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9
김용택
강 건너 산밭에 하루 내내 스무 번도 더 거름을 져나르셨단다. 어머님은 발바닥이 뜨겁다며 강물에 발을 담그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세상이야 이래도 몸만 성하면 농사짓고 사는 것 이상 재미있고 속 편한 게 어디 있겠냐며 자꾸 갈라진 발바닥을 쓰다듬으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어머니, 우리들의 땅이신 어머니. 오늘도 강을 건너 비탈진 산길 거름을 져다 부리고 빈 지게로 집에 돌아오기가 아까워 묵은 고춧대 한 짐 짊어지시고 해 저문 강 길을 홀로 어둑어둑 돌아오시는 어머니, 마른 풀잎보다 더 가볍게 흔들리시며 징검다리에서 봄바람 타시는 어머니. 아, 불보다 더 뜨겁게, 불붙을 살도 피도 땀도 없이 식지 않는 발바닥으로 뜨겁게 뜨겁게 바람 타시는 어머니. 어느 물, 이 나라 어느 강물인들 어머님의 타는 발바닥을 식히겠습니까 어머니, 우리들의 땅이신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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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 마디]
뜨거운 발바닥 가진 여자
문선희
급하게 찾은 곳이었다. 무척 화가 나있어 길마저 찾지 못하고 헤매었다. 도착한 때에는 약속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허겁지겁 북촌 100년의 물건을 모아둔 그곳에서 보았다.
올해 따서 툇마루에 얹어둔 늙거나 채 늙지 않아 퍼렇고 누런 호박 네 개, 가게 앞을 지나다가 얼굴을 씻곤 했던 그것과 같은 펌프, 우리 집에 있던 것과 같은 재봉틀, 장독대에 드는 볕을 받으라고 널어둔 것들, 사과 배 껍질, 붉은 대추가 든 바구니…
이 작은 박물관을 찍는 동안 사람은 들지 않았고 가끔 까마귀 울음만 일었다. 어릴 적 나의 낡은 한옥에 있던 것들, 풍경, 냄새…그런 것들이 마음을 잡아 쥔다. 이곳은 매우 정돈되고 차고, 윤기가 나는 집이다.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 네 딸을 낳고, 그 딸들을 먹여 시집을 보냈어도 여전히 남편 시중에, 집안일에 생업까지 해야 하는 어머니.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애들 전집은 꼭꼭 챙겨 다락에 쌓고, 일을 마친 저녁이면 막걸리 넣은 빵을 쪄주던 어머니. 봄에는 장을 담가 장독을 채우고 산쑥을 뜯어 찌고 남은 것은 얼려두어 여름내 또 쪄주고 집에 온갖 먹을 것을 심느라 분주한 여름이 지나면 도토리 주워 말려 또 빻아 몇 시간을 저어가며 묵을 쑤어주던, 그 겨울 온돌방 아랫목에 잘 삶은 콩을 싸매어 청국장을 띄우고 동치미를 마당의 밤기운으로 얼리고 김장을 몇백 포기씩 하던, 배추를 씻느라 몇 시간씩 마당에 섰던 언 발의 어머니. 이제 칠십이 다 되어도 여전히 극성스러운 어머니.
늦은 저녁에 오도카니 앉아 빛이 덜어지는 마루에서 응차, 부지런을 떠는 까닭은 내가 그 여자를 잊지 못함이다. ‘불보다 더 뜨겁게, 불붙을 살도 피도 땀도 없이 식지 않는 발바닥으로 뜨겁게 뜨겁게 바람 타시는 어머니’ 그 여자의 뜨거운 발바닥이 나에게 남겨져 그 여자 흉내를 낸다. 부르고 불러 흔해 빠지고, 쓰고 써 유치해져도 또 부르고 쓰는 이름. 부르지 않아도 불러지는 이름 부른다. 그 뜨거운 발바닥의 여자를 알고도 모른 체 살아가며, 낯부끄러운 마음은 마룻바닥을 차고 윤기 나게 닦는 일로 대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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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용택
대한민국의 시인으로 모더니즘이나 민중문학 등의 문학적 흐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로 독자들을 감동시키며 대상일 뿐인 자연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한 그는 김소월과 백석을 잇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시인은 스물한 살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교직기간동안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임실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 섬진강 연작으로 유명하여 '섬진강 시인'이라는 별칭이 있다. 2008년 8월 31일자로 교직을 정년 퇴임하였다. 이름이 알려진 후에도 김용택이 고향 마을을 떠나지 않은 까닭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하다. 김용택는 출근길의 꽃내음과 학교 뒷산 솔숲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자신의 시와 삶을 길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택은 시적 상상력은 그래서 '촌'스럽다. 시집으로 『섬진강』, 『맑은 날』, 『강 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그대, 거침없는 사랑』, 『그래서 당신』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섬진강 이야기』, 『인생』 등이 있다. 이밖에도 성장소설 『정님이』,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내 똥 내 밥』, 동시엮음집 『학교야, 공 차자』, 시엮음집 『시가 내게로 왔다』 등 많은 저작물이 있다. 1986년 김수영문학상을, 1997년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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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문선희
동네 미용실집 막내딸로 태어나 일찍이 롯트 말기와 중화제 바르기, 머리 감기기 등을 익혔으나 결국 풍운의 꿈을 안고 제도권 교육에 합류, 강호에서는 실력 말고 놀기만 연마, 우연히 친구 따라간 대학에 몸담아 그 전공으로 먹고살고 있다. 청탁 넣고 취재하고 촬영하는 일이 주이지만 혹간 인터뷰 갔던 장소에 심히 도취되어 기사 쓰기보다 그곳에 관한 일기 쓰기를 더욱 즐긴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문화단체에서 기관지를 만드는 데, 일에 급급하다가도 옆구리에 책 하나 끼고 걷는 일이 즐거워 시간을 채우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