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장씨*가 먼길을 떠날 때
윤제림
부인 이씨가 물으니까,
샛별 떴나 보고 오겠소 했네.
마당에 누운 소 그냥 누워 있으라 하고,
막 무슨 짓을 하려던 누렁이들보곤
하던 짓 그냥 하라 했네.
비뚜름히 턱을 괴고 꺼벅꺼벅 조는 산
편안히 기울게 놔두고,
새벽일 나온 농부 하나가 괭이를 들고
보리밭 끝까지 따라나서는 걸
고만 들어가시게 들어가시게 했네.
해서, 농부가 혼잣말을 했다네.
“한울님 일에 단단히 착오가 나서
사람으로 다시 못 오면
소가 되어 올 사람!”
* 화가 장씨는 장욱진 화백
『사랑을 놓치다』에서 전재 (윤제림, 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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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미소를 머금으며 가다
조영수
그 녀석을 대면할 때면 마음이 아파온다. 그 녀석이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슬픔과 아픔을 항상 봐야 하는 그 녀석이 가엾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의 그 녀석과의 첫 대면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친하진 않았지만 한 반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오랜 병을 앓다가 떠났다. 친구들과 함께 병문안 간 그 날, 우리를 만난 직후 그 친구는 평소에 덮던 붉은 담요를 놔두고 떠났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놀기 바빴기에 친구와의 영원한 이별이 어떤 슬픔인지, 아픔인지. 그 이후로 기억에서 그 친구의 자취는 사라졌다. 분명 그랬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대학생일 때, 등교 중 내가 탄 버스가 승용차와 약간의 접촉사고를 냈다. 경미한 사고였다. 버스 운전기사가 잘못했지만, ‘힘들게 사실 텐데 사고처리를 어떻게 하실까’ 마음이 아파오는데, 갑자기 그 녀석과의 첫 대면이 떠올랐다. 분명 처음이었다. 잊으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라진 기억이, 상관없이 돌아왔다. 누구 때문인지 모르지만, 난 하늘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그 녀석과 내 자신이 고마웠다. 왜냐고? 내가 그 녀석을 감당할 수 있는 시간까지 기다려줬으니까. 나는 그 녀석을 통해서 고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 녀석은 언제나 부끄러울 정도로 솔직하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고인의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을 통해 고인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윤제림 시인의 시를 통해 화가 장욱진 씨의 삶을 생각해 봤다. 타인의 시선 속에 그려진 그의 삶은 자연에 순응하며 욕심부리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며 슬픔과 고통을 재치로 승화시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삶으로 내게 다가온다. 영원 속에 살아가는 사람, 그가 장욱진 화가이다. 그래서 나는 장욱진 화가처럼 먼 길을 떠날 때 조용히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잠시 소풍갔다가 돌아가는 것처럼, 신경림 시인의 시처럼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그렇게 떠나고 싶다. 그렇게 밖으로 마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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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윤제림
시인.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에 「봉구할아버지 커다란 손」이, 같은 해 <문예중앙>에 시 「뿌리 깊은 별들을 위하여」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 『미미의 집』 『황천반점』 『사랑을 놓치다』 등이 있으며, ‘21세기 전망’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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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조영수
측은지심이 가득하여 오랫동안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겁이 많아서 생각만 한다. 혼자서 ‘피식’ 잘 웃기에 사람들이 가끔 이상하게 본다. 친구와 책을 좋아하고, 하늘의 변화에 상관없이 항상 ‘오늘 날씨 좋다’라고 말한다. 하여! 난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