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에서 전재. (도종환, 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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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촛불과 담쟁이
이덕주 (송곡여고 교사)
우리 앞에 높은 벽, 그 벽을 넘어도 또 더 높은 벽이 있다는 것이 보일 때, 우리는 그만 절망에 빠져 포기하고 말죠. 그럴 때 작은 담쟁이 잎 하나하나가 모여 딱딱한 콘크리트 담을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린 다시 희망과 연대의 싹을 키웁니다. 그렇게 담쟁이는 제 가슴과 인생에 다가왔습니다.
우리 앞에 어둠이 있을 때 그 어둠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시간이 정말 아득하게 다가올 때, 더군다나 그 앞에 제도와 법으로 더 어두워져가는 것을 볼 때, 바로 눈앞에는 몽둥이와 방패 물대포가 있을 때 몸을 사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촛불 하나가 큰 물결 이루어서 어둠을 밝히고 장벽을 넘는 것을 보면서 나의 작은 촛불을 듭니다. 혹시라도 어둔 세상 밝게 비치지 못할지라도 나부터 내 주변부터 밝히기 시작합니다. 촛불을 들고 다시 담쟁이를 따라가는 발걸음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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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도종환
시인.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시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과,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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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덕주
송곡여고에서 17년간 도서관 전담 사서교사로 근무 중이며 지난해부터 전국에 650명밖에 안 되는 사서교사 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전국 모든 학교에 사서교사가 근무하는 날을 꿈꾼다. 아이들이 언제고 맘 편히 도서관에서 책을 읽게 되는 날은 그가 꿈꾸는 또 하나의 "그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