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에 대하여
장석남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에서 전재. (장석남, 문학과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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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삶은 달걀이 아니라 얼룩이다
정철용
나는 욕실 거울 앞에 서 있다. 샤워를 막 끝낸 참이라 거울의 표면은 온통 뿌옇게 김이 서려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름장들 위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바다처럼 군데군데 드러난 곳들이 보인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얼룩이 있는 자리들이다. 양치질하다 부주의하게 뱉은 침이나 면도하다가 무심코 만진 손자국이 만든 얼룩들이리라. 흐릿하게나마 벌거벗은 내 몸을 비추어 주는 것은 그 얼룩들뿐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삶은 달걀이라고들 하지만 내게는 삶은 얼룩이다. 삶은 달걀의 껍질은 누구나 쉽게 깨뜨릴 수 있어도 우리네 삶이 만든 얼룩은 펄펄 끓는 물에 독한 세제를 넣고 푹푹 삶아도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 얼룩은 마음에 새겨진 까닭이다. 누구는 그 얼룩에서 죄를 읽고 누구는 또 치욕을 읽는다. 그 얼룩에서 너는 분노를 보고 나는 좌절을 본다. 드물게 그 얼룩에서 거룩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때는 이미 우리는 저물녘인 것이다.
노을 든 구름장들이 숨기고 있는 천 개의 손과 눈으로, 비로소 지나온 삶의 내벽을 더듬어 보는 사내여, 네 삶의 얼룩들은 얼마나 사소한 것이냐. 네 마음의 얼룩들은 얼마나 비루한 것이냐. 뿌옇게 흐려진 욕실 거울 앞에서 사내는 잠깐 우는 듯하다. 그 울음 끝에 비로소 말갛게 씻기는 거울의 얼룩들. 사내의 얼굴에 얼룩진 눈물자국은 비로소 거룩한 얼룩이다.
작가 소개
장석남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91년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9년 「마당에 배를 매다」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젖은 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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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철용
젊은 시절에 섬을 찾아 남해와 서해를 떠돌다가, 2000년 새천년맞이 기념 여행으로 가족들과 함께 떠난 남반구의 작은 섬나라 뉴질랜드에서 마주친 아름다운 자연과 친절한 사람들에 반해, 아예 그곳으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는 뉴질랜드 교민이다. 시작(詩作)과 독서와 생활이 한 치도 꿰맨 자리 없이 매끄럽게 연결되는 삶, 이것이 이민 이후 그가 몇 년째 붙들고 있는 삶의 모토이다. 죽기 전에 후세에까지 읽힐 시집, 소설집, 에세이집 각 한 권씩 펴내고 싶은 게 그의 가장 큰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