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1
김경미
내 집의 낡은 뻐꾸기 시계는 딱 맞춰 울지 못한다
밤 한 시에 갓난애처럼 열 번 넘게 울어제끼거나
아홉 시에 달랑 한번만 탁, 침뱉고 들어가거나
다음날 정오엔 절마당 동백꽃 우물에 빠져버린 채 나오지도 않는데
나와는 구두짝처럼 첫눈에 서로를 알아 봤다
안심할 때만 골라서 뒷머리에 돌을 맞았으며
시작하려 하자 떠났으며
애절했으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찬밥을 먹거나
한낮의 버스안에서 쇼핑백 터지듯 울음이 터졌거나,
그렇게 번번히 땅에 떨어지던 점괘의 위신들
세시 약속을 전날 한시에 나가 앉아 치명적으로 버림받거나
봄꽃 날리던 날의 맹세들일수록
모든 불길과 불운이 한꺼번에 집전되는 단풍가을 저녁에야
기억해내거나
낡은 새와 나 이외의 시간은 도통 맞질 않는 것이다.
『설운 서른』에서 전재 (50인의 시모음집, 버티고,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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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삶의 시간은 때맞춰 울지 않는다
정태영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란다. 헌책방 주인인 난 헌책을 내놓기만 하면 반드시 팔리고야만다. 나는 팔릴 수밖에 없는 좋은 책만 골라 내놓기 때문이다.
그 좋은 책들을 구하는데 누구 집의 낡은 뻐꾸기 시계 마냥 알람이 ‘딱!딱!’ 때맞추어 울진 않는다. 다만 우리는 로보트 친구 ‘짱가’ 주제가마냥 《어디선가~, 누군가가~ 책이 나왔다》라고 누군가 울어대기만 하면 바로 달려간다.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였는지 기억할 순 없지만 몇 년에 한 번씩은 집에 넘쳐나는 책 정리를 해야 한다며 날 부르시는 분이 계신다. 다 읽어서 이젠 필요 없게 되었다며 꺼내놓은 책들을 바라보니, 일상의 평범한 동네 아줌마는 결코 아닐 거라고 첫눈에 짐작했다.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상대가 다 읽은 책들만 바라보고도 그 사람이 지닌 사고의 정도와 성격까지 조심하게 짐작할 수 있는 건… 이건 분명 싼티나는 나의 초능력이리라.
그렇게 방출되어 내게 맡겨진 책들을 훑어보면 그녀가 행한 독서의 동선이 그려진다. 그 그림은 흡사 지평선 위의 높이가 서로 다른 산맥들이 얽히고 또 고르게 퍼져 내 앞에 우뚝 서있는 모양이다. 시, 소설 등 문학은 기본이고 음악, 미술, 역사, 철학, 종교까지 어느 선(線)의 구분 없이 자유롭게 넘나들었음을 엿볼 수 있으니.
그녀가 읽고 그어갔던 밑줄을 뒤따라 밟아보기도 하고, 책장(page) 한 귀퉁이 ‘접혔던 곳’을 다시 펴가며 ‘접었던 의미’를 추측하곤 했다. 남겨진 또 다른 흔적들을 통해. 그러다 글쎄! 그녀는 언젠가 내가 평소 즐겨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오프닝 멘트로 소개된 적이 있는, 내게 감동을 안겨다 준 그 시를 썼던 장본인이었음을 반갑게 알게 되었으니.
그 후로부터 시인은 책방주인을 불러 댔고 책방주인은 또 시인을 아는 척했다. 서로 잊을만하면 한 번쯤, 마치 읽다말고 꽂아놓은 책갈피처럼 시인의 책 정리엔 어김없이 불려가게 되었으니 이런 서로의 작은 부대낌 속에 시인은 자신의 책을 내주었고 난 책을 통해 그녀의 시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시인의 집 근처에 다른 헌책방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헌책방으로 되돌아오는 길에서야 깨달았다. 기억해내지 못해서이겠지만 그곳을 멀리하고 굳이 멀리 있는 나에게만 연락하는 까닭을 물은 적은 없다.
어찌 생각해보면 삶의 시간은 맞춰진 게 아니라 서로에게 향하여 조금씩 ‘맞춰 가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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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경미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詩 『비망록』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2005년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쉬잇, 나의 세컨드는』, 『고통을 달래는 순서』, 사진 에세이집 『바다 내게로 오다』, 『막내』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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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태영
시계 마니아들은 단 1초의 차이도 나지 않는 디지털 시계 대신 매번 태엽을 감아주어야 하는 기계식 시계를 찾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살아 움직이지 못하니까.”
어릴 적부터 헌책방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덕에 책을 사지 않고도 맘껏 볼 수 있는 무한한 특혜(!)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여느 아이들처럼 책을 팔아 군것질 할 비자금을 만들 수 없음에 그만 불만을 품고 책과는 서로 등을 지고 성장했다.
20대의 끝 무렵, 어린 시절 놀이터로 여겼던 헌책방을 추억하려 하자마자 그곳은 그만 일터가 되어버렸다. 재벌의 편법 부자상속과는 달리 극구 반대하시던 아버지를 설득해 누구도 물려받길 꺼려하는 낡은 책들과 책 속에 묻혀있는 사연을 건네받는 중이다.
돌봐주어야만 다시 살아 움직일 헌책에 덮인 책 먼지를 두둑한 보너스로 여기며, 아버지와 함께 서로를 의지한 채 서울 홍제동 <헌책방 대양서점>(기억속의 서가ㅣhttp://cafe.naver.com/daeyangbook)을 꾸려가고 있다.
늘 시간의 길이가 짧게 느껴지는 것에 맞서 낡은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숨 가쁘게 돌아가던 시계바늘의 속도도 잠시 늦출 수 있다는 어리석은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