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1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節制와 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圓은 모를 세우고
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바이러스로 침투하는 봄』에서 전재 (오세영,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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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깨뜨리지 말고 둥글게 그대로
최진봉
아이들과 함께 양평으로 봄나물을 캐러 갔습니다. 인솔하는 사서 선생님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가씨라 부르는, 잠실 재개발단지 아파트 시세를 자랑스럽게 평수별로 줄줄이 꿰는 아이들을 데리고 봄나물을 캐러 갔습니다.
버스에서 한 시간 남짓 아무 말 없이 늘어져 시큰둥하게 오락을 하거나 잠만 자던 아이들을 저수지 둑에 내려놓으니 금세 살아나 참새처럼 재잘거립니다. 기분이 오를 대로 올라 망아지마냥 마구 뛰어다니며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풀을 뜯어 코앞에 갖다 대며 무슨 나물이냐고 묻습니다. 아이들입니다. 아무리 닳고 닳아 알깍쟁이 같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아이들입니다.
우리 도서관은 가장 치맛바람이 거세다는 잠실 한복판에 있습니다. 하루 이용자가 1,500명이 넘어 하루 종일 이용자로 북적거립니다. 그러나 어린이도서관이지만 이용자의 70% 이상은 엄마들입니다. 엄마들이 끊임없이 들어와 아이들이 읽을 책을 한 아름씩 빌려갑니다. 대출 기한이 1주일인 것을 감안하면 두세 권 읽기도 벅찰 텐데 저 책을 빌려다 놓고 얼마나 아이들을 닦달하며 읽힐는지…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아이들이라도 참 부담스러울 것 같고 정말 책이 지긋지긋할 것 같습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 스케줄이 꽉 차 있어 아이들은 도서관에 올 시간이 없습니다.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수업 시간이 조금이라도 초과되면 밖에서 기다리는 부모들의 성화가 대단합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학원수업에 늦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의 스케줄을 관리해주는 매니저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니?”
작년 겨울 헤이리마을에 가서 신나게 얼음을 지치고 오는 길에 아이들과 자신들의 생활을 이야기하다 나온 저의 질문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엄마가 자기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사랑해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참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아이들을 보며 마리오네트가 자꾸 생각나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들의 욕심이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며, 많은 경험을 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며, 깨달으며 스스로 자라야 몸과 마음이 건강합니다. 아이 시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치열한 공부가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부지런함 그리고 도덕적 가치관의 확립입니다. 부모들이 도와주어야 할 것은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하고,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다시 도전해 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6~70년대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자의든 타의든 자신들이 스스로 그렇게 컸기 때문에 건강한 사회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모들은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게 욕심을 내며 아이들을 간섭하며 사지로 내 몰고 있습니다. 욕심이건 실수건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이 그릇을 깹니다. 깨진 면은 당연히 칼이 됩니다. 아이들을 둥글둥글 건강하게 자라게 해야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도 슬기롭게 보내고 건강한 사회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 미래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욕심껏 책을 빌려가는 엄마들을 보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정말 1주일에 다 읽힐 거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자기 아이는 책을 좋아해 충분히 다 읽는다고 자랑스레 말합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직도 성인의 열 명중 세 명은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통계는 뭔지… 머지않아 독서운동이 필요 없는 세상이 오려나보다 하고 씁쓸히 혼자서 웃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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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오세영
1968년 박목월에 의해 시 「잠깨는 추상」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현재는 서울대 명예 교수이며, 한국시인협회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삿갓문학상, 공초문학상, 만해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첫 시집 『반란하는 빛』(1970) 이후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무명연시』, 『불타는 물』, 『시간의 뗏목』, 『봄은 전쟁처럼』, 『문열어라 하늘아』, 『사랑의 저 쪽』, 『적멸의 불빛』, 『임을 부르는 물소리 그 물소리』, 『바람의 그림자』(2009) 등 10여 편의 시집을 펴냈고, 시선집 『모순의 흙』,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학술서 『20세기 한국시 연구』, 『상상력과 논리』, 『우상의 눈물』, 『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 『문학과 그 이해』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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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최진봉
송파어린이도서관 관장. “겨우내 잠실벌의 편견과 이기 그리고 막무가내의 눈보라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봄은 왔지만 내 소신의 갑옷은 여기저기 찢기고 해어져 아직도 요원하게 느껴집니다. 어깨가 축 쳐진 아이들을 보며 다시 갑옷을 꿰매고 기워 전의를 가다듬어 보지만 자꾸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화를 연구하다 우연히 들어선 도서관 길을 현재 7년째 걸어가고 있습니다. 힘들지만 별일이 하도 많아 그 재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