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약품상자
진은영
목잠김에 관하여
노래가 나오지 않아. 지난번이 너의 마지막 詩였을지도 몰라.
“마음대로
괜찮아
견딜 수 있어.
보라, 내가 얼마나 담담한지!
죽은 자의
맥박처럼 고요하다”
마야코프스키!
너처럼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던 사람도
죽은 자의 맥박처럼 고요하게 잠길 때가 있다니…
권태감에 시달린다면
“스무 살 이후로 나는 늘 지겨웠다” 라고 바이런은 말했다.
그러니 나는 이 시인보다는 양호한 편이로군.
난 서른 살 이후로 해마다 지겨웠으니.
(하긴 열 살 이후로는 자주 죽고 싶었지…)
그 여름의 낙법(落法)
모든 정치적 선언들에 대한 서늘한 반응. 우주의 가장 뜨거운 별에서 모여든 예술가들이 선언을 한다고 상상해봐. 그런다고 이곳이 바뀌겠니? 가을의 붉은 잎처럼 아무리 강렬한 슬로건도 절정의 가지에서 얼어가는 바닥으로 떨어지기 마련이지. 더구나 너희는 변덕스럽고 모든 일에 쉽사리 권태를 느끼는 종족들인 걸. 한마디로 여름 내내 쓸모없는 일을 한 셈이지.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가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에서 말하길, "어떤 것들은 아름다운 '쓸모없는 노력들'이고, 또 어떤 것들은 우울한 '쓸모없는 노력들'이다. 물론 이렇게 아름답거나 추하다고 분류하는 데 우리가 항상 의견일치를 보는 것은 아니다." "쓸모없는 노력들이 계속 반복되어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게다가 너는 쓸모없는 일을 좋아하잖아. 특별히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름답게 쓸모없는 일일 경우에는.
참 아름다운 일회용 밴드
“쓸쓸한 정신병자는 인생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자폐증을 앓고 있고 그가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꽃밭하고만 소통이 가능하다. 그의 신하들은 그를 존경하며 형형색색의 꽃잎으로 그를 치장한다. 그들의 환한 꽃내음은 화려한 향기의 대포알을 쏘아 올린다. 쓸쓸한 정신병자는 천국에 있지만 그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 언제쯤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인생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는 순조로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달은 이미 그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꽃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사라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말도 못하고, 노래도 못 부르고, 웃지도 못한 채 기다려야 할까. 이미 그는 머릿속의 달력에서 겨울과 가을을 없앴다.” ―로베르 콩바스(Robert Combas), 「꽃밭 속의 자폐증 환자」
어디서 얻은 훈장인지 알 수조차 없는 온갖 생채기들이 느껴질 때.
그림 속의 꽃밭으로 가… 말없이 보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높이에서 살인이 일어날 때, 누군가 제 영혼처럼 돈을 사랑하고 그리하여 또 다른 누군가를 한 장소에서 쫓아내고 그 누군가는 안 나가려고 할 때, 그러다가 건물 옥상보다도 높은 곳에 올라가서 불타죽기도 할 때, 그런데 아무것도 함께 확인해 줄 수가 없을 때, 그리고 이제는 그런 이야기들이 슬슬 피로해진다는 생각에 문득 자괴감이 들 때, 그러니까 니체의 말처럼 “전율에도 피곤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여 있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는 느낌이 들 때,
그런데 도처에 편만한 이 모든 염증에도 불구하고 얼마 뒤에 세상 사람들은 더 끔찍한 정치가를 뽑을 거라고 당신이 나에게 호언장담할 때… 스피노자의 구절을 계속 중얼거린다. “나는 인간 행동을 조롱하지도 한탄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오히려 인식하기 위해 진력해왔다.”
끝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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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진은영
2000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 『우리는 매일매일』(2008)이 있다. 각별히 좋아하는 철학자들에 대해 책을 쓰기도 했다.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2004), 『니체의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2007)와 같은 책들이다. 최근에는 청소년들과 니체의 철학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어져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웃음과 망치와 열정의 책』(2009)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