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조(無色調)
토머스 하디
그 겨울날 우리는 연못가에 서 있었고,
신께 꾸지람을 들은 듯 태양은 창백했고,
얼어 죽은 땅 위엔 나뭇잎들이 몇 개 흩어져 있었다.
― 그 잎들은 물푸레나무에서 떨어진 것들이었고, 잿빛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은
몇 년 전 따분한 수수께끼 위를 두리번거렸던 예의 그 눈과 같았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으로 누가 더 많이 잃었는지에 대해
우리 둘 사이에 약간의 말이 오갔다.
네 입가의 미소는
간신히 죽을힘만 남은 아주 무기력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불길한 새가 날개 치듯
거기에 쓰디쓴 웃음이 스쳤다.
그때 이후로, 사랑은 속이고 잘못된 일들로 괴롭힌다는
날카로운 교훈은 내게
너의 표정과, 신의 저주를 받은 태양과, 나무와,
잿빛 잎이 쌓인 연못가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번역: 우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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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두말없는 이별
조경진
*
우리는 이별하려고 마주 앉았다.
낯선 눈빛과 몸짓, 너와 나 사이에 오고가는 말들이 서먹하다.
너는 더 이상 소진할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보인다.
표정 없는 얼굴과 건조한 목소리가 성난 눈빛과 비난보다도 잔인하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은 모두 빛바랜 회색조이다.
낡은 모자는 너의 얼굴을 덮었고, 푹 꺼진 검은 소파 안으로 네가 가라앉고 있다.
연둣빛의 싱그러운 설렘도
푸르른 청량한 웃음도
붉게 타올랐던 열정도
이제는 낡고 시들어 과거의 찬란한 빛을 잃어버렸다.
복잡한 감정들의 엉킴으로 먹먹해진 가슴,
마지막 인사를 뱉기 전의 망설임.
널 보내는 지금 나는 무슨 말을 할까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병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라고 재촉한다.
*
헤어지는 순간의 감정을 어떻게 온전히 말로 옮길 수 있을까. 하디는 이별하는 순간의 아스라한 감정과 사랑에 대한 비관론적 색채를 연인의 싸늘한 미소, 창백한 태양, 잿빛 낙엽, 빠르게 스치는 새의 이미지와 장면 묘사를 통해 전달한다. 시간이 흘러 문득 이별의 순간을 회상할 때면 그때의 시리고 아픈 감정은 사그라지고 앙금으로만 남게 되지만, 그 순간을 둘러싼 공간과 사물은 여전히 생생한 파노라마로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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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토머스 하디 (Thomas Hardy, 1840-1928)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생애는 빅토리아 조에서 현대에 이르는 과도기에 걸쳐있다. 그는 당대의 여러 진보적 사상들에 동조하며 19세기 말의 영국 사회의 인습과, 편협한 종교인의 태도를 공격하고, 남녀의 사랑을 정적 면에서 대담히 폭로하였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대신 존 힉스(John Hicks)의 견습공으로서 건축일을 배우며 그리스 고전과 영문학 및 불문학 철학, 신학을 탐독하여 방대한 양의 지식을 쌓았다. 하디는 『귀향』(The Return of the Native, 1878),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1891), 『무명의 주드』(Jude the Obscure, 1895)을 써내며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그는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틈틈이 시를 썼으며, 늘 소설보다도 시가 자신의 원래 영역임을 주장했다. 시집으로 『웨섹스 시선』(Wessex Poems and Other Verse, 1898), 『시간의 웃음거리』(Time's Laughingstocks and Other Verse, 1909), 『겨울의 말들』(Winter Words, 192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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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조경진
학부 때 영문학을 공부했지만, 오랜 관심은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여 감정과 의지를 나타내는 예술, 무용이다. 직접 무용을 하기도 하지만, 주변인을 꾀어 같이 공연 보러 다니기를 즐긴다. 무용과 문학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 대학원에 진학했고, 드라마(희곡)를 소재로 논문을 쓸 계획이다. 이상적, 초월적 비전과 희망을 노래하는 낭만시인들의 시 보다는 다소 어둡고 우울한 색채를 가진 하디, T. S. 엘리엇과 같은 현대시인들의 시를 좋아한다. 내가 가야 할 길, 누군가와 나누고픈 사랑에 대해 꿈꾸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