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강정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나무들이 숨은 눈을 뜨는 장면은 오래 전에 읽었던 동화가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미래는 시간의 이동에 의한 게 아니라 시간의 소멸에 의한 잠정적 결론, 너의 문안에서 나는 모든 사랑이 체험하는 종말의 예언을 저작한다 너는 내 혀에서 음악과 시의 법칙을 섭취하려든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든다 그러니까 이 키스는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이다 너의 문은 나의 키스에 의해 열리고 나의 키스에 의해 영원히 닫힌다 나는 너의 마지막 남자다 그러나 네게 나는 최초의 남자다 너의 문안에서 궁극은 극단의 임사체험으로 연결된다 흡혈의 미학을 전경화한 너의 덧니엔 관뚜껑을 닫는 맛, 이라는 시어가 씌어졌다 지워진다 살짝 혀를 빼는 순간, 내 혓바닥에 어느 불우한 가족사가 크로키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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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강정
철저히 고향 미상, 나이 미상으로 살고 싶었으나 실패한 지 오래. 시와 불화하는 순간 세계와도 절연할 거라 믿었으나 그것에도 실패. 대체로 모든 것과 불편해진 상태지만 아직도 뭔가 할 일이 남아있을 거라며 남은 생을 설득 중. 바람이 목덜미를 쓸고 갈 때의 서늘함이나 가끔 마주하게 되는 탁 트인 물가 앞에서의 막막함 따위를 닮아보려 애쓰는 중. 최근 가장 신뢰하는 인간의 말은 화가 김점선이 죽기 전에 쓴 글들이나 이미자의 오래된 노래 같은 것. 한영애도 나쁘지 않고. 아무튼 점점 아줌마가 되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