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짐승의 시간
강정
냄새로 사물을 식별하는 건 비단 네 발 짐승의 장기만이 아니다
지워진 너의 냄새가 사방 분분한 낙엽의 마지막 숨결에서 배어나온다
이 친밀도 높은 인분의 기척을 나는 인간에 대한
또다른 전망으로 읽는다
인간이 사랑을 멈추지 않는 까닭은
이미 퇴화한 감각에 대한 질긴 향수 때문이다
기억에서 지워진 사람을 다시 지우려는 욕구 탓인지
휴일엔 동물원이나 유원지 따위가 문전성시다
몸이 쉬는 날치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적이 내게는 없다
끝을 모르는 짐승의 고요한 낮잠을 읽으며 음악을 들으면
허공에 박물관 도록처럼 펼쳐지는 이미 멸종한 생물들의 연대기
이별은 그러니까 내가 고기를 먹는 날이다
소위 인간보다 저능한 것들의 살을 씹으며
인간이기를 방면하려고 애쓰는 건
내 몸 안에서 죽지 않은 누군가의 심장이 짐짓 예술적으로 교태를 부리며
이 몸 바깥의 어떤 사물을 만지려 하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고 나서 거울을 보고
거울에 담긴 서글픈 육식동물의 눈알을 탐하며
지구 멸망의 마지막 스위치를 내리듯 수음에 몰두한다
그 순간 머릿속은 너무도 시적으로 파악해버린 현대물리학 이론의 집성장이다
시와 초가 분방하게 경계를 넘으며 한평 반 남짓 화장실 공간이
수천 만 人馬가 살상된 채 까마귀떼를 호리는
저 먼 당송 시대쯤의 격전장으로 변한다
마지막 한방울까지 토해내면 나는 인간의 정념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까
시공 곡률의 첨단을 제멋대로 해체하려드는 이 미련한 전념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다
황망해진 마음을 후다닥 감추려
짐짓 다른 표정을 바꿔 쓰며 코를 씽긋거리는 이 몸이
어느덧 벌써 다른 짐승의 육체,
고기 냄새를 풍기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내 손길을 피하는 안방 고양이의 새침한 눈알 속이다
이제야 알겠다
살을 부빈 시간이 많을수록 네가 내가 되고 나는 그 어디에도 안 보이는 바람이 되어버리던 까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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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강정
철저히 고향 미상, 나이 미상으로 살고 싶었으나 실패한 지 오래. 시와 불화하는 순간 세계와도 절연할 거라 믿었으나 그것에도 실패. 대체로 모든 것과 불편해진 상태지만 아직도 뭔가 할 일이 남아있을 거라며 남은 생을 설득 중. 바람이 목덜미를 쓸고 갈 때의 서늘함이나 가끔 마주하게 되는 탁 트인 물가 앞에서의 막막함 따위를 닮아보려 애쓰는 중. 최근 가장 신뢰하는 인간의 말은 화가 김점선이 죽기 전에 쓴 글들이나 이미자의 오래된 노래 같은 것. 한영애도 나쁘지 않고. 아무튼 점점 아줌마가 되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