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신현림
그때 책이 가득 든 가방이 있었고
낙서판 같은 탁자마다 술이 넘쳐 흘렀네
괜찮은 사내며 계집이며
가까워질수록 잃을까 불안한 심정이며
시대가 혼란스럽고 취직이 힘들수록
쟁기처럼 단단해져야 할 마음이며
「아침이슬」과 미칠 듯이 파고드는 러시아 민요
「검은 눈동자」를 들으며 몸 저리게 서러웠네
세월의 징검돌을 밟고
그들은 내 곁을 스쳐갔네
다시 칠 년 다시
소독약보다 지독한 시간이여
청춘의 횃불이 꺼져간다
괴로워야 할 치욕도 상처의 저수지도 잊어가고
우리의 숙명인 열정도 식어간다
근근이 살아가는 고달픔이란,
너는 허기져 삽살개를 찹쌀개로 헛발음하고
시계 사준다는 말이 나는 시체 사준다는 말로 들리고
혼자가 싫어 드라큐라라도 함께 있고픈 주말
사나운 날씨를 못 견뎌 헤매는 오후 네시
울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세기말 블루스』에서 전재 (신현림, 창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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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우울한 청춘의 보약같은 시
이원배
1996년인지 97년인지 정확한 해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름인 것만은 기억에 남는다. 더운 여름 동아리방에 들르니 책상에 누군가 갖다 놓은 신현림의 『세기말 블루스』가 있었다. 우연히 본 시집을 자리에 앉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때 이 시를 만났다. 한 동안 나를 위로했던 이 시를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기도 했다.
당시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던 나는 한참 ‘문학청년’을 꿈꾸며 ‘문청’의 ‘폼’을 잡고 다녔었다. 그러나 깊은 성찰이나 습작이 부족하던 나는 늘 무언가 결핍된 느낌을 갖고 있었다. 친구들과 열심히 놀고 떠들어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늘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날이 ‘사납게’ 좋은 날 혼자 있다는 게 답답했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그러지 않으면 내 청춘이 메말라 갈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지냈다. 잘 되지 않는 연애 때문에 고민이었고 공부하지 않아 고민이었고 글을 쓰는 게 고민이었고 취업은 어떻게 하나, 막연한 미래가 고민이었다. ‘빛나는’ 청춘의 시기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고민과 불안이 늘 한구석에 존재 했던 것 같다.
이런 시기에 만난 신현림의 이 시는 내 고민 많고 왠지 허전해 보이는 삶에 많은 위로를 주었다. 몇 번씩 읽으면서 다들 외로움에 쓸쓸해하고 흘러가는 청춘을 붙잡는 ‘나약한’ 삶을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시를 내 삶을 위로하는 시로 읽었다.
이 시는 어려운 수사나 복잡한 기법을 쓰지 않고 내용을 시어 뒤에 숨겨 놓지 않았다. 자신에게 속삭이듯이 혹은 앞에 마주 앉은 사람에게 나직이 고백하듯이 솔직하다. 외로우면 외롭다고 그리우면 그립다고 쓴다. 에둘러 돌려서 말하지 않는다. 독신으로 거대한 도시 한 구석에서 팍팍히 살아가야 하는 시인의 자아가 강하게 투영 된 시. 이 솔직하고 직설적인 표현의 시는 자주 쓸쓸해했던 나에게, ‘나에게 속삭이는 위로의 시’가 되었다.
“낙서판 같은 탁자”에서 자주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고 고민을 얘기해도 무언가 공허했고 이대로 “청춘의 횃불이 꺼져”갈까 두렵기도 했다. <아침이슬>을 부르고 ‘투쟁가’를 열심히 불렀다. 그러나 나는 투사도 운동권 학생도 아니었다. 그러나 또 노래패 새벽이 부른 ‘스텐카라친’을 열심히 듣고 혁명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었다. 정말 벚꽃이 흐드러지는 햇빛 부서지는 날 집에 혼자 있는 게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같아 견디기 힘든 날은 누구와도 같이 있고 싶어 하루 종일 울리지 않은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날 “울지 않으려고 웃으면서/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라는 시구는 쓴 한 그릇의 보약이 되기도 했다.
시를 쓰고 읽는 데에는 여러 가지 목적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여러 가지 이유 중에 나는 시가 주는 삶에의 위로를 큰 부분으로 생각한다. 신현림의 이 시는 고민 많던 시절의 나에게 “뜻 깊은 인생”이라고 속삭여 주며 삶을 위로해 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시를 읽고 “울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살아가길 꿈꾸고 “쟁기처럼 단단해”질 “마음”을 갖길 원했다. 그리고 이 시를 읽는 모든 사람들도 “웃으면서” 살아가길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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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신현림
1990년 <현대시학>에 「초록말을 타고 문득」 외 9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여 1994년 첫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를 출간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아주대에서 텍스트와 이미지, 시 창작 강의를 했으며, 2004년, 2006년 두 차례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시인과 포토그래퍼의 경계를 허무는 전방위 작가로서 왕성히 활동 중이다. 상상의 들녘 저 멀리까지 날아가게 하는 만화, 영화, 재즈, 클래식, 팝송 등을 가리지 않고 누리며 또한 여행을 즐긴다. 젠틀하고 착하고 솔직 소탈한 사람들, 생태 환경을 생각하는 이들을 사랑한다. 시집 『세기말 블루스』, 『해질녁에 아픈 사람』, 『침대를 타고 달렸어』, 사진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창』, 『희망의 누드』,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미술 에세이 『신현림의 너무 매혹적인 현대 미술』, 박물관 기행 산문집 『시간창고로 가는 길』, 자전적적 에세이 『싱글맘 스토리』, 동시집 『초코파이 자전거』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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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원배
문학이 좋아 문학을 계속 꿈꾸는 문학청년. 문학청년이란 말에 담긴 치기와 그 열정도 좋아한다. 시가 노래가 되고 소설이 즐거움이 되고 수필이 휴식이 되는 ‘좋은 세상’을 꿈꾼다. 신현림의 위로 같은 시가 좋고 김소진의 아련함 가득한 소설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