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시집』에서 전재 (윤동주, 범우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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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부끄러워할 줄 아는, 부끄럽지 않은 생
김지원
시대마다 ‘미덕’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상과 행위들이 있다. 해저생활이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자동차가 하늘을 나는 모습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2010년, 이 비현실적인 숫자가 말하는 미덕은 대체 무엇일까.
이 시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나의 느낌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각종 화려한 펜을 이용해, 역사적 배경이며 화자의 심정, 각 시어의 의미 따위를 누구보다 꼼꼼히 적었을 것이다. 그 덕분인지 나는 대학입시를 무난히 지날 수 있었고, 대학생이라는 제법 그럴싸한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서점에 가서 휴대하기 좋은 ‘가벼운 책’을 찾다가, 이 시와 재회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을 어느 시점에 만났느냐가 중요하듯, 글 또한 마찬가지인 듯 하다.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문장에 나는 고개를 바로 들 수가 없었다. 그런 순간을 맞이한 것이 새삼스럽고 또 당혹스러웠다. 그가 남긴 고뇌의 흔적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어루만지며, 시인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윤동주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내가 쓰는 한 단어, 한 문장은 진통 끝에 태어난 것인가.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혹은 말해야 하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는 걸까. 글을 써내려 가는 것이 마치 아무 흔적 없는 하얀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 마냥 조심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돌아봤을 때, 흐트러짐 없는 그런 곧은 걸음을 걷고 싶은 것 또한 분명하다.
서점에 있는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이 ‘부끄러움’을 미덕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언제 어디서나 자신감과 당당함을 유지할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나는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지금 우리는 도리어 타인에게 화살을 향함으로, 다른 미사여구를 늘어놓음으로, 합리화의 감옥에 들어감으로, 그것을 감추고 있기에만 급급한 게 아닐까. 자신의 진짜 부끄러움과 마주했을 때, 시대의 미덕이 아닌 인간의 미덕을 담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누구도 모를 지라도,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스스로에게 만큼은 아무 감출 것 없는 어른이 되고 싶다. 부끄러움을 아는,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생을 살 수 있는 사람. 나도 이렇게 스스로에게 최초의 악수를 청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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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윤동주, (1917.12.30 ~ 1945.2.16)
1917년 12월30일 만주 간도의 화용현에서 출생.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윤동주 는 당시 「소년」지에 시 「산울림」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연희전문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립교대학) 영문과를 거쳐 도지샤대학(동지사대학) 영문과에 편입한다. 영문과 재학당시인 43년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에 연루돼 일경에게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45년 2월 28세란 젊은 나이로 옥사한다. 대표작은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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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지원
‘자기소개’라는 네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저릿한 대학 졸업생 및 취업 준비생이다. 나를 소개한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나는 아직까지 그 정의를 내리는 것이 영 쉽지 않다. 몇 개의 단어로 내가 규정된다는 사실이 못내 불편한 나. 아마, 오해받기 싫은 마음, 변명하기는 더 싫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더 많이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