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도종환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부드러운 직선』에서 전재 (도종환, 창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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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오늘, 이 하루를 오롯이 산다는 것
김미정
서른 살. 내 나이의 주인으로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가 한번 돌아보니, 나는 오늘을 오롯이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보다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시간을 갖게 되면 하고 싶은 것들 몰아서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몰아서 만날 양으로 나의 하루를 희미하게 보냈고, 다시 오지 않을 어제를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그리며 오늘을 보냈다. 바람소리나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고, 지는 노을은 물론이거니와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서른이 되었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어도 여전히 꿈은 멀었고 좀 더 열정적으로 살지 못한 어제가 후회스럽고 오늘 하루는 지쳐서 가고 있다. 오늘은 종일 날이 흐리더니만 저녁 무렵에는 떨어지는 빗방울로 집 앞 나무들이 소란스럽고 나도 모르는 새 여름이 가는지 제법 쌀쌀한 바람이 몸을 떨게 했다. 괜스레 마음이 스산하고 울적해 지우에게 전화를 걸려다 어쩐지 바쁠 것 같은 친구에게 마음 쓰게 하는 것 같고,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나 그만두었다. 혹 모르겠다. 비 내리는 오후 왠지 마음이 가라앉고 술 한 잔 생각나 나에게 전화를 걸려다 그만둔 사람이 있을지… 지금보다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치열하게 남과 경쟁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은커녕 나 자신도 돌보지 않으며 오늘을 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할 어제와 내일을 살아가는 사람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다 지쳐 터벅터벅 돌아가는 귀갓길. 생각나는 지인에게 마음 편히 안부를 건네지도 못해 다음으로 미루고, 만나자는 약속 한번 선뜻 건네지 못하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참 외롭고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속상하게도 요즘은 이렇게 외롭고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어쩌겠나… 우리는 또 오늘을 살아야만 하고,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내일의 꿈과 야망으로 오늘이 보이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시련과 외로움에 부딪히게 될 것을… 그러니 오늘, 이 하루 매 순간 온 진심으로 미친 듯 살고, 다만 지쳐 돌아오는 귀갓길만이라도 한 발짝 천천히 걸어보자. 서정주 시인이 ‘무등을 보며’에서 말한 것처럼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 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가까운 인연들과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마라도 짚어주자. 그렇게 서로 위로하고 보듬어, 가시덤불 쑥 구렁 같은 시련의 하루를 보냈어도 의연한 마음으로 여유로이 삶을 받아들여 보자. 그렇게 마무리하는 오늘 하루하루들이 모여 언젠가 또다시 삶을 돌아봤을 때, 나는 오롯이 오늘을 살았다고… 그리고 그 틈에도 사랑하고 사랑받아서 지치거나 혼자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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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도종환
시인.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시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과,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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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미정
대학 졸업 후 몇몇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고, 지금은 생 후 한 달 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찬란한 이십 대를, 꿈을 이뤄보겠다고 미친 듯이 일하며 공부하며 숨 가쁘게 보내버렸다. 정신 차려 보니 서른이 되어 있었고 나의 이십 대는 꿈도 이루지 못하고, 이렇다 할 추억도 없이 허망하게 끝나 버렸다. 그러나 다시 이십 대로 돌아갔어도 나는 아마 똑같이 살았을 것 같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中) 나는 주변을 돌아볼 겨를 없이 바쁘게 내일을 꿈꾸며 사는 길을 택했고 또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렇게 지치도록 바쁘게 살았던 나에게 수고했다 위로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꿈에만 매달려 후회와 눈물로 보낸 날들이다. 이제 시작인 나의 삼십 대도 직장인으로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정신없이 바쁘겠지만, 좀 더 여유 있게 주변을 돌아보며 한 발짝 천천히 걸어볼 생각이다. 지금은 한밤 중. 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가슴 설레고… 수다를 곁들인 시원한 맥주 한 잔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