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
김이듬
내 열쇠는 피를 흘립니다 내 사전도 피를 흘립니다
내 수염도 피를 흘리고 저절로 충치가 빠졌습니다 내
목소리는 굵어지고 주름도 굵어지고 책상 서랍의 쥐
꼬리는 사라졌습니다 소문대로 난 일 년의 절반을 지
하실과 지상에서 공평하게 떠돕니다
나의 눈에서 물이 흐릅니다 한쪽 눈알은 말라빠졌
습니다 두 다리의 무릎까지만 털이 수북합니다 음부
의 반쪽에선 피가 나오고 오른쪽 사타구니엔 정액이
흘러내립니다 백 년에 한 번 있는 일입니다만
하하하 농담 그냥 여자도 남자도 아니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라는 말을 요즘 유행하는 환상적 어투로
지껄인 겁니다 말도 하기 귀찮다는 예 바로 그 말입죠
자자 내게 제모기와 쥐덫은 그만 보내시고요 이가
들끓는 가발도 처치곤란입니다 도려서 얹어놓은 과
일들 이 모든 쓰레기는 충분해요 머리맡에 양초든 향
이든 피우지 마세요 죽겠네 정말 꽃 무더기 따위 묶
어오지 말라니까요
죽은 장미가 그랬죠 너는 아름답구나
지금은 뼈만 남은 늙은이와 놀다 쉬는 참입니다 매
일 한두 명과 그러고 그러지만 어떤 날은 여자 애들
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정신이 나갑니다 공동묘지로
허가 났나요 전기가 끊어지고 수도관이 막힌 지도 한
참 됐어요 하긴 정신 차린다는 말의 뜻도 모르지만
제발 축언은 닥치고요 축복도 그만 좀 주세요
지하실엔 매달 공간이 없답니다 정원에도 파묻을
자리가 없구요 누군 나더러 불러들였다는데 제 발로
찾아와 발가벗는데 난들 별 수 있나요 공평하게 대할
수밖에
내게 없는 걸로 주세요 가령 고통이니 절망 허무랄
까 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전에만 있는 그 말뜻
이 통하게요 안 될까요 그럼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흔
해빠진 문구를 써먹을 수 있는 상황이랄까 혹은 질투
라는 단어에 적합한 대상을 보내주세요
누가 봤을까요 나도 날 못 봤는데
그러나 나는 아름다워요
『명랑하라 팜 파탈』에서 전재. (김이듬,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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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이듬
2001년 계간 『포에지』 가을호에 「욕조 a에서 달리는 욕조 A를 지나」 외 6편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데뷔했다. 시집 『별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을 펴냈고, 올 연말에 시집 1권, 산문집 1권을 펴낼 예정이다. 현재 아웃사이더, 소수자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