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와 영희
윤제림
철수와 영희가 손 붙잡고 간다
철수는 회색 모자를 썼고, 영희는 빨간 조끼를 입었다
바둑이는 보이지 않는다
분수대 앞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있는
창식이 앞을 지날 때
영희가 철수의 팔짱을 낀다
창식이는 철수가 부럽다
철수와 영희가 벤치에 앉아
가져온 김밥을 먹는다
철수가 자꾸 흘리니까 영희가 엄마처럼
철수의 입에 김밥을 넣어준다
공원 매점 파라솔 그늘 아래 우유를 마시던
숙자가 철수와 영희를 바라본다
숙자는 영희가 부럽다
일흔두엇쯤 됐을까
철수와 영희는 동갑내기일 것 같고
창식은 좀 아래로 보인다
물론, 영희와 철수는 부부다.
『그는 걸어서 온다』에서 전재 (윤제림, 문학동네, 2008)
ⓒ 양수영
부부라면 철수와 영희처럼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일곱 살이나 더 많은 아빠와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다 했냐고. 하루는 어딜 가자고 해서 따라가 보니 네 아빠 집인 거야. 네 할아버지는 소금 찍어 댓병짜리 소주를 드시고 계셨고, 네 고모는 그때 일곱 살이었는데 말똥말똥한 눈으로 날 빤히 쳐다보더라고. 안쓰러운 거야. 누가 이 남자 집에 들어와 살까, 나라도 이 남자를 구제해야겠다, 결심을 했던 거지. 하여간 엄마도 그놈의 오지랖이 문제야… 핀잔을 주긴 했지만 내 나이 서른넷이 되어 엄마 나이 서른넷을 가늠하니 엄마는 참 어릴 때부터 어른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서른넷에 나는 애는커녕 애벌레도 못 집는데 엄마는 초등학교 다니는 딸을 넷씩이나 둔 그야말로 ‘영희’가 되었으니!
어느 날 아빠에게 물었다. 일곱 살이나 더 어린 엄마와 어떻게 결혼할 엄두를 다 냈냐고. 하루는 화장품을 사주겠다고 해서 만나고 보니 네 엄마 맨얼굴인 거야. 얼굴이 화려해서 분에 립스틱에 치장깨나 하겠다고 짐작했는데 네 엄마 팔남매 중 장녀로 동생들 뒷바라지에 제 머리도 제가 자르더라고. 안쓰러운 거야. 누가 이 여자를 미용실에 보내줄까, 나라면 이 여자를 호강시켜줄 수 있겠다, 용기를 냈던 거지. 어쨌든 아빠는 그놈의 들이댐이 힘이야… 면박을 주긴 했지만 내 나이 서른넷이 되어 아빠 나이 서른넷을 가늠하니 아빠는 참 뒤늦게 운이 따랐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서른넷에 나는 콩깍지는커녕 손깍지도 못 끼고 있는데 아빠는 인연을 만나 연인을 은인으로 아는 그야말로 ‘철수’가 되었으니!
가끔 새벽에 오줌을 누러 나왔다가 안방에 들어가 서로 마주보며 잠든 내 부모의 얼굴을 훔쳐볼 때가 있다. 노래방에 가면 엄마의 애창곡부터 남들 못하게 다다다 번호 찍는 아빠는 엄마가 노래할 때 누군가 따라 부르면 그를 미친 듯이 째려보는 철수가 된다. 철수야 참아. 영희는 말하지만 나는 안다, 영희가 철수와 함께여서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음을.
동네에서 싸움이 났다 하면 일단 목청을 높여 엄마에게 SOS를 요청하고는 웃옷에, 그것도 모자라 러닝까지 훌러덩 벗고 보는 아빠 곁에서 엄마는 논리정연하게 일장일단을 따져 사과를 받아내는 영희가 된다. 영희야 짱이야, 철수는 철없지만 나는 안다, 철수가 영희와 함께여서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음을.
내 인생에 철수를 만날 수 있다면, 더욱이 내가 영희가 된다면 혹여 일흔 두엇쯤에는 수줍은 듯 말할 수 있을까. 유행가 노랫말처럼 부부는 사랑이 아니라 정 하나로 살아온 세월이라고. 아무려나 철수와 영희가 그러하듯 엄마를 만난 아빠가, 아빠를 만난 엄마가 나는 그저 부러울 뿐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