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이병률
세상 끝에 편의점이 있다니
무엇을 팔까
장화를 팔까
얼음 가는 기계를 팔까
이 여름 냄새를 팔까
여즉 문을 닫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야겠으니
생각나는 한 사람 얼굴을 그려달라고 해야겠으니
도화지가 있느냐 물어야겠다
사람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하니
주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얼굴 그림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그 그림이 나의 얼굴이거나
혹은 한 사람의 옆얼굴이어도
얼은 영혼이란 뜻이라니
굴이라는 말이 길이라는 뜻이라니
세상 모든 나머지를 파는 편의점에 가서
조금만 틈을 맞추고 와야겠다
세상 끝을 마주하다가 낯을 씻고
아주 조금만 인사를 하고 와야겠다
『찬란』에서 전재 (이병률, 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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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그곳엔 도마뱀이 있었다
손소영
세상의 끝으로 가는 버스를 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끝은 오직 바람과 모래만이 살아 있는 텅 빈 사막 같은 곳이길 바랐다. 무언가 남겨두고 떠나는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창밖의 이국적인 풍경도 감동적이지 않았다. 나 말고는 승객이 없는 심드렁한 버스는 의자와 의자 사이에 나를 가로막고 무심하게 덜커덩거리며 달려갔다.
“지금 내리실 곳은 슈퍼 앞, 슈퍼 앞입니다.”
응? 하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버스를 뛰쳐나왔다. 내리고 보니 문득 나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는데 하며 늦은 후회를 하고 있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군. 그나저나 정류장 이름이 ‘슈퍼 앞’이 뭐람. 세상 끝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정거장,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이름 붙여 사람들을 내리게 만들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예상과 달리 슈퍼 안은 날 좀 사줘 하는 절박한 목소리가 아닌 날 그만 내버려둬 식의 무심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그것들은 반짝한 새 상품이 아닌 손때가 묻어 반짝거리는 낡은 물건들이었다. 마치 오래된 작은 박물관에 들어온 기분이다. 비뚤하게 깎은 몽당연필, 색이 누렇게 바랜 두툼한 일기장, 밑창이 닳고 닳은 작은 운동화, 누군가에게 쓰다 구겨버린 연애편지, 반짝이는 액자 속의 웃고 있는 두 사람. 그 슈퍼는 세상의 마지막 미련들이 버려져 있는 곳이었다. 쉽게 사고 버리는 일회용 시대 속에서 이것 하나만큼은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결국 그 끝에서 버려지는 공간이었다. 손때가 고이 묻은 오래된 물건들 속에서 찡하고 아련한 마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속에서 나는 꼬리가 잘린 도마뱀이 들어 있는 유리병을 발견했다. 꼬리가 반쯤 길어 나온 도마뱀은 네 발을 유리병에 딱 붙이고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도마뱀은 붙잡힌 꼬리가 잘려도 계속 자라나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동물이라는데, 잘린 꼬리는 어디 가고 자유롭다는 한 마리의 작은 동물만 여기 갇혀 있었다. 지금까지 이것이 세상에 남겼을 수많은 꼬리들을 생각한다. 해변에서 꽃게에게, 나뭇가지 위 사마귀에게, 또는 시궁창 회색 쥐들에게서 잘려진 꼬리들을. 또는 도망가기 위해 스스로 버리고 떠난 꼬리들. 그렇게 요리조리 도망쳐온 놈이 여기 잡혀 있다. 자꾸 꼬리만 자르고 도망가는 비겁함이 벌을 받는 것일까. 잘리고 또 잘려도 자꾸만 살아나는 꼬리를 가진 놈이 주인은 얄미웠을까. 부질없는 희망만 안겨주는 이 애완동물을 남겨두고 주인은 세상 끝으로 떠나버렸나. 박제가 된 자유로움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의 꼬리가 점점 자라나고 있는 모습도.
세상의 끝을 등 뒤로 한 채, 덜커덩거리며 찾아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간다. 그리고 손에 들린 유리병 뚜껑을 열어 도마뱀을 살며시 풀어주었다. 그것은 유리 밖 공기를 느끼지 못한 채 잠시 가만히 있다가 금세 발밑의 흙을 느끼고 사뿐 거리며 가버린다. 지켜보던 나도 성급히 포기하고 내달려온 길을 이제는 힘이 담긴 걸음으로 느릿하게 내디뎠다. 뒤통수가 슬금슬금 가려우며 돌아보고 싶어질 때면, 어깨 위에 새긴 작은 도마뱀을 바라볼 것이다. 꼬리가 반만 한 도마뱀. 내가 왔던 길을 모두 되돌아갔을 땐 이 도마뱀은 자기의 꼬리를 모두 회복해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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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이병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그날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등과 여행산문집 『끌림』(2005) 등이 있으며,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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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손소영
Never fear, Only love.
두려움에는 어떤 것도 시작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힘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한없이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로 가득채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나의 삶과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며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을 지키고, 어른다움을 경계하며 맑고 씩씩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