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을까요
이근화
공원이나 천변에 산책하러 나가고는 합니다. 공원과 광장과 하천을 조성하고 재정비하는 것이 꼭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은 아니겠지만 가까운 곳에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아요. 도심에서 삼림욕이나 숲길까지 누릴 여유가 없으니까요. 많은 철학자와 문인들이 걸으면서 자신의 사유를 구체화시키고는 했지요.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걷습니다만. 주로 중랑천변과 서울숲 공원의 사람들을 구경해요. 강물도 하염없이 보고 큰 나무도 작은 나무도 보고, 땅바닥도 잔디도 봐요. 제초제 냄새, 자동차 매연, 썩은 물내도 맡으면서. 그렇게 걷다가 잠시 나무 그늘 아래 쉬기도 합니다. 새들이 산딸 나무의 붉은 열매를 쪼아 먹다가 하나 두 개씩 툭툭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떨어지는 열매를 맞으면 어쩐지 행운이 찾아올 것만 같습니다. 머리에 물컹한 새똥을 맞을 날도 있겠지만요. 산책을 하는 건 대개 늦은 오후거나 밤일 때가 많습니다. 뉴스라도 보고 나서는 길에는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기 위해 더 열심히 걷습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언제나 도심 공원 이상의 것이고, 잘 정비된 천변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 한 시간에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 사고들이 연일 발생하지요.
얼마 전에는 공원 한쪽에 마련된 곤충 표본실에 들렀어요. 살아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조롱하듯, 나비들이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꼼짝없이 붙박혀 있는 나비들에게 생기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크고 화려한 날개를 보고 있노라니 얼마간 황홀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에는 그들의 대륙 사이즈만큼이나 크고 아름다운 나비들이 훨훨 날아다니나 봅니다. 그들의 고난과 고통 앞에 더 아름답게 주어진 자연은 참담한 것이겠지요. 고통과 고난의 크기를 운운하는 문명인의 시선도 썩 반갑지만은 않겠지만. 손바닥만큼이나 크고 바다보다 짙푸른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하는 걸 보면 꿈속 같겠지요. 물론 곧 부서질 듯 약하고, 작고, 가벼운 토종 나비들도 사랑해요. 노랑나비 흰나비 동요 속에서 튀어 나온 것 같은 나비들이요. 영혼이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몸은 나비인 것 같아요. 배추잎사귀를 갉아먹는 애벌레들의 물컹물컹한 시간들이 어서 지나기를 기다렸던 어린 시절이 있었지요.
집안에 별안간 날아든 나비를 보면 신성해지는 기분이 들고는 하는데요.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는 더 그래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집안에 들어 온 이상스러울 만큼 크고 검은 나방과,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창문에 딱 붙어 날아가지 않는 매미 같은 것이 그랬어요. 죽음이라는 저편에서 삶의 이편으로 보낸 커다란 눈빛 같았지요. 아직 이 세계를 떠나지 못해 들여다보고 있는.
곤충 등속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한 달에 두세 번 이상은 엄마를 모시고 큰 병원에 다녀요. 지병인 고혈압 이외에 여기저기 아프신 데가 많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쓰러지셔서 입원을 하시는 일이 생기고는 합니다. 병원에 그렇게 많은 진료과가 있는지 예전에는 몰랐어요. 몸도 약해지셨지만 마음으로부터 온 병이 많습니다. 그 많은 통증이 신경쇠약과 우울증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아요. 엄마는 고독했던 겁니다. 남편과 자식들이 자본의 충실한 노예가 되어가는 동안 말입니다. 에어로빅과 수영이 치솟는 혈압을 내리지 못했고, 계모임과 등산이 마음의 빈틈을 채울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요. 가족 내의 불화는 매우 평범한 것이었고 아무도 어쩌지 못했어요. 세상의 많은 자식들이 그렇듯, 자신의 부모님과는 화해가 잘 되지 않아요.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소리 또는 연락 두절. 이런 것들로 제 신경도 과민해져 있어요. 엄마는 아빠도, 오빠들도, 친구들도 있지만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엄마를 많이 아프게 했고, 지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이를 갖게 된 후로는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생명을 짓는 일이 죽음을 짓는 일과 같아서.
콩, 하고 처음 태동을 느꼈을 때 위로받는 기분이었어요. 괜찮아. 그러는 것 같았지요. 저는 확실히 낙관적인 데가 있는 모양입니다. 커다란 어항이 된 기분이었다가 과일 바구니가 된 기분이었다가 그랬어요. 술도 담배도 없고, 카페인의 알싸한 맛도 밤샘도 없고, 밝아오는 창문도 새벽에 꺼지는 가로등도 없고, 달리기도 등산도 없는 시간들로부터 아이는 자라나고 있어요. 올챙이 금붕어 잉어 가물치 크기로, 체리 귤 사과 참외 수박 크기로 점점. 이제 제법 사람 모양을 갖추고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꾸르륵 갸르릉 고양이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고양이처럼 이기적입니다. 아무 때나 함부로 밀고 들어오겠지요.
내 몸 속에 있지만 언젠가 떠나겠지요. 괜찮겠지요. 나도 너도. 또 우리도.
나는 아이들보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소리를 더 좋아했습니다. 잠이 덜 깬 아침 멀리서 들려오는 등교하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지요. 아이들은 새 같이 맑고 곱고 다정한 소리를 냅니다. 그것도 떼로. 냄새 나고 울고 물컹한 아이들을 좋아하게 된 건 조카가 생기고 난 후부터입니다. 여행 중에 조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지요. 이 세계에 전에 없던 새 생명이 태어나 발을 붙이고 나를 고모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는 짐승의 붉은 덩어리처럼 보였습니다. 아빠를 닮아 못생긴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퍽 사랑스러웠습니다. ‘다해’는 할아버지가 30만원을 주고 사온 이름입니다. 예쁜 여자아이로, 검은 머리 검은 눈의 한국인으로,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랄 것입니다. 다해야 부르면 까르륵 웃던 아이가 이제는 제법 컸어요. 말을 배우기 시작해서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구분하고 고모에게 예쁜 말들을 골라 합니다. 공룡박사가 되고 싶답니다. 사랑스러워서 뜯어 먹고 싶을 정도입니다.
머지않아 다해도 말 안 듣고, 고집 피우고, 비딱하게 나오겠지요. 그러다가 문득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과 세계의 존재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왜 다해인가. 그러다가 이유 없이 나 이다해는 김아무개를 사랑한다고 믿게 될 것입니다. 순순히 아이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겁니다. 벼랑 끝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인내심을 가지고 쳐다보는 기분이 들겠지요. 꼭 떨어져 죽지는 않더라도 말입니다. 자신을 찾아가는 오랜 시간을 앞에 둔 아이들이 가엾지만, 그런 시간과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더 많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은평 천사원에 삼천 원, 유니세프에 만 원, 적십자 모금 오천 원. 관공서나 은행에 가서 동전 몇 개를 넣는 일로 나는 그 많은 아이들과 이웃들을 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간 잊혀집니다.
기억과 망각의 놀이 한 가운데, 가끔씩 제 자신이 낯설어 지고는 합니다. 내 몸 속에 내가 담겨 있는 것이 한없이 이상스러워요. 날마다 조금씩 다른 것이 닮기는 것 같기도 하고, 담겨 있는 것이 조금씩 사라지거나 상하는 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거울이나 사진을 보면 내 육체의 너무나 선명한 경계가 의식되어서 불편해지고는 하지요. 항상 그것은 내가 되기에 모자라거나 넘칩니다. 내 육체는 부끄럽거나 아름답지요. 그래도 나는 나라는 경계를 지우거나 찢어발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속으로 가만 가만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나는 두 개의 몸이 하나다. 내 몸이 내 몸인 것만은 아니다. 당연한 사실을 어렵게 깨닫습니다.
뱃속의 아이와 내가 지금 그런 것처럼, 영원히 한 몸인 것처럼 느끼며 살 수는 없겠지요. 나비의 양쪽 날개가 나란히 접히는 것과 같은 완벽한 일체감 같은 것은 언제라도 끝장나겠지요. 아이들이 언제나 사랑스럽기만 하겠어요. 내 젖을 먹고 살아남은 주제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의 취향과 기호가 생겨나겠지요. 가벼운 분리 장애 같은 걸로 현기증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처럼 엄마의 치마를 꼭 쥐고 오래도록 따라다닐 지도 모릅니다. 엄마가 일보러 가면 화장실 문고리를 쥐고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냄새를 참지 떨어지는 건 못 참을지도 모릅니다.
큰 나비 작은 나비 날아오르는 이 세계에 또 하나의 생명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제대로 된 답을 찾기도 전에 아이는 뿅, 하고 나타나 밤마다 빽빽 울어댈 겁니다. 생각 같은 건 더 할 여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 시를 쓴 적이 언제더라 하며 내 인생을 놓고, 한숨을 푹푹 쉬어대고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고 아픈 팔 다리 허리를 붙잡고 울지도 모릅니다. 정말 괜찮을까요?
여전히 굶거나 병들어 죽는 아이들이 많은 세계에서 우리 아이는 피둥피둥 살이 오를 겁니다. 과잉보호와 사교육에 길들여지겠지요. 겨누지 않아도 될 것을 잘도 겨누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비싼 교육비를 지불하고 배울 겁니다. 복지가 아니라 인권 그 자체를 위해 여전히 투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과 사실성을 구분하고 허울을 근사하게 포장할 줄 아는 능력도 갖추게 될 겁니다. 남을 기쁘게 하는 일이 제 자신의 기쁨이 되는 줄도 알겠지만, 자신의 더 큰 기쁨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지는 습관도 들게 될 겁니다. 제 부모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제 부모를 부정하다 긍정하다, 부모 없이도 잘 살아갈 겁니다. 죽음이라는 길 끝에 언제나 새로운 삶이 얼굴을 내밀고 있어서 자신을 위로하는 질문을 만들어 낼 겁니다. 괜찮을까요, 묻게 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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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이근화
이름은 이근화. 금호동의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 좁은 골목길에서 놀며 자랐음. 재래시장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시장가는 엄마의 치마를 붙잡고 졸졸 따라 다님. 여중, 여고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떡볶이 집과 햄버거 가게 전전. 늘 졸리고 피곤하고 배고팠던 것 같음. 문학과 미술을 좋아함.
<현대문학> 신인 추천을 통해 시로 등단. 시집으로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가 있음. 『안녕, 외계인』이라는 동시집도 있음. 시도 소설도, 자신의 작품도 다른 사람의 작품도 좋아하나 왜 그러냐고 물으면, 변변찮은 대답 뿐. 윤동주상 젊은작가상을 받았음.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프랑시스 잠을 부르던 부끄럼 많은 시인의 이름을 건 상이라 좋았음.
국문학을 전공, 1930년대 시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문학 연구에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음. 최근에는 김수영의 조어에 대한 짧은 논문을 썼으나 커다란 성과는 없었음. ‘문장’에 나타난 조선인들의 신체에 대한 사유를 더듬어 보고 있으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음.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안내서 읽는 것을 더 좋아함. 비행운과 공항버스를 보면 마음이 설렘. 여행을 가게 되면 주로 공원을 산책하거나 시장 구경을 하며 지칠 때까지 걸어 다님. 음식점이나 기념품 가게보다는 마켓에서 자질구레한 것들을 사고 먹느라 대부분의 돈을 씀. 돌아와 보면 언제나 똑같은 집과 가족과 친구들이 신기해서 자주 떠남.
말을 잘 못해서 적당히 웃음으로 때우려는 경향이 있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대충 둘러대는 경우도 많음. 실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못 알아듣고 전화 통화하는 걸 특히 싫어함. 규칙적인 생활과 집밥을 좋아하고, 적게 벌고 적게 쓰며 고요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잘 안됨. 혼자 있는 걸 좋아하나 남편과 떨어져 잘 못 지냄. 낙관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