭한 주인님이세요. 그렇고말고요. 제가 예전에 딕 도련님의 몸종이던 때처럼 저와 딕 도련님은 그렇게 사이좋게 지낼 거라고 확신하셔도 될 겁니다요.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도련님이 저를 늘 몸종으로 곁에 두고 싶지 않으시다 해도 그건 제 잘못은 아닐 겁니다요.”
“알겠네, 그랜디썬, 이제 가보게. 자네는 오늘 더이상 일할 필요 없어. 그리고 여기 자넬 위해 내 쌈지에서 담배를 조금 덜어냈으니 가져가게.”
“감사합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검둥이 주인보다 좋으신 최고의 주인이십니다!” 그러고는 그랜디썬은 고개를 숙여 절하고 머리를 긁적이다가 턱을 크게 벌려 대령의 최고급 담배를 덥석 물고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랜디썬은 데려가도 돼.” 대령이 자기 아들에게 말했다. “그는 노예폐지론자한테도 까딱없을 거야.”
3
켄터키에서 온 리처드 오언즈 님과 하인은 그 당시 남부인들이 즐겨 찾던 뉴욕의 고급 숙소에 투숙했다. 그 호텔에서는 남부의 제도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공들여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흑인 웨이터들이 식당에 있었고 혼혈 벨보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딕은 그랜디썬이 흑인다운 타고난 사교성과 수다스러움으로 조만간 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재잘거리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으며, 그들이 그랜디썬에게 신속히 자유라는 바이러스를 주입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몇가지 자명한 이유로 자기 하인한테 그를 풀어줄 계획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딕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한가지 이유를 대자면, 만약 그랜디썬이 도망쳤다가 법적인 절차에 의해 다시 붙잡힌다면 이 문제에서 그의 젊은 주인의 역할이 틀림없이 알려지게 될 것인데, 그것은 딕에게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한편 만약 그가 그랜디썬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기만 하면 결국에는 그랜디썬이 도망치게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랜디썬의 열렬한 충성심을 딱히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딕은 그 나름의 게으른 방식으로나마 인간본성을 꽤 예리하게 관찰해왔고, 자기 하인이 우연히 접할 수밖에 없는 본보기와 논리의 힘에 근거하여 결과를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랜디썬은 당연히 자기 발로 자유로워질 확률이 높은 것이다. 만약 그를 떼어버리기 위해 다른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면 그런 필요가 생길 때 행동해도 충분할 것이다. 게다가 딕 오언즈는 불필요한 수고를 할 젊은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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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주인은 몇몇 지인을 다시 만나고 새로 몇사람을 사귀기도 하면서, 부유하고 가문 좋은 젊은 남부인이 적절한 소개를 통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도시 상류사회에서 한두 주일을 매우 즐겁게 보냈다. 젊은 여자들은 그에게 미소를 지었고 술잔치를 좋아하는 젊은 남자들은 열렬히 환대했지만, 그는 채러티의 사랑스럽지만 엄한 얼굴과 청초한 푸른 눈을 떠올리면서 여성의 유혹과 남성의 설득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그랜디썬에게 용돈을 계속 대어주면서 대체로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딕은 매일 밤 호텔로 돌아올 때마다 시중받지 않기를 바랐고 매일 아침이면 도움을 받지 않고 몸단장할 가망성을 즐겁게 고대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번번이 실망으로 끝날 운명이었다. 매일 밤 그가 들어올 때 그랜디썬은 장화 벗는 도구와 젊은 주인을 위해 잠자리용 술 한잔을 대령이 가르쳐준 대로 섞어서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약칠하여 닦은 주인의 장화와 솔질한 옷을 들고 나타났고 그날 입을 주인의 속옷을 꺼내놓았다.
“그랜디썬.” 어느날 몸단장을 마친 후 딕이 말했다. “이번 여행은 너희 종족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볼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야. 그 사람들 좀 만나봤어?”
“예, 도련님, 몇명 보았지요. 하지만 도련님, 저는 그들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들은 우리 남부 검둥이들과는 달라요. 그들은 자기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분별력이 없어서 자기들이 남부에서 존중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에 비해 턱없이 못산다는 것도 알지 못해요.”
이주일이 지나도 그랜디썬에게 나쁜 본보기의 효과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자 딕은 도시 분위기가 자기 목적에 좀더 유리할 것 같은 보스턴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리비어 하우스(보스턴의 유서깊은 저택으로 당시에 호텔로 사용되었음―옮긴이)에서 하루이틀 묵은 후에도 그랜디썬이 도망치지 않자 그는 약간 다른 전술을 쓰기로 결심했다.
시의 인명부에서 몇몇 유명한 노예폐지론자 주소를 확인한 후에 그는 그들 각자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친구 및 형제에게
리비어 하우스에 묵고 있는 켄터키 출신의 한 악덕 노예주가 그의 노예를 보스턴 한복판에 보란 듯이 데려옴으로써 자유를 사랑하는 보스턴 시민을 감히 모욕했습니다. 이 일을 참아야 할까요? 아니면 자유의 이름으로 동료 인간을 속박에서 구해내는 조치를 취해야 할까요? 자명한 이유로 제 서명을 이렇게만 남깁니다.
인류의 친구
딕은 자신의 편지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그랜디썬을 호텔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러 차례 심부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 한번은 그랜디썬이 상당히 먼 거리를 가는 동안 딕이 지켜보았다. 그랜디썬이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머리가 길고 생김새가 날카로운 남자 하나가 뒤이어 나오더니 그를 따라갔고 곧 그를 따라잡아서 다음 모퉁이를 돌 때까지 그의 곁에서 나란히 걸어갔다. 이 광경을 보고 딕은 희망이 부풀어올랐으나 그랜디썬이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희망도 함께 꺼져버리고 말았다. 그랜디썬이 그 우연한 만남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딕은 이런 예기치 못한 침묵 이면에 뭔가 자의식적인 것이 있어서 나중에 그 결과가 더욱 진전되어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랜디썬은 주인이 밤에 호텔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대기하고 있었고, 아침에도 주인의 몸단장을 돕기 위하여 따뜻한 물을 갖고 시중을 들었다. 딕은 날이면 날마다 그에게 계속 심부름을 보냈고, 한번은 그랜디썬이 성직자 복장의 젊은 백인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와 정면으로―물론 무심코―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랜디썬은 딕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전도사에게서 조금씩 물러나서 역력하게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주인을 향해 서둘러 왔다.
“딕 도련님.” 그가 말했다. “여기 이 노예폐지론자들이 저를 도망치게 하려고 엄청 괴롭히고 있어요. 저는 그들에게 아랑곳하지 않지만 그들이 너무 화를 돋우는 바람에 때로는 이러다간 제가 그들을 몇명 때려서 말썽에 휘말릴까봐 겁나요. 도련님 심사를 어지럽힐까봐 아무 말씀도 안 드렸지만 저는 이런 상황이 싫어요, 도련님. 그래요, 정말 싫어요! 딕 도련님, 우리는 머잖아 집으로 돌아갈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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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때가 되면 곧 돌아갈 거야.” 딕은 자유로울 수 있는데도 자유롭게 되려 하지 않는 노예의 멍청함을 속으로 저주하면서 다소 냉랭하게 답했다. 그리고 만약 그랜디썬을 죽이지 않고서는 떼어낼 수 없다면, 따라서 그를 다시 켄터키로 데려갈 수밖에 없다면, 그랜디썬이 놓쳐버린 기회를 후회하도록 노예제 조항의 쓴맛을 보게 조치하리라 속으로 맹세했다. 동시에 그는 더 강력하게 하인을 유혹하기로 결심했다.
“그랜디썬.” 다음날 그가 말했다. “하루이틀 어디 다녀오려 하는데 너는 이곳에 두고 가겠어. 이 서랍에 백 달러를 넣어 잠그고 열쇠는 너한테 줄게. 돈이 필요하면 쓰면서 즐기고―원한다면 전부 써도 좋아. 이번이 아마 얼마 동안은 네가 자유주에 있는 마지막 기회일 텐데 즐길 수 있을 때 자유를 즐기는 게 낫지.”
딕은 이틀 후에 돌아와 충직한 그랜디썬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백 달러에는 손도 대지 않은 것을 발견하자 몹시 화가 났다.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났다. 그는 심지어 그랜디썬을 야단치지도 못했다. 사실 미국 문명의 경제체제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위치를 그토록 분별력있게 인식하고 그 자리를 감동스러울 만큼 충직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흠잡을 수 있겠는가?
“저 녀석한테는 말 한마디 할 수 없단 말이야.” 딕은 신음했다. “녀석의 엉덩이를 흠씬 매질해 그 단단해진 가죽으로 메달을 만들어 걸어줘야겠어. 아버지한테 편지를 써서 내게 얼마나 모범적인 하인을 주셨는지 알려드려야겠어.”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받고 대령은 긍지와 즐거움으로 한껏 부풀었다. 대령은 한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딕이 그 검둥이를 보스턴 신문들과 인터뷰를 시켜서 우리 검둥이들이 실제로 얼마나 만족해하고 행복한지 그 사람들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
딕은 채러티 로맥스에게도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무엇보다도 특히 자기가 그녀를 위해 뭔가 진지한 일을 성취하려고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그녀가 안다면 더이상 자기를 애태우지 않고 사랑과 경탄을 퍼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랜디썬을 제거하는 명백한 방법을 아무리 써보아도 소득이 없고 외교적인 술책도 실패로 끝나자 딕은 좀더 과격한 조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혼자 도망침으로써 그랜디썬을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그랜디썬을 미국 내에 떨어뜨려놓는 것일 뿐이다. 미국에서 그랜디썬은 여전히 노예이고 그의 강한 충성심으로 말미암아 주인에게 신속하게 반환될 것이다. 딕이 북부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랜디썬을 법적으로 자유인이 될 캐나다에 영구히 남겨놓을 필요가 있었다.
‘여행을 캐나다까지 연장할 수도 있겠지.’ 딕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나 속이 들여다보이겠지. 맞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이아가라 폭포에 들러 그를 캐나다 쪽에서 떼어버리는 거다. 일단 자기가 실제로 자유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는 확실히 그곳에 남아 있을 거야.’
그래서 다음날 그들은 서쪽을 향해 출발했고 당시의 다소 느린 교통수단으로 일정한 시일이 지난 뒤에 나이아가라 폭포에 도착했다. 딕은 며칠간 폭포 근처를 걷거나 마차를 타고 둘러보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랜디썬을 데리고 다녔다. 어느날 아침 그들은 캐나다 쪽에 서서 발아래서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폭포를 지켜보았다.
“그랜디썬.” 딕은 폭포의 굉음 속에서도 들리게끔 목소리를 높이면서 말했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딕 도련님, 저는 도련님하고 함께 있습죠. 제 관심은 그것뿐이에요.”
“그랜디썬, 넌 지금 캐나다에 와 있어. 이곳은 너희 흑인들이 주인한테서 도망쳐서 찾아오는 곳이야. 그랜디썬, 원한다면 너는 바로 이 순간 나를 떠나갈 수 있고, 그래도 내가 너를 다시 붙잡으려고 손을 댈 수 없어.”
그랜디썬은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딕 도련님, 강 건너 저쪽으로 돌아갑시다요. 여기 이쪽에서 도련님을 놓쳐서 주인을 잃고 다시는 집으로 못 돌아갈까봐 무서워요.”
낙심했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딕은 몇분 후에 이렇게 말했다.
“그랜디썬, 난 저 길을 따라 저 너머의 여인숙까지 좀 올라가볼게. 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어. 아주 오래 가 있진 않을 거야.”
그랜디썬은 눈을 크게 뜨더니 다소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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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도련님, 이 근처에 그 빌어먹을 노예폐지론자들은 없나요?”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아.” 그의 주인은 노예폐지론자들이 혹시라도 있기를 바라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랜디썬, 난 네가 도망칠까봐 걱정하지 않아. 그런 걱정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그는 속으로 덧붙였다.
딕은 한가하게 길을 따라 걸어서 길가 나무들 사이로 정말 영국식으로 견고하게 지어지고 흰 도료를 칠한 석조 여인숙이 엿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 도착해서 그는 맥주 한잔과 쌘드위치 하나를 주문하고 멀리 그랜디썬이 보이는 창가의 식탁에 앉았다. 한동안 그는 자신이 뿌린 씨앗이 기름진 땅에 떨어졌기를, 말하자면 그랜디썬이 주인의 눈길이라는 구속에서 놓여나 자신이 자유로운 나라에 있음을 발견하고 일어서서 떠나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랜디썬은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충실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서, 바로 곁에 있는 그 장엄하고 경외스러운 광경에서 눈을 돌려 주인이 그의 시도때도없는 충직성을 증오하면서 앉아 있는 여인숙 쪽을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 젊은 여자가 딕이 주문한 것을 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녀는 젊고 예뻤으며 시중드느라고 남아 있었기 때문에 몇분 후에야 그는 그랜디썬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았을 때 그의 충직한 하인은 온데간데없었다.
계산을 하고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나간 것은 순식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가 폭포를 향해 온 길을 되짚어가서 그랜디썬을 남겨두었던 장소에 다가가자 너무나 역겹게도 낯익은 하인의 형체가 땅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그랜디썬은 햇빛에 얼굴을 내놓고 입을 벌린 채 그 웅장한 경치도 폭포의 천둥 같은 굉음도 은근하게 유혹하는 내면의 목소리도 안중에 없는지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랜디썬.” 그의 주인은 검디검은 장애물을 노려보며 서서 독백했다. “나는 미국시민이 될 자격이 없어. 내가 소유한 너에 대한 이점은 마땅히 포기해야 해. 그리고 너를 떨쳐낼 만큼 영리하지도 못하면 나는 분명 채러티 로맥스를 차지할 만한 가치도 없어. 좋은 생각이 있어! 그래도 너는 자유로워질 것이고 나는 너의 해방의 도구가 될 거야. 충직하고 다정한 종이여, 계속 자거라. 정겨운 켄터키의 푸른 풀과 맑은 하늘을 꿈꾸어라. 네 꿈속에서나 그것들을 다시 보게 될 테니까!”
딕은 여인숙을 향해 온 길을 되돌아갔다. 여인숙의 젊은 여자는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다가 몇분 전에 시중들었던 잘생긴 젊은 신사가 조금 떨어진 길가에 서서 여인숙에 말구종으로 고용된 한 흑인과 분명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백인 신사가 흑인 말구종에게 뭔가를 건네는 것을 보았지만 그녀는 그때 시중 일 때문에 창가를 떠났다. 그녀가 다시 밖을 내다보았을 때 젊은 신사는 이미 종적을 감추었고 말구종은 백인 한명과 흑인 한명인 이웃의 다른 두 젊은 남자들과 함께 폭포를 향해 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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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은 혼자서 그 당시 탈것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랜디썬 없이 돌아가는 그의 행동은 어느 때보다 훨씬 심각한 기색이었다. 비록 며칠 전 미리 편지를 보내 대령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놓았지만 그래도 십오분 정도는 대령과 불쾌한 시간을 보낼 공산이 컸다. 사실은 그의 아버지가 그를 질책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상세하게 캐물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딕은 조용히 막무가내로 터무니없는 계획을 밀고 나가는 기질임에도 불구하고 진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할 기회나 성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데 매우 서툴렀다. 그러나 아버지를 만나기가 꺼려지는 마음은 그를 고향으로 끌어당기는 더욱 강한 힘에 의해 상쇄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왜냐하면 채러티 로맥스가 오래전에 테네시의 숙모댁 방문을 끝내고 분명히 돌아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딕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빠져나왔다. 그는 솔직하게 이야기 했고, 그것은 나름대로는 진실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대령은 처음에는 격노했으나 격노는 화로 가라앉았고 화가 완화되어 짜증이 되고 짜증은 일종의 수다스러운 피해의식으로 바뀌었다. 대령은 자신이 몹쓸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검둥이를 믿었는데 그 검둥이가 믿음을 깨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가 비난한 것은 그랜디썬보다는 의심할 여지없이 문제의 근원인 노예폐지론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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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러티 로맥스로 말하자면, 딕은 그녀에게 물론 은밀하게 자기가 아버지의 노예인 그랜디썬을 캐나다로 도망치게 한 다음 그곳에 그를 남겨두고 왔다고 말했다.
“아아, 딕.” 놀라서 몸을 떨면서 그녀가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당국에서 알면 그 북부사람한테 그랬던 것처럼 당신을 교도소로 보낼 거예요.”
“하지만 당국에서는 알지 못해.” 그가 진지하게 대답했고, 상심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은 내 영웅적 행위를 그 북부사람의 경우만큼 알아주는 것 같지 않군. 아마도 내가 붙잡혀서 교도소에 보내지지 않아서 그렇겠지. 내가 그렇게 하기를 당신이 바라는 줄 알았는데.”
“아니, 딕 오언즈!” 그녀가 탄성을 질렀다. “그렇게 터무니없이 처리할 거라곤 꿈에도 몰랐단 말이에요.”
“하지만 오로지 당신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당신과 결혼할 수밖에 없는 것 같네요.” 딕 쪽에서 끈질기게 종용하자 그녀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당신은 매사에 너무 무모해요. 그리고 북부 곳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뉴욕과 보스턴의 사교계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데다 내다버릴 검둥이까지 있는 남자라면 누군가가 돌봐줄 필요가 있겠죠.”
“당신의 견해가 나의 심오한 신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일이네.” 딕이 열렬하게 답했다.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입증된 거야.”
그들은 삼주 후에 결혼했다. 그들 각자는 여행에서 방금 돌아왔기 때문에 신혼여행을 집에서 보냈다.
결혼식 다음주 어느 오후에 신혼부부는 딕이 신부를 맞이했던 대령의 집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그때 마당에서 흑인 한 사람이 좁은 길을 달려가 대령의 사륜마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젖혔다. 대령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잃어버렸던 그랜디썬이 남루하고 여행에 더러워지고 지쳐서 허리가 구부러지고 얼굴에는 고난과 궁핍이 역력한 초췌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대령이 계단에 내려섰다.
“톰, 이 고삐를 받아.” 대령은 대문을 연 남자에게 말했다. “마차를 헛간으로 몰고 가게. 그랜디썬이 내리게 도와주고―불쌍한 녀석, 몸이 너무 뻣뻣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해!―욕조에 물을 받아서 그를 말끔히 씻기고 밥도 먹이고 위스키도 한잔 주고 그리고 한숨 돌리고 나서 젊은 주인과 새 안주인에게 인사시켜.”
대령의 얼굴은 기쁨과 분노―귀중한 재산의 반환에 대한 기쁨과 그가 곧 진술한 이유들로 말미암은 분노―가 뒤범벅이 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깊이 타락할 수 있는지 정말 놀라워! 오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길을 따라 오고 있는데 길가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 암말을 세웠더니 숲에서 나오는 사람이 그랜디썬이 아니고 누구겠어. 그 불쌍한 검둥이는 다리 한쪽이 부러져 잘 기지도 못하더라고. 내 평생 그때만큼 놀란 적이 없었어. 깃털 하나로도 나를 쓰러뜨릴 수 있었을 거야. 그는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았고―겨우 속삭일 정도로밖에 말을 하지 못하더라고―그래서 그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원기를 북돋우기 위해 그에게 위스키 한모금을 줘야 했어. 딕, 애당초 내가 생각한 대로였어. 그랜디썬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어. 그는 자신이 잘살았던 때가 언제인지, 또 친구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거든. 노예폐지론자 거짓말쟁이와 도망흑인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어. 그러나 저 광신자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한계를 몰랐어. 죄의식 때문에 그들은 한시도 쉴 수 없었던 거야. 그들은 왜 그런지 몰라도 그랜디썬이 도망노예 사냥꾼의 소유이고 배은망덕한 도망노예를 잡는 데 와줄 첩자로 북부로 데려온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 그들은 실제로 그를 납치해서―그 일을 생각만 해봐!―재갈을 물리고 포박을 한 다음 거칠게 짐마차에 집어던져 캐나다의 한 음침한 깊은 숲속으로 데려가 외딴 헛간에 가둬놓고 삼주간 빵과 물만 먹였대. 그 악당들 중 하나가 그를 죽이고 싶어서 다른 악당들에게 죽여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악당들은 어떻게 죽일지를 놓고 언쟁을 하게 되었어. 그들이 마음을 정하기 전에 그랜디썬이 탈출한 거야. 계속 북극성을 등지고 오면서 믿기 힘든 고난을 겪은 후에 예전의 농장으로, 자기 주인과 친구한테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어. 그래, 이건 스코트(Walter Scott, 1771~1832,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아이반호』 등의 역사 모험소설 다수를 남겼음―옮긴이)의 소설 못지않아! 우리 남부 작가들 중에 씸즈(William Gilmore Simms, 1806~70, 남부의 주요 소설가이자 시인으로서 노예제 옹호론으로 유명함―옮긴이) 같은 사람이 이걸 자세히 써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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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납치 이야기는 약간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으세요? 좀더 그럴듯한 설명이 없을까요?” 대령이 활기차게 이야기하는 동안 조용히 씨가를 피우던 딕이 넌지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마, 딕.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그 망할 놈의 노예폐지론자들이 못할 짓이 뭐가 있겠어―별별 짓을 다하지! 녀석들이 그 불쌍하고 충성스러운 검둥이를 가두고 때리고 차고 자유를 박탈하고는 길고 외로운 삼주 내내 빵과 물만 주고, 그러는 내내 그 검둥이는 정든 농장을 애타게 그리워했다고 생각해봐!”
대령은 그랜디썬이 고통받는 광경을 눈앞에 떠올리고 눈물을 글썽였다. 딕은 여전히 약간 회의적이라는 의견을 표명했고 엄중하게 캐묻는 채러티의 눈길을 온순하고 무심히 받아들였다.
대령은 그랜디썬을 위해 통통한 송아지를 잡았고, 이삼주일 동안 돌아온 방랑자의 삶은 노예에게는 꿈같은 즐거움이었다. 그의 명성이 그 지방 곳곳에 널리 퍼졌고, 대령은 항상 그를 자기 곁에 편하게 잡아두어 경탄하는 방문객들에게 자기 모험담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그에게 가내하인의 영구적인 지위를 주었다.
그랜디썬이 돌아온 지 삼주가량 지났을 때 검은 피부의 인간에 대한 대령의 신뢰는 격심하게 흔들렸고 그 토대가 무너지다시피했다. 대령은 그간 주인에 대한 흑인 노예의 충성심―대령과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높이 상찬하고 가장 부지런히 함양한 노예의 미덕―을 믿었으나 이제 그런 믿음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어느 월요일 아침 그랜디썬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리고 비단 그랜디썬뿐 아니라 그의 아내인 하녀 베티, 어머니 유니스 아줌마, 아버지 아이크 아저씨, 형제들인 톰과 존, 누이동생 엘씨 역시 농장에서 없어졌고, 동네를 급히 수색하고 탐문해도 그들의 소재에 대한 어떤 정보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값비싼 재산을 왕창 잃었는데 찾아보려는 노력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 사태의 규모가 워낙 커서 흑인 노예를 주요 재산으로 장부에 올려놓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대령과 그 친구들은 극히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도망자들은 오하이오를 가로질러 북부로 도주하는 동안 세밀히 추적당하고 미행되었다. 몇번이나 사냥꾼들은 도망자들의 뒤를 바싹 추격했으나 도망치는 쪽의 규모가 커서 도망자들에게 공감하는 사람들 쪽에서 특별경계를 서주었고, 또한 이상하게도 지하철도(미국 남부의 노예주로부터 북부나 캐나다로 도망노예들을 도피시키는 비밀 탈주로―옮긴이)는 이 특정한 기차를 위해서 선로를 비우고 신호를 조정해놓은 듯했다. 한두 번 대령은 그들을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대령은 이리 호 남안의 한 항구에 있는 선창에서 미합중국 연방보안관 한사람과 나란히 서서 사라져가는 자기 재산을 마지막으로 잠깐 보았을 뿐이다. 뱃머리를 캐나다 쪽으로 향한 채 선창에서 급속하게 멀어져가는 작은 증기선의 선미에는 한무리의 낯익은 검은 얼굴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뒤돌아보는 그들의 표정은 무슨 이집트의 환락가를 동경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대령은 그랜디썬이 그 배의 한 승무원에게 자신을 가리키니까 그 승무원이 자기에게 비웃는 듯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 대령은 어찌할 수 없어 종주먹을 내질렀고, 사건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창비세계문학-미국 『필경사 바틀비』에서 전재 (허먼 멜빌 외, 창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