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화장술
강정
모든 문자는 몸 밖의 거울이 아닌가
차가운 유리알들이 목울대를 넘는다
마음이 검어진 한낮이다
간만에 깊은 독서에 빠져버렸다
나는 어지럽고 착한 사람†이란 시구에서 엄마 밥 냄새가 났다
펄럭이던 책갈피가 옆집 베란다쯤에서 갑자기 지워졌다
예전에 꿈꿨던 풍경이 오래 덧난 검버섯을 밀어젖힌다
상처의 밑뿌리가 눈가를 가린다
햇볕이 몸 안의 검은 유령들에게 꽃가루를 흩뿌린다
분칠이 짙어진 이유는 분한 게 많아서가 아니다
백치처럼 입귀를 찢으니 코밑을 당기는 바람이 순순하다
호~하고 입김을 분다
홀로 명상하던 거울이 와장창 깨진다
첫눈 내리는 꿈 때문에 살짜쿵 기분 좋아진다
햇빛이 여전히 짱짱하다
저 세상에서 미리 내린 그늘이 이제는 푹신푹신하다
나는 다시 예쁜 아이가 된다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그리듯
허공에서 빵빵해진 유리알을 다시 깨문다
이 행동엔 필사적인 거짓의 뉘앙스가 물큰하다
나는 언제든 험악한 아이로 돌아갈 수 있다
기쁘고 슬픈 일이다
입매가 여간 싸늘한 게 아니다
† 김언 시 「그가 토토였던 사람」 첫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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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강정
철저히 고향 미상, 나이 미상으로 살고 싶었으나 실패한 지 오래. 시와 불화하는 순간 세계와도 절연할 거라 믿었으나 그것에도 실패. 대체로 모든 것과 불편해진 상태지만 아직도 뭔가 할 일이 남아있을 거라며 남은 생을 설득 중. 바람이 목덜미를 쓸고 갈 때의 서늘함이나 가끔 마주하게 되는 탁 트인 물가 앞에서의 막막함 따위를 닮아보려 애쓰는 중. 최근 가장 신뢰하는 인간의 말은 화가 김점선이 죽기 전에 쓴 글들이나 이미자의 오래된 노래 같은 것. 한영애도 나쁘지 않고. 아무튼 점점 아줌마가 되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