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 독서
기형도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은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한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입 속의 검은 잎』에서 전재 (기형도, 문학과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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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왜 문학을 읽지요?
송지현
『상실의 시대』의 나가사와 선배는 ‘죽은 지 30년이 넘은 작가의 책만이 신용도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피츠제럴드와 같이 훌륭한 작가는 언더파라나요? 피츠제럴드도 이제 죽은 지 30년이 넘었으니 그의 기준으로는 확실히 가치가 있는 사람일지도요.) 뭐, 그게 옳은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작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렇지 않은 작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위험이 적은 것은 확실합니다. 불쾌한 스캔들에 휩싸여 놀랠 일도 없고, 갑자기 엉망인 글을 써서 그의 글을 더 이상 사랑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거의 없지요. 죽은 작가의 일생은 새로운 발견이 있기 전까지 고정되어 있고, 그 고정된 삶이 주는 안정감이 저는 참 마음에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기형도 시인도 30년은 아니지만, 이제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고정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은 왜 문학을 읽으시나요? 아주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지금의 나를 다른 나로 탈출하기’ 위해서 책을 읽습니다. 작품의 인물에 몰입해서 가보지도 않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에서 헤매기도 하고, 죽을 것 같은 사랑도 해 보고, 무식한 제가 아주 철학적이고 똑똑한 사람이 되어 보기도 하죠. 특히 이미 죽은 작가가 쓴 자전적인 소설을 읽은 뒤에는 ‘참 별것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무상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죽은 작가의 글과 찌릿한 교감을 할 때는 더욱 그렇지요. 이렇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아서 숨 쉬는 것 같은 글을 쓴 그들은, 글로만 남아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무상함이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흔해빠진 독서」가 저에겐 그런 부류예요. 아마도 책은 적은 임대비로 숨을 수 있는 ‘잠깐의’ 도피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죽은 그들의 통찰은 아마 나보다 훨씬 깊고 인생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글로만 남았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하며, 틀림없이 책 속에서 존재하는 그들이 나를 완전히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또 서글퍼지기도 하고요. 그래도 저는 어느 봄의 마지막 휴일, 잠시 기형도 시인에게 저를 빌려주려고 합니다.
+ 이 시와 함께 장석주 시인의 「기형도 시집을 읽는 오후」라는 시도 함께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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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기형도
1960년 경기도 연평 출생.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법계열에 입학하여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을 앞둔 1984년에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여 정치부 · 문화부 · 편집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첫시집 『입 속은 검은 입』의 출간을 앞둔 1989년 3월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 첫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셈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20년이 되는 2009년 3월을 기준으로, 1989년 5월에 출간된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초판 24쇄, 재판 41쇄, 총 65쇄를 찍었으며 24만 부가 판매되었다. 1999년 3월에 그의 10주기를 기리며 출간된 『기형도 전집』은 초판 15쇄를 찍었으며 4만 7천 부가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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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송지현
좋아하는 게 많다. 요즘 끌리는 것은 재즈, 커피, 사진, 영화. 어리석음을 반성하면서 아직도 많이 배우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