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참깨를 털면서』에서 전재 (김준태, 창비,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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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지혜의 눈
임향례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간 발달 단계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 인생은 적어도 서른 살이 넘어야 성숙한 지혜의 눈이 떠지는 것 아닐까.
젊은 날 나는 이 시가 참 정겹고 좋았다.
어린 시절 할머니 동부 따러 가실 때 친구처럼 따라나서곤 했다가 할머니 앞치마에 수북히 모아지는 동부 꼬투리들 보며 얼른 집에 가고 싶어 했던 기억도 났다.
이 시를 알고 삼십 년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이 시가 참 좋다.
한 번을 내리쳐도 힘껏, 솨아솨아 쏟아지는 참깨 같은 것을 쫒아 활기차게 도회지를 누비는 스물 두 살 우리 아들 같은 젊은이들이 있어 이 세상은 씩씩해 보인다.
그러나 참깨도 참깨지만 그 여린 대궁을 걱정하시는 할머니, 균형을 잃지 않으며 삶을 통찰할 줄 아는, 인자한 지혜의 눈을 가진 그런 분들 계시기에 이 세상은 또 얼마나 마음 놓이고 든든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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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김준태
대학 졸업 후 13년간 고등학교 영어·독일어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11년간 <전남일보>·<광주매일> 편집국 데스크, PBC광주평화방송 시사자키, 5·18구속자 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한국문학평화포럼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창작학교 <금남로리케이온>을 마련, 저술활동을 하고 있으며, 조선대학교 문창과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1969년 월간 『시인』지로 등단하였다. 1995년 『문예중앙』 에 중편 「오르페우스는 죽지 않았다」를 선보이며 소설도 함께 쓰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참깨를 털면서』,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국밥과 희망』,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칼과 흙』, 『지평선에 서서』, 소설 「오르페우스는 죽지 않았다」 외 액자소설 88편, 통일시해설집 『백두산아 훨훨 날아라』, 세계문학기행집 『세계문학의 거장을 만나다』, 평전 『명노근 평전』 등이 있다. 역서로는 베트남전쟁소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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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향례
뒤늦게 漢學의 재미에 빠져 사는 조그만 시골 書堂 訓長. 16년간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