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춤
곽재구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텐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낙엽 아래 작은 시냇물이 노래하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리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열어 젖혀야겠다
죽은 새소리 뒹구는 벌판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초록빛 춤을 추어야겠다
『서울 세노야』에서 전재 (곽재구, 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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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잃어버린 아름다움
김정규
이맘때쯤 일듯싶다. 정말 가기 싫은 군대에 억지로 끌려간 것도 억울한데, 읽을 수 있는 글자라곤 내무반 한 쪽에 철된 국방일보를 곁눈질로 힐끔거릴 수 있을 뿐일 때였다. 아마 상병을 갓 달았을 즈음이었다. 세상과 단절되어 나를 잃어버린 답답한 마음을 유난히 바깥세상보다 추운 날씨가 더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뭔가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매지도 않았다. 아니 찾아다닐 수도 없었다. 그렇게 삶의 열기를 잃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 화장실에 놓고 간 <좋은 생각>이란 잡지가 나를 잡아끌었다. 누가 눈치채지 못하게 잽싸게 품에 넣고 내무반으로 후다닥 들어왔다. 두리번두리번. 내무반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잽싸게 <좋은 생각>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촤르륵! 그러다 바로 시 한 편이 적힌 페이지에 멈췄다. 곽재구의 시 「겨울의 춤」은 그렇게 운명처럼 다가와 내 차가운 가슴을 조용히 덥혀주었다.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젊음의 뜨거운 열기로 사회에 저항하던 학생 시절을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빈 머리 뜨거운 가슴’이라 불렀다. 아무리 ‘뜨거운 가슴’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과 나를 더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불렸던 ‘빈 머리 뜨거운 가슴.’ 허나 군대에서 삶의 열기를 잃어갔을 때도, 사회에 나와 증오하던 세상에 길들여져 가고 있을 때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것은 ‘가득 찬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이 먼저였다. 이를 일깨워 준 것이 바로 시 「겨울의 춤」이다. “끌어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은 머리로 절대 느낄 수 없다.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겨울의 춤」은 그렇게 내 가슴을 일깨웠다.
벌써 20년이 지난 이 빛바랜 시를 기억하는 사람 없건만, 요즈음 나는 자꾸만 이 시가 떠오른다. 예전처럼 내 삶의 “삐걱이는 창틀” 때문도 아니요, 슬그머니 다가온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 때문도 아니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 더 이상 가슴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엔 이 세상은 이미 더러운 욕망들로 분칠할 곳이 더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렸다. 나조차도 그 세상에 동화되어 망가져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벗어나기 위해 수없이 발버둥쳐 왔다고 생각했건만, 결국 몇 발자국 빠져나오지도 못한 건 아닐까? 그러면서 「겨울의 춤」을 계속 되뇌어 본다.
“아름다운 곳”이라는 희망은 그 생명력이 무섭게도 질긴가 보다. 시를 계속 떠올리며 읽다보니 내 비관적 생각의 틈을 비집고,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더 익혀야겠다는 또 다른 마음이 싹을 틔우니 말이다.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선 더 혹독하게 빛나는 차가움을 겪어야, 아니 익혀야 하는 법임을 어렴풋이 다시 깨닫는다. 그 “겨울의 춤”을 제대로 익힐 때, 우리는 새봄을 맞이하고 “초록의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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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곽재구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2년 신동엽 창작기금과 1996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사평역에서』(1983), 『서울 세노야』(1990),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년) 등과 기행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1993), 창작장편동화 『아기참새 찌꾸』 (1992)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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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정규
(이반 일리치가 말했듯이) 인류를 구할 세 가지 도구는 “시, 자전거, 도서관”이며, 살짝 미쳐야 인생이 즐겁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이다. 책과 도서관에 살짝 미쳐 현재 공공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다. 헌책방과 도서관을 뒤지며, 지금은 잊혀진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던 어느 날 헌책방에서 만난 한 여인이 가슴속에 들어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 사랑스러운 여인과 함께 ‘조화로운 삶’을 고민하고 실천하며 살고 있다. 블로그 http://dlibrary.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