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문태준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가재미』에서 전재 (문태준, 문학과지성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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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낙엽처럼 하나 둘 바닥으로 가슴으로
오세일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수능시험을 마쳤을 때 우리 집은 서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느 집이나 힘들지 않은 집이 없던 ‘IMF 시대’, 그때 보증문제로 시작하게 된 도서 총판업, 그리고 화재, 그렇게 많은 일을 거쳐 서점을 하게 되었고 난 수능 후 서점에서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 갔다 오면 서점 일을 돕기도 했고 스무 살이었으니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기도 했다. 군을 제대하고 2006년, 시내의 좋은 위치에 서점이 있긴 하였으나 이미 서점은 유지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서점을 정리하다 책을 몇 권 챙겨 왔는데 가져온 책 중 하나가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이다.
서점을 한 건 옛일이나 집이 서점을 했으니 책을 많이 봤을 것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그러나 집이 서점이면 책 내용이 뭔지 파악하려고 머리말이나 표사 정도만 읽고 손님에게 권하기 일쑤다. 어쩌다가 베스트셀러를 읽기도 하지만 책은 책 자체가 아닌 상품 혹은 일거리로 보일 뿐이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 책 좀 많이 읽을 걸 하는 후회가 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단지 서점에 갔을 때 흐트러진 책이나 제자리에 있지 않은 책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서 손길이 닿는 곳이나마 정리하는 버릇이 남아있을 뿐이다.
나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돌아보면 많은 기회가 있거나 풍족했거나 행복했던 시간이 있다. 누구나가 말하는 ‘왕년’ 그땐 그랬는데 혹은 안 그랬는데 하는 ‘그땐 그랬지’. 이제는 옛일이 되어버린 일들 지나가 버린 시간들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지나간 날들을 모두 뒤로 던지지 못한다. 크든 작든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자극하는 무언가에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반응한다. 『가재미』를 읽으면서 참 잔잔한 시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시골에서나 맛볼 수 있는 담백한 맛 자극적이지 않은 맛을 지닌 시집이었다. 그래서 술술 읽어내려 가서는 마음에 확 와 닿는 시가 없을 수밖에 없는 시집이었는데 그중 「바닥」의 그리움의 느낌은 쉽게 내게 다가왔다.
그런 때가 있다. 지나간 추억들이 잘 떠오르고 아련해지는 시간은 모두에게 다르겠지만 보통 가을이 그 대표적인 시간은 아닐까. 날씨는 쌀쌀해지고 색은 바래고 낙엽이 지는 계절, 추억을 더듬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계절은 없을 것이다. 옛일이 되어버렸지만 분명히 있었던 일, 아직 남아 있는 흔적들, 그런 느낌들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하나 둘 바닥으로 가슴으로 흘러내린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 만남이 깊어지면 의견이 충돌하고 싸움을 하는 일들이 생긴다. 스쳐 지나갔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 사랑하는 사람들도 싸움을 한다. 소리를 낸다. 그건 서로가 서로를 받아주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비록 옛일이 된다 하더라도 마치 버릇처럼 우리에게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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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문태준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그늘의 발달』, 『가재미』, 산문집 『느림보 마음』 등이 있다. ‘시힘’ 동인이며,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가재미』는 『맨발』 이후 2년만에 선보이는 문태준 시집으로 미당문학상 수상작 「누가 울고 간다」와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그맘때에는」 등 총 67편의 시가 실려 있다. 표제작 「가재미」는 2005년 시인과 평론가들이 뽑은 ‘문예지에 실린 가장 좋은 시’로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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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오세일
글과 문학의 세계 보다는 복잡한 수식과 씨름을 하거나 사차원 평면에서 물체를 상상하거나 삼차원 평면에서 점과 선으로 도형을 그리거나 01010101000과 함께하는 공학도다. 쉽게 얘기해 ‘매트릭스’에 살고 있는 셈이다. 더 어려울라나?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매트릭스’를 떠나 진짜 세상으로 나간다. 올해는 참 정신없을 예정이다. ‘네오’처럼 세상을 바꾸는 공학도가 되길 꿈꾼다. 아래는 새해 겨울바다에서의 깨달음 혹은 다짐.
바다를 보고 왔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 바다.
사진을 찍겠다고 까부는데 파도가 와서 내 발을 덮친다.
아… 맙소사.
바다를 보기 전에 내 발밑부터 살펴볼 것을.
2010년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서해. 바다에서 답을 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