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입 속의 검은 잎』에서 전재 (기형도, 문학과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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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나의 ‘이십대 사춘기’
김현정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말하지만, 돌이켜보면 이십대 초반이야말로 진정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십대엔 대학 입학이라는 확고한 명제가 다른 고민들을 눌러버렸기 때문인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러나 원하던 대학과 학과에 합격하고 이십대가 되자 진짜 방황은 시작되었다. 난생처음 술도 마셔보고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하다 말싸움도 벌였으며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이 땅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따위의 결코 결론이 나지 않을 고민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했다.
물론 가장 큰 고민은 세계 평화도 민주주의도 아닌, ‘나는 왜 이런가’ 하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안 그런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등록금과 자취방 월세, 생활비를 버느라 늘 쪼들려야 하는지 쉽게도 ‘센치’해졌다. 경제적으로도 외적 환경으로도 외모나 실력 면에서도 어느 하나 내세울 게 없다고 느껴졌다.
그때 만난 시집이 기형도의 『입 속은 검은 입』이었다. 이십대에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삶 때문일까, 그의 시는 한 편 한 편마다 불안한 청춘의 피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질투는 나의 힘’을 보라. 매일 내 마음속에서 세워졌다 허물어지는 그 수많은 공장, 땅 위에 발붙이지 못한 채 공중에서 지칠 줄 모르고 머뭇거리던 기억……. 나는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돌아오는 저녁 거리에서 물끄러미 내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다. 부모님의 경제력 덕분에 등록금에 떨지 않아도 되는 학생들, 다정한 연인이 있는 친구들, 예쁘고 날씬한 여자 아이들, 정말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다. 이 시를 외우는 것은 자존심을 잃지 않고 세상에게 화를 내거나 현실을 한탄하는 낭만적인 방법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대학시절을 보내고 졸업한 뒤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조금씩 질투는 사그라졌다. 연인이 있다고, 높은 지위에 올랐거나 돈이 많다고 삶이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님을 배웠기 때문이다. 서서히 ‘나’라는 감옥, 질투와 자기연민의 감옥에서 헤어나면서 나는 삼십대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토록 격렬하게 슬퍼하고 좌절하고 질투하고 때로는 희망에 들떴던 나의 이십대 또한 청춘의 소중한 흔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이십대의 ‘사춘기’를 쓰다듬고 위로하고 함께 울어주었던 기형도의 시 또한 그러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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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기형도
1960년 경기도 연평 출생.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법계열에 입학하여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을 앞둔 1984년에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여 정치부 · 문화부 · 편집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첫시집 『입 속은 검은 입』의 출간을 앞둔 1989년 3월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 첫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셈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20년이 되는 2009년 3월을 기준으로, 1989년 5월에 출간된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초판 24쇄, 재판 41쇄, 총 65쇄를 찍었으며 24만 부가 판매되었다. 1999년 3월에 그의 10주기를 기리며 출간된 『기형도 전집』은 초판 15쇄를 찍었으며 4만 7천 부가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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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현정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되면 당연히 작가가 될 줄 알았다. 햇살 한 조각 들지 않는 좁은 방에서 네 가족이 모여 살던 그 시절, 책 한 권이면 어느 시대든 전 세계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었으니까. 어쨌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는 직업을 가졌으니 그 꿈을 반쯤은 이룬 셈이다. 삼십대인 지금도 나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따뜻한 시선으로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부족한 글이나마 누군가에게 한 조각 희망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