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 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서 전재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2008)
--------------------------------------------------------
[소개한 이의 한마디]
스물아홉 동지들에게
권혜원
내게는 열네 살에 만나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는 오래된 친구가 하나 있다. 그 아이는 십대 시절에, 자기는 스물이 되면 콱 죽어버릴 거라는 식의 말을 곧잘 했었다. 나이에서 십의 자리 숫자가 바뀌는 것을 마치 불가능한 사건처럼 여기던 심리가 반영된 발언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때 우리는 이미 이십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내 친구의 시적인 염원도 보다 현실적인 대안, 그러니까 ‘마흔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같은 것으로 진일보해 있었다. 어쨌든 그때서부터 한동안 우리는 다음 십의 자리 숫자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당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감당할 수 없이 무한한(것처럼 여겨진) 선택의 자유였으므로,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유 따위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 거리에 게워댈 권리가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 쭈그린 채 비굴하게 연명하던 흡연자들도, 이제 담배연기를 비싼 명함 내밀 듯 세상에 자랑스럽게 뿜어댈 수 있었다. 일생일대의 사랑에 실패했다고 울면서 영광의 상처를 까 보이면 동지들은 박수를 쳤다. 취할 일이 차고 넘쳤다. 우리가 바로 청춘이라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어 자랑한 적은 없었지만, 우리의 주정이, 실수가, 후회가 전부 자랑하는 몸짓이었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 이십대를 이제 거의 다 살았다. 칭송받는 이십대의 젊음이 최소한 나에게는 영원할 거라고 말도 안 되게 우기곤 했었는데, 이제 끝을 맺기 일보 직전이다. 그 자리에 변하지 않고 머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십대의 십 년을 살고서 체감하는 이 명제가 참 입에 쓰다. 하루하루 슬프다.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이 애도의 기간에 발견한 ‘청춘’이라는 시, 하나하나 나열된 장면마다 내 지난 이십대의 사건사고가 쉴 새 없이 복원된다. 내가 분명 살아온 시간인데, 잊힌 영화 보듯이 새롭다. 그때 그 처절했던 내 몸짓들이 상당수는 삼류 유머처럼 읽힌다. 하지만 어떤 것은 다시 한 번 고스란히 돌아오는 아픔이기도 하다. 이렇게 청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흘러넘치고 있겠구나 싶다.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에 꽤나 위안이 된다.
심술 맞고 고약한 장난처럼 이 시의 바로 뒷장에 버티고 서 있는 시의 제목이 ‘삼십대’이다. 두 시가 나의 양팔을 붙잡고 잡아당겨서 몸을 두 쪽으로 뜯어낼 것만 같다. 자꾸 슬프고, 억울하고, 그런데 이상하게 위로받는 것도 같은 기분. 그래, 나보다 이십대를 먼저 살았고 청춘을 눈물겹게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먼저 출발해서 묵묵히 그들의 삼십대를 살고 있겠지. 나도 이제 곧 그곳으로 간다. 나의 스물아홉 동지들, 용기 내서 함께 가셨으면 한다. (*)
------------------------------
작가 소개
심보선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있고 여행 산문집 『천문대 가는 길』(전용훈 글, 심보선 사진)이 있다.
------------------------------
필자 소개
권혜원
학생 노릇만 20년을 하다가 이제 겨우 2년 차 직업인이 되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이십대를 정신없이 놀며 달려오다가 문득 정신 차리니 목전에 서른 고비를 두었다. 아홉을 넘기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아홉수 타령하는 것을 들으며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하루를 살고 있다. 이 사람의 요즘 최대 고민은 어떻게 하면 삼십대에도 지치지 않고 놀 수 있는가에 있다. 따라서 젊은이치고 심하게 바닥을 치는 체력과, 아무리 세어 봐도 부족한 월급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장애물이다. 그래도 놀고자 하는 감성은 저 혼자 앞서나가는지라, 잠을 줄이고 카드를 긁어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무작정 거리를 누빈다. 제테크도 결혼도, 아 몰라 귀찮아, 하는 이 사람. 오늘도 불안함을 알약 털어먹듯 꾹 삼켜본다. 인생의 새로운 절기를 그저 자기 좋은 방식으로 준비하는, 아직은 철이 한 개도 안든 애어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