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들의 사랑
강정
언제나 속이 쓰리다
나의 적은 은근히 적다
그래서 은폐 엄폐에 유리하고
까딱하면 모든 타인이 내 적이 될 수도 있다
라면을 끊고
커피도 끊고
술담배도 끊으려하지만
생을 끊는 것만은 적들이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프림 세 스푼
커피 두 스푼
설탕 두 스푼 반 타먹고
담배도 연거푸 두 대 피워 문다
속이 쓰리다
속이 튼튼하면 적들이 날 알은척도 안 한다
오토바이 타다가 죽은 옛 친구 생각이 난다
그때부터 속도엔 트라우마가 생겼지만
생각과 감정의 속도만큼은
아직도 발군이다
다 적들의 재빠른 행군 탓이다
적들은 내가 무표정할 때 더 극성이다
난해한 책 세권 정도 떼고 나와서
뱀과 이리 같은 걸 들이밀 때도 있다
나는 적들의 사랑에 인류학적으로 혹사당한다
변기에 앉으면 이리와 뱀의
자손들이 몸 밖으로 나온다
나는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다
위스키 석 잔
폭탄주 네 잔
거기다 막걸리도 한 사발 걸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내 속이 내 바깥이 된지 이미 오래다
적들은 나라는 폐가에서
그들만의 사랑을 연주한다
팔목 잘린 쇼팽이
눈빛만으로 비플랫과 시마이너 사이를
현란하게 음독한다
고등학생 때 햇볕 잘 드는 친구 집에서
폴로네이즈 때문에 죽고 싶어진 적 있다
아마도 적들은 그때부터 날 사랑했던 듯하다
나는 내 몸을 내 몸 바깥에서 사랑하고
적들은 내 몸 안에서 내 몸 바깥을 그리워한다
쇼팽이 매독 때문에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오늘 밤에는
나도 폴로네이즈 비슷한 뭔가를 만들고 싶다
나의 사랑은 늘
적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적이다
그러니 어떻게
적들에게 거하게 한판 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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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강정
철저히 고향 미상, 나이 미상으로 살고 싶었으나 실패한 지 오래. 시와 불화하는 순간 세계와도 절연할 거라 믿었으나 그것에도 실패. 대체로 모든 것과 불편해진 상태지만 아직도 뭔가 할 일이 남아있을 거라며 남은 생을 설득 중. 바람이 목덜미를 쓸고 갈 때의 서늘함이나 가끔 마주하게 되는 탁 트인 물가 앞에서의 막막함 따위를 닮아보려 애쓰는 중. 최근 가장 신뢰하는 인간의 말은 화가 김점선이 죽기 전에 쓴 글들이나 이미자의 오래된 노래 같은 것. 한영애도 나쁘지 않고. 아무튼 점점 아줌마가 되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