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쓰자
강정
가면을 쓰고 노래를 부른다. 굳이 노래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평소 내뱉고 싶었으나 맨 얼굴로 하기 힘들었던 말을 해도 되고 책을 읽어도 된다. 말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저 소리만 내질러도 된다. 메시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성대를 크게 열고 목 아래 고여 있던 응어리들을 뽑아 올리면 될 따름이다. 평소에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고 있)던 자신의 얼굴 따위 잊어버리자. 타인이 기억하는 얼굴마저 피부 위에 뜬 차가운 이물감 뒤에 감춰버리자. 스스로를 지운다는 행위 자체에만 몰두하며 소리를 내자. 그저 몸으로 허공에 글을 흘린다는 기분으로, 아~ 아~
아~ 아~ 선연하고 뜬금없고 그리하여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목소리의 진동. 말도 아닌 말들의 찰나적 현전. 의미 과잉을 지나 의미가 생성되기 이전의 어떤 소리들로 급전직하하며 표류하는 목소리. 가면의 입을 통해 몸 밖으로 흐르는 우발적 사고(‘思考’도 맞고 ‘事故’도 틀리지 않다)의 핏줄기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는지, 나의 말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로 파악될는지, 어떤 끔찍한 오해와 고통이 되돌아올는지, 나의 의도가 완전하게 전달될는지에 대한 고민 따위 이 순간 부질없다. 나는 지금 가면 속에서 온전한 나 자신이 된다. 가면을 통해 내 피부 뒤에 오래 숨겨져 있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내 표정과 그 배면에서 조작된 감정들이 속이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의 진심이지 않던가. 가면을 쓰고 소리를 지르는 이 순간, 나는 아주 잠깐 나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듣게 된다. 새로운 변성變聲이 시작된다.
글을 쓴다는 건 내가 진정 원하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기 힘들다는 근원적인 모순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일이다. 그러니 그건 솔직함을 가장한 위선이고 과장된 고뇌이자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그 좌절에 대한 치졸한 엄살에 불과하다. 몸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자들은 굳이 말하려 하지 않는다. 오로지 걷거나 뛰거나 소리 지르거나 춤추거나 날개를 갖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와 맞서 순수하게 몸을 학대할 뿐이다. 그들에겐 의미 생성을 위해 안간힘쓰는 경직된 표정이 없고 감정이 탄로날까 저어하여 누군가의 진심 앞에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음흉하고 허약한 이성이 없다. 가면은 스스로를 가장 적나라하게 발가벗기는 ‘내면의 외양’이다. 가면은 피부의 내부이다.
가면을 쓰자. 가면을 쓴 채 그저 웃기 위해 웃고 울기 위해 울며 몸이 아프지 않기 위해 몸의 극한까지 스스로를 몰아가자. 그러다 보면 모든 게 더 아프고 더 적나라하며 더 가련하다. 그런데 그 가련함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기에 멍청해 보이고 암울해지며 그 암울함에 이끌려 내려가는 허방에서 더더욱 처참해진다. 그러면서 그 처참함을 끌어안고 마지막으로 웃는다. 그 처참함이 벗겨내는 마지막 얼굴이 그들의 진짜 가면이다. 그들은 영혼의 허방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놓고 금방 그것을 잊는다.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렸다. 그것들을 잊기 위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말들로 내 얼굴을 짓찢고 뭉개버렸나. 그 어떤 가면이 내 모든 표정들을 완전하게 감춰버릴 수 있을 것인가. 가면을 쓰자. 나 자신을 가면 바깥으로 내몰아 허공에 띄우자. 말들이 잠간 떴다 사라지는 허공이야말로 모든 말의 잠정적 기착지가 아니던가. 허무 따위는 없다.
가령, 말도로르의 노래에서처럼 양쪽 입귀를 칼로 찢어 가짜 웃음을 만들어내 보자. 평생 닫히지 않는 웃음을 입귀에 매달고 사는 사람의 심오한 고통과 위악과 자기모순을 연기하다가 죽은 히스 레저나 존중받기 힘든 육체적 핸디캡을 오브제 삼아 자신의 가면을 만들어낸 몇몇 희극배우들을 떠올려보자. 자기를 완전히 놓아버릴 줄 아는 것도 삶을 사랑하는 한 방법이라고 할 때, 특정한 편견과 의도를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이는 것도 훌륭한 처세일 수 있다. 이를테면 타인에 의해 규정된 자신의 얼굴을 만인 앞에서 보기 좋게 깨뜨려버리는 것. 모든 기대와 모든 실망과 모든 허상에 대항해 그냥 발가벗은 웃음을 지어보이는 것. 단 한번 헤벌쭉 웃으면서 기쁨과 슬픔과 환희와 고통과 빛과 어둠을 모두 환기하고 동시에 무화시키는 것.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자신을 잊고 세계를 잊는 것. 들숨과 날숨 사이에 고인 마음의 극지를 가래침 뱉듯 단번에 토해내고 구둣발로 짓이겨버리는 것.
그러고 나서 입 닦고 아아 다시 발성을 해보자. 오래도록 다리가 저리다. 차갑게 응결된 ‘허공’ 한줌이 귓속을 파고든다.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하다. 가면으로 가린 내 얼굴이 다 아물어가는 상처자국처럼 서서히 지워진다. 가면을 썼다 벗은 얼굴엔 그 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기묘한 상처가 벌렁벌렁 피부를 찢으며 종양처럼 드러난다. 가을 햇빛이 눈부시다. 거기 얼비친 상처의 밑뿌리를 잘 어루만지면 이윽고 이 몸이 다른 것으로 변할지 모른다. 나는 여러 가면의 숙주, 맵디 매운 양파의 마지막 껍질이고 싶다. 내 얼굴은 늘 ‘허공’을 지향한다. 아마 나는 귀신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정녕 무서운 건 귀신을 불러오는 가면이 아니라 귀신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의 문자일 뿐. 가면을 쓰고 책을 읽자. 그 책은 이제 가면 뒤에 감춰진 당신의 눈이 읽는 세계에서 유일한 책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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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강정
철저히 고향 미상, 나이 미상으로 살고 싶었으나 실패한 지 오래. 시와 불화하는 순간 세계와도 절연할 거라 믿었으나 그것에도 실패. 대체로 모든 것과 불편해진 상태지만 아직도 뭔가 할 일이 남아있을 거라며 남은 생을 설득 중. 바람이 목덜미를 쓸고 갈 때의 서늘함이나 가끔 마주하게 되는 탁 트인 물가 앞에서의 막막함 따위를 닮아보려 애쓰는 중. 최근 가장 신뢰하는 인간의 말은 화가 김점선이 죽기 전에 쓴 글들이나 이미자의 오래된 노래 같은 것. 한영애도 나쁘지 않고. 아무튼 점점 아줌마가 되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