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스톱
한하운
빨간 불이 켜진다
파란 불이 켜진다.
자동차 전차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모두들 신호를 기다려 섰다.
나도 의젓한 누구와도 같이
사람들과 사람들 틈에 끼어서
이 네 거리를 건너가 보는 것이다.
아 그러나
성한 사람들은 저이들끼리
앞을 다투어 먼저 가버린다.
또다시 빨간 불이 켜진다
또다시 파란 불이 켜진다.
또다시 자동차 전차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모두들 신호를 기다려 섰다.
또다시 나도 의젓한 누구와도 같이
사람들과 사람들 틈에 끼어서
이 네 거리를 건너가 보는 것이다.
아 그러나
또다시 성한 사람들은 저이들끼리
앞을 다투어 먼저 가 버린다.
『파랑새』에서 전재 (한하운, 문학과현실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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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네거리에서 그 어느 누구라도 함께 ‘GO’ 하는 날!
김현주
“우리가 오는 거 안 좋아했어 상점에서… 지금? 이제 맘대로 갈 수 있어.”
지나가다 우연히 TV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길이 갔다. 누군가가 켜놓은 것일 텐데 화면에선 한센병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말씀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풍경. 작은 사슴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소.록.도였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 했던가? 사회에서도 난 늘, 이런 식의 필연으로 소록도와 이어져 있었다.
대학 2학년 여름, 소록도 할아버지, 할머님들과의 첫 만남은 서로의 편견으로 시작됐다.
한센병에 대한 왜곡된 정보와 당신들의 외모 때문에 사회 사람들이 불편해할 거란 생각으로 그분들은 애써 우리의 시선을 피하셨고, 왜 그랬는지 지금도 이해할 순 없지만 난 내 나름의 착각에 빠져 그분들을 살아있는 천사라 무조건 믿어버렸다.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와 눈 맞춰 얘기하고, 손 붙잡고 웃으며, 같이 식사도 하고 잠도 잤다. 그러면서 한센병에 대해 조금 더 정확히 알게 되었고, 털끝만치 남아있던 ‘혹시나’의 걱정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그동안 난 많은 분들을 만나고 또 그만큼 많을 분들과 세상 이별을 했다. 그리고 깨달은 건, 그분들은 천사가 아니라는 거였다. 즐거울 땐 뽕짝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도 추고, 조금 더 가지려고 욕심도 부려보고, 남 사는 거 질투도 하며, 문신으로 예쁘게 눈썹 만들고는 수줍게 웃으시던, 나와 같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셨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발견한 그 평범함은 사회에선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소록도 장 집사님과 함께 몇 년 전 시장 그 어딘가로 택배 부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문둥이가 저렇게 대놓고 싸돌아다녀도 돼?” 어딘가에서 날아온 그 사나운 말투. 순간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세상 많이 달라졌다더니 아직도, 여전히, 그랬구나… 이렇게 살고 계셨구나… 지금 보니 한하운 시인이 서 계셨던 네거리가 바로 그곳이었다.
요즘도 난 사람들에게 한센병이 전염병 아니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럼 난 답한다. 날 보라고, 내가 그 살아있는 증거라고. 진실로, 진실로 전염되지 않으니 믿으셔도 된다고. 부디 내 말이 마술을 부려 그분들의 마음속에 제대로 잘 전달되었길 바란다. 그래서 네거리에 파란불이 켜질 때 그 어느 누구라도 함께 ‘GO’ 할 수 있는, 할아버지 말씀처럼 이제 맘대로 갈 수 있는, 그런 날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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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한하운 (1920-1975)
본명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생. 중국 베이징[北京]대학 농학원을 졸업한 후 함남·경기 도청 등에 근무하다가 나병의 재발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치료하다가 1948년에 월남, 1949년 제1시집 『한하운 시초(詩抄)』를 간행하여 나병시인으로서 화제를 낳았다.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를 간행하고, 1956년 『한하운시전집』을 출간하였다. 1958년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19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 길』을 냈다. 자신의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은 그의 시는 애조 띤 가락으로 하여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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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현주
70년대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나 무수한 경쟁 속에서 늘 허우적거리며 용케도 버티며 살아왔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먼저였고, 남의 눈치가 언제나 내 의지 위에 있었기에 참으로 답답하고 고단한 인간.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러다 우연히 만나게 된 ‘드라마 작가’의 꿈. 진실로 하고 싶은 일이었고 열정이란 게 내 DNA 속에도 존재하는구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거금 들여 작가교육원에 다니면서 난, 몇 년 안에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을 작품 하나 쓸 것이라 너무도 당연히 믿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땐, 정말 그랬다. 그해 여름, 소록도 방문에서 나의 할아버지이셨던 김창하 할아버지께 몇 년 안에 TV에서 제 작품 보실 수 있을 거라 약속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같은 해 겨울, 할아버진 “김현주란 이름이 들리기에 넌가 해서 가까이 다가가 봤다. 근데 니가 아니야. 몸집도 다르구.” 연말 시상식에 상을 타러 나온 배우 김현주를 보셨던 거다. 당시 90대 초반이셨던 할아버진 귀가 점점 어두워지셔 이 손녀가 TV에 나올 거라 잘못 이해하셨고, 눈은 안 보이지만 귀는 밝으셨던 할머닌 그 일로 할아버지와 미운 소리까지 오갔다 하셨다. 뭉뚝한 손발 때문에 다리를 움직여 엉덩이로 끌며 TV 앞에 가셨을 할아버지. 얼마나 반가우셨을까? 그 실망은 또 어떠하셨을까? 지금도 꿋꿋하게 유지하고 있는 내 커다란 덩치 덕분에 잉꼬인 할아버지 부부의 말다툼만을 남긴 채 그 일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내 가슴은 왠지, 아프고도 따뜻했다… 그리고 10여 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난 작가지망생이다. 이젠 객기도 사그라지고, 할아버지도 재작년 소천하셨지만 뒤늦게나마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 두드리며 새벽맞이를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