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박형준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주고 싶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 있다.
산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 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날개를 호수에 처박았다.
들풀보다 낮게 흔들리는 그녀의 맨발,
두 다리를 맞부딪치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는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 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번 힘차게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
오래 전에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힘겹게 떠 있었으나.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에서 전재. (박형준, 창비, 2002)
ⓒ 양수영
사랑이 오리
한동안 ‘사랑’하면 내겐 이 시였다. 그러면서 제목은 내 멋대로 붙여 ‘오리’였다. 사랑이 오리라니. 단지 두 단어를 이었을 뿐인데 그도 말이 되어 예뻤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하고 많은 사랑거리 중에 왜 하필 오리일까. 육봉달이 맨손으로 때려잡은 북경오리도 아니고, 친환경 쌀농사를 돕는 교배오리도 아니고, 재주라곤 뒤뚱거리며 남의 뒤나 쫓을 줄 아는 못난 오리인데 내겐 왜 그처럼 사랑이었을까.
언젠가 그를 앞에 두고 이 시를 읽은 적이 있다. 아니 읽어준 것이라고 해야 맞겠다. 무엇인가 확인하고 무엇엔가 안심하고 싶은 사심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시가 적힌 A4 용지를 펼쳤다 다시금 접고 난 뒤 한참의 침묵을 깬 건 그였다. 가위바위보… 할래? 거인처럼 구부정한 어깨로 놀이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우리는 그제야 주머니 속에 감췄던 각자의 손을 꺼냈다. 영문도 모른 채 삼세판도 정하지 않은 채 소풍 나온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이 사방에서 심판을 보는 가운데 계속되는 가위, 바위, 보… 펼쳤다 오므렸다 브이였다 겉으로는 천진한 척 속으로 이기려는 계산이 분명했을 나의 손을 보며 그가 말했다. 네 손가락이 꼭 네 발가락 같아.
‘홍조를 띤 그녀의 맨발’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내 발은 정말이지 못났다. 타고난 콤플렉스가 여럿이라지만 그중 나의 으뜸 지닌 곳은 다름 아닌 발이어서 나는 들키지 않기 위해 바짓단을 길게 끌고 다니는 것으로 종종 내 감춤의 의지를 피력하곤 했다. 그럼에도 내 발을 만져주는 손이 있었으니 그것이 아마 사랑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는 그의 찬 손이 내 찬 발을 만지지 않게 되었을 때 그것이 아마 사랑의 끝이었을 것이다. 그로 자주 배가 고팠고, 잠이 쏟아졌고, 어느 날 포장마차 떡볶이를 삼 인분쯤 먹어치운 나는 그 길로 심야 경주행 우등버스에 올라탔다. 가서 무얼 하고 왔는지 그는 묻지 않았지만 나는 홀로 답했다. 하루 종일 이 무덤 저 무덤을 배회하다 숙소 앞 호수에서 오리배 타는 연인들을 보며 침을 딱 뱉었는데요, 그게 딱 내 구두코에 떨어지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그 사랑, 오래 쉬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랑, 오래 안 잊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랑, 오래 고여 이제 호수다. 거기 호숫가 주변을 추억으로 돌다 보면 무릎 꺾이는 순간들이 종종이다. 거기 호수에 한참을 발 담그고 있다 보면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이 빤한 진실 너머 사랑의 맨얼굴은 어디에 가 비춰봐야 하는 건지 묻고 싶어진다. 그래서 별별 허함으로 또다시 배고파지는 나다.
어떤 시큰거림이 코끝이 아니라 무릎으로부터 연유한다면 이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내 무릎은 좀 아파야 할 터인데 좀처럼 기미가 안 보인다. 대신 한 마리의 오리와 노는 재미에 빠졌다. 친한 선배 시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오리 인형인데 베니스의 아이들이 만든 것을 사온 거라 했다. 오리라서 반갑고 오리라서 다행이다. 오골계나 고니나 거위라는 이름이 내게 왔다면 그건 애초에 못 오리라는 심산으로 풍기는 부정의 닭똥냄새가 아닌가. 하여 오리라니, 내 사랑도 곧 그러하지 않을까 노처녀의 얕은 심산으로 한 번 기대해보는 바다. 그러니까 내게 새로 생긴 유황오리집 고기 맛이 좋다는 말씀 더는 하지 마시라. 시작도 전인데 오물오물 오리 씹다가는 부정 타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