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유치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숫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한국 현대시인 연구-18, 유치환』에서 전재 (박철석 편저, 문학세계사, 1999)
---------------------------------------------------------------
[소개한 이의 한마디]
예쁘다, 수고했다, 멋지다, 훌륭하다
정명심
일상의 시간 중 차 한 잔의 여유로운 시간을 내기 위해 책상 위로 굴러다니는 일상의 눈동자는 바쁘다. 마치 영혼이 없는 건조한 로봇처럼 기계적인 손동작은 익숙한 컴퓨터 자판과 일체다. 잠시 잠깐 창밖의 풍경에 눈길이 머물라치면 어느 사이 마음이 저만치 달아나 푸른 하늘의 구름이 된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10월의 바람과 햇살이 솜사탕마냥 달콤하고 부드럽다. 버릇처럼 허수아비 놀이를 한다. 허수아비처럼 팔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르면 햇살이 실바람을 동무하고 어깨 위로 내려앉아 그네를 탄다. 붉은 벽돌 벽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하면 눅눅한 가슴이 햇살 향기를 내며 보송보송 피어난다. 스멀스멀 가슴이 간지럼을 탄다. 순간 눈물 같은 행복이 울음처럼 북받쳐 오른다. 엉엉 토해내지 못하는 울음이 목젖을 따갑게 당긴다.
행복, 무엇이 행복인지 어떤 것이 행복인지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 그때는 몰랐다. 그저 하루를 시작하는 버거운 아침이 몸서리치듯 싫었다. 아니 하루하루가 어서어서 지나서 빨리 늙고 싶었다. 빨리 늙고 싶었다는 말은 빨리 죽고 싶었음을 병풍으로 가리는 마음이었으리라. 그때는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가족의 사랑,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도구로서의 의무, 의무적인 사랑, 얼굴 가득 기미를 끌어 앉고, 밤마다 악몽의 진땀으로 잠을 설치고… 거룩한 예수님은 만인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사랑으로 승화하였거늘 사랑하는 한 사람을 위해서 희생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20년의 세월을 사막의 건조한 모래바람과 싸우며 신기루로 목마름을 달랬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눈을 뜨니 사랑은 온전히 사탕발림, 배신의 비수가 신뢰의 심장을 도려내고 있었다. 툭툭 털었다, 철철 흐르는 검붉은 피를 먼지 털어내듯 툭툭 털어 냈다.
퐁 퐁 샘물은 작지만 어여쁘고 아름답게 솟아 연분홍 심장을 만들고 눈물을 씻어 주었다. 그때 가난한 나의 가슴을 잡아준 시가 「행복」이었다 평범한 일상의 일들이 행복으로 승화하는 날개를 달게 된 것이다. 날마다 나는 나에게 사랑한다, 예쁘다, 수고했다, 멋지다, 훌륭하다,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세상에 어느 무엇보다 소중한 “나”이므로. 나를 멋지게 인정할 때 행복은 대답한다. 그래 세상은 아름다운 행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때때로 세상은 나를 전사의 깃발로 “돌격 앞으로”를 외치게 하지만 아아 지금은 치유의 시간. 나뭇잎 속에 숨어 피는 은빛 햇살이 바람결에 반짝반짝 흔들리면 이내 가슴은 연분홍빛 설렘으로 덩실덩실 춤을 춘다. 오늘처럼 하늘빛이 하늘빛으로 아름다운 날은 분명 밤하늘은 짙은 청보라 빛 천지가 된다. 오늘 밤은 한잔 술이 없어도 온전한 행복을 동무하고 가을에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운 그대 나의 친구가 되어도 참 행복하겠다. 이젠 그저 세상 시름 접어두고 행복해지고 싶다. (*)
-----------------
작가 소개
유치환 (1908-1967)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으로 꼽히는 시인으로, 1908년 음력 7월 14일 경남 거제시 둔덕면에서 8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극작가 동랑 유치진이 청마의 맏형이다. 동래보통학교와 일본 부장중학교를 거쳐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였으나, 1928년 학교를 중퇴하고 그해 10월, 11세부터 알고 지내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1930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한 후, 1939년에 첫 시집인 『청마시초』를 출간하였다. 이후 교직에 몸담으며 40여 년 간 총 14권에 달하는 시집과 수상록을 출간했다. 1947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을 비롯하여 서울특별시 문화상, 아시아재단 자유문화상, 제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부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1967년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60세에 생을 마감했다.
-----------------
필자 소개
정명심
어떤 이는 나를 두고 철부지라 하고 어떤 이는 나를 두고 머리에 꽃 꽂고 논두렁 위를 실실 웃고 다니는… 또 어떤 이는 시인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연극배우라 한다. 그리 보면 모두 틀린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맞는 말도 아니다. 딱히 철이 없는 것도 아니요, 온전히 미치지 못했으니 미친년도 아니요, 소녀 시절부터 낙서처럼 글을 쓰긴 했으나 변변한 시집 한 권 출판 못했으니 온전한 시인도 아니요, 20대에 올린 몇 편의 공연의 아쉬움이 그리워 다시 시작한 연극인으로 이제 5년을 갓 넘긴 새내기 연극배우이기 때문이다. 무대는 설렘이다. 무대 위에 서면 행복하다. 내 속에 나도 모르는 아름다운 내가 나를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무대는 나의 존재를 짜릿한 전율로 확인시켜준다. 현재 목구멍 해결사로 공무원 일을 한다. 말단 공무원이자 실핏줄인 셈이다. 한때는 방송국에서 성우로 콜이 있었으나 공무원을 고집한 이유 중 하나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언감생심이다. 그래도 나는 나의 일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내가 언제 빨리 늙음을 재촉한 사람이란 말인가. 하루하루의 일상이 고맙고 행복하고 사랑스럽다. 아침에 눈 뜨며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는다. 창을 두드리는 햇살도 바람도 하늘도 구름도 들풀 하나도 참 곱다 참 사랑스럽다. 사람들이 좋다 사람들이 아름답다. 사람들이 참 좋은 사람이라 부르는 그 이름에 행복하다. 내가 정말 참 좋은 사람인가? 오늘도 나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용서를 구한다. 오늘 나의 이기심으로 상처받은 세상 모든 것들에 미안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