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과 친하고 싶다
『마종기 시전집』에서 전재 (마종기, 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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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바다를 떠난 파도
조미정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유약했던 나를, 엄마처럼 돌봐주었던 친구가 있었다. 고열로 시름시름 앓던 날 내 머리 위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어주기도 했고, 매일 준비물을 까먹는 내게 전날 밤 전화로 ‘서예도구 챙기는 것 잊지 마’ 라고 알려주기도 했었다. 집에 놀러 가면 앞치마를 두른 지 이십분도 되지 않아 새빨간 떡볶이를 뚝딱 만들어주었고, 내가 서럽게 울던 날에는 꼭 안아주기도 했다. 누구보다 큰 눈망울을 갖고 있던 그 아이, 그는 내게 바다처럼 넓고 푸른 존재였다.
그가 내게 바다 같은 존재였다면, 나는 그 바다 위의 파도였다. 햇빛이 좋아서 파도가 경쾌한 춤을 추는 날에도, 비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심술을 부리는 날에도, 바다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바다’였다. 그리고 바다와 파도는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 좋아 함께 넘실거렸다. 굳이 물길을 트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그 바다도 세월 따라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안녕. 붙잡을 도리 없이, 서럽게 흐르던 연약한 물줄기가 과연 바닷물인지 눈물인지를 구분할 줄 알게 되었을 때, 세상은 어차피 ‘혼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그가 영원히 내 곁에 남아 다음 날의 준비물을 챙겨주고,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아플 때 슬플 때 옆에서 눈물을 닦아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살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 좋은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오래오래 만나는 것은 왜 이토록 어려운 것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어쩌면 힘들 때마다 그 '좋은 사람'에게 기대려고만 하는 못된 버릇을 버리고, 혼자서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무언의 화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좋은 사람이 영원히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는 결국, 떠나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 속에 그가 여전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열한 살짜리 꼬마 아이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듯이.
그러나 그러한 배움으로부터 얻는 대가는 언제나 크다. 요즘 부쩍 그 친구의 빈자리가 아프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와 같은 순수한 벗을 만드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가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는 아무런 허물없이 귀여운 편지를 주고받으며, 맛있는 과자를 나눠 먹으며, 함께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순수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다. 그때에는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만나 친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없이도 그런 이들과 친구가 되었었는데, 이제는 그런 이들을 애타게 찾아다녀야 하는 때가 와버린 것 같아, 조금, 슬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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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마종기
시인이자 의사. 도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닷가에 앉아 혼자 동시를 쓰기 시작했던 소년은 중학생 시절부터 일약 ‘학원’ 문단의 스타가 되어 친구들의 연애편지 대필을 도맡는 등 타고난 시인의 재능을 맘껏 선보인다. 자연스럽게 문인의 길로 접어드는 듯 했으나 어려운 고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주위의 권유로 의대에 진학한다. 1959년 본과 일학년때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면서 ‘의사시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 병원에서 수련의 시절을 거쳐 미국 진단방사선과 전문의가 되었고, 오하이오 의과대학 방사선과 및 소아과 교수 시절에는 그해 최고 교수에게 수여하는 ‘황금사과상’을 수상했다. 이후 톨레도 아동병원 방사선과 과장, 부원장을 역임했고 2002년 의사생활을 은퇴할 때까지 ‘실력이 뛰어나고 인간미 넘치는 의사’로서 명성을 쌓았다. 『조용한 개선』을 시작으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그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우리는 서로를 부르는 것일까』등의 시집을 펴냈다. 2009년에는 시 「파타고니아의 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매년 봄과 가을 고국을 방문해 연세대학교의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머지않아 ‘고국의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맞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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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조미정
별 걸 다 찾는 사람. 모두가 입버릇처럼 말한다. “인생, 별 거 없다”고. 그렇지만 나는 분명 인생엔 “별 게 있다”고 믿는다. 찾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엄청난 '별 것'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헤어지고 만나고 하는 일들도 결국, 그 ‘별 것’ 때문일 것.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그 ‘별 것’을 찾고 싶은 사람, 그렇게 별 걸 다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